‹ 목록으로 아버지, 정략결혼 할게요

1화

눈을 떴을 때, 천장이 너무 높았다. 원래 내 방은 천장이 손을 뻗으면 닿을 듯 낮았는데. 아니, 잠깐. 손을 뻗어봤다. 짧다. 손이 짧다. 몸이 작다. 뭐야 이거. 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내 손을 몇 번이나 쥐었다 폈다 했다. 다섯 살쯤 어린애의 손이었다. 손가락이 짧고 통통했고, 손톱 밑에는 뭔가 마른 흙 같은 게 껴 있었다. 분명히 어젯밤엔 편의점에서 산 삼각김밥을 먹으면서 넷플릭스를 보다가 잠들었는데. 그 다음 기억이 없다. 대신 다른 기억이 있었다. 낯선데 낯설지 않은, 이상하게 이미 내 것인 것 같은 기억들. 강씨 남작가. 강도윤. 다섯 살. 이 몸의, 그러니까 내 이름이었다. 이불을 걷어보니 손목에는 얇은 은색 팔찌가 하나 걸려 있었다. 무늬가 새겨진 것도 아니고 그냥 밋밋한 고리였는데, 신기하게도 기억 속에서 그게 뭔지 바로 튀어나왔다. 마력 측정용 인식표. 어릴 때부터 차고 다니는 거라고 했다. 다섯 살짜리 손목에 채워진 그 팔찌가 자꾸 헐렁하게 흔들리는 게 괜히 신경 쓰였다. "막내 도련님, 일어나셨어요?" 문 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려다 균형을 잃고 옆으로 굴렀다. 다섯 살 몸이라는 게 이렇게 다루기 힘든 건지 몰랐다. 팔다리 비율이 이상한 건지, 아니면 근력이 그냥 없는 건지. 침대에서 굴러떨어지기 직전에 겨우 이불을 붙잡고 버텼다. "어, 어. 일어났어." 목소리도 이상했다. 가늘고 높았다. 이게 내 목소리라니. 몇 번 입을 벙긋거려 봤다. 발음도 좀 샜다. 혀가 짧아진 느낌이었다. 문이 열리고 하녀 한 명이 들어왔다. 나이는 스무 살쯤 되어 보였고,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나를 보는 눈빛이 벌써 지쳐 있었다. 눈 밑이 거뭇했다. 잠을 잘 못 잔 사람 특유의 얼굴. "세숫물 가져왔습니다." 짧게 말하고는 대접을 내려놓고 바로 나갔다. 인사도 없이. 뭐, 그래도 되나 싶었는데, 머릿속에서 다른 기억이 끼어들었다. 아, 맞다. 나 성격이 더러웠지. 전에 있던 하녀는 내가 던진 컵에 맞아서 나갔다고 했다. 그 전 하녀는 방에서 쫓겨나듯 나갔고. 세 명째던가. 아니 네 명째던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이 몸이 원래 성격이 지랄맞았다는 거였다. 세숫물에 손을 담그면서 곰곰이 생각해봤다. 도대체 다섯 살짜리가 뭘 얼마나 심하게 굴었으면 하녀가 넷씩이나 나갔을까. 컵을 던졌다는 건 알겠는데, 그 전의 셋은 또 무슨 일을 겪은 건지. 기억이 친절하게 다 알려주진 않았다. 그냥 "성격이 나빴다"는 느낌만 뭉텅이로 남아 있을 뿐. 좋았어, 문제 하나 확인. 일단 상황 정리를 좀 해보자. 나는 강씨 남작가의 막내아들, 강도윤. 위로 이란성 쌍둥이 누나가 둘 있고, 이름은 강채원, 강라영. 아버지는 강대호, 남작가의 당주. 어머니는 윤미경. 마력 재능 검사는 세 살에 받았고, 결과는 3147이었다. 최대치가 10000이라던데, F등급. 진짜 바닥이었다. 반면 쌍둥이 누나들은 둘 다 7298. 압도적인 차이였다. 그러니까 이 집안에서 나는, 말하자면 투자 가치가 없는 자식이었다. 마력이 곧 계급이고 곧 신분인 이 세계에서, F등급 아들에게 자원을 쏟을 부모는 별로 없었다. 실제로 이 방에 놓인 가구들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낡았다. 침대 프레임 모서리가 살짝 부서져 있었고, 벽지도 색이 바랬다. 쌍둥이들 방은 훨씬 화려하다는 기억이 딸려왔다. 조각이 새겨진 침대 헤드, 벽마다 걸린 그림, 커다란 창문. 대충 봐도 이 방과는 딴 세상이었다. 버림받은 서열, 정확한 표현이었다. 근데 그게 나한테 나쁜 소식일까? 솔직히 말하면, 나는 좋았다. 전생에 나는 뭐였더라. 서울 어느 구석 원룸에서 십 년 넘게 자취하면서, 편의점 도시락 세일 시간표를 외우고, 지하철 정기권 환급 기한을 절대 놓치지 않는 그런 인간이었다. 딱히 큰 꿈이 없었다. 그냥 조용히, 돈 안 쓰고, 남 눈에 안 띄고 살다 가는 게 목표였다. 회사에서도 승진 같은 거 신경 안 쓰고, 딱 잘리지 않을 만큼만 일했다. 그게 내 인생의 최고 전략이었다. 그런 내가 이세계에 떨어졌는데, 하필 영웅 재능 없는 몸으로. 이거 완전 나한테 딱이잖아. 영웅이 되고 싶은 마음 같은 거, 전혀 없었다. 관심병자처럼 몸 사려서 튀어야 할 이유도 없었고. 그냥 F등급으로, 관심 밖에서, 조용히 있으면 되는 거였다. 오히려 마력 낮은 게 감사할 지경이었다. 이런 세계에서 마력 높은 애들은 분명 어디 끌려가서 뭐 검사받고, 후계자 경쟁하고, 정략결혼하고, 별의별 고생을 다 할 텐데. 나는 그런 거 하나도 안 해도 된다는 거잖아. 완벽하다. 문제는 딱 하나였다. 이 몸의 원래 성격. 전에 살던 인격이 남긴 못된 습관들이 몸에 배어 있었다. 하녀에게 물건 던지기, 소리 지르기, 밥투정. 다섯 살짜리가 할 법한 못된 행동들이 그대로 몸에 남아 있었다. 심지어 아까 세숫물을 가져온 하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순간적으로 "왜 물이 이렇게 뜨거워" 하고 짜증부터 내려는 충동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습관이란 무섭다. 몸에 남은 버릇이 생각보다 강했다. 그리고 그게 문제였다. 조용히 살려면, 일단 주변 사람들이 나를 감시하거나 신경 쓰지 않아야 하는데, 성격이 이 지랄이면 계속 사람들 눈에 걸린다는 거였다. 튀지 않으려고 아무리 애써도, 성격 하나로 이미 이 집 안에서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다. 하녀들이 계속 그만두는 것도 눈에 걸리는 일 중 하나고. 사람이 자꾸 들고 나면 당연히 소문이 돈다. 저 집 막내 도련님 성격이 어쩌구, 하는 이야기가 하인들 사이에서만 돌아도 결국 부모님 귀에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면 관심이 쏠린다. 관심이 쏠리면 감시가 는다. 나한테는 최악의 흐름이었다. 일단 성격부터 고쳐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것도 최대한 빨리, 조용하게. 눈에 띄지 않게 성격을 고친다는 것 자체가 좀 모순 같긴 했지만,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하나씩, 화날 때마다 참으면 되는 거 아닌가. 다섯 살짜리한테 그게 쉬울진 모르겠지만. 그런데 그날 오후, 어머니 윤미경이 방에 들렀다. 노크도 없이 문이 열리는 소리에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몸이 알아서 반응하는 걸 보니, 예전의 강도윤도 어머니 앞에서는 어느 정도 눈치를 보긴 했나 보다. "도윤아, 다음 주부터 새로운 전속 하녀가 올 거다." "또요?" "이번엔 오래 버텨줬으면 좋겠구나." 어머니의 목소리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아, 이 집에서 내가 얼마나 골칫거리였는지 실감이 났다. 어머니는 나를 똑바로 보지도 않고 방 안을 대충 훑어보더니, 침대 옆에 놓인 깨진 컵 조각을 발견했는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아마 저 컵도 내가, 아니 원래의 강도윤이 던진 물건 중 하나였겠지. "누군데요." "도자기 장인의 딸이라던데. 자세히는 모른다. 어쨌든 예의는 지켜라." 예의를 지켜라, 라는 말이 이 상황에서 얼마나 공허하게 들리는지. 이미 넷이나 도망간 전적이 있는데 이제 와서 예의를 지키라니. 어머니도 별로 기대는 안 하는 눈치였다. 그냥 형식적으로 한마디 던지고 가는 느낌. 어머니가 나가고 나서,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다리를 흔들었다. 새 하녀라니. 또 몇 주 만에 도망갈 사람이 오는 건가. 솔직히 이번 사람한테는 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야 남의 몸에 들어온 거지만, 그쪽은 아무것도 모르고 이 집에 발을 들이는 거니까. 도자기 장인의 딸이라니, 뭐 하다가 여기까지 팔려오듯 오게 된 건지도 궁금했다. 어쩐지 이번엔 좀 다르게 해봐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최소한 물건은 던지지 말자. 그 정도는 다섯 살짜리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나는 그렇게 다짐하며 침대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다리가 짧아서 그런지 바닥에 발이 닿는 순간 몸이 살짝 휘청거렸다. 이 작은 몸으로 대체 뭘 할 수 있을지, 아직은 감이 잘 안 잡혔다. 하지만 확실한 건 하나 있었다. 조용히, 눈에 안 띄게, 그렇게 살아남는 것. 그게 이번 생의 유일한 목표였다. 그리고 다음 주, 그 새 하녀가 들어오던 날. 나는 그 결심이 얼마나 순진했는지를 곧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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