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다음 며칠, 강민준의 하루는 이상하게 윤아린을 중심으로 재편되기 시작했다.
정확히 하교 시간마다 복도 끝에서 그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오후 햇살이 복도 바닥에 길게 늘어질 즈음이면, 윤아린의 그림자는 이미 신발장 근처 벽에 붙어 있었고, 그 그림자의 길이가 매일 조금씩 달라지는 걸 강민준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별다른 말 없이 나란히 걸었다. 보폭을 맞추는 법도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두 사람의 걸음은 늘 같은 속도로 흘러갔다. 가끔 편의점에 들러 캔음료를 사서 그의 손에 쥐여주었는데, 그 손끝이 스칠 때마다 캔의 서늘한 표면 온도가 유난히 오래 남았다.
대가를 바라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그 무조건적인 호의가 오히려 강민준의 마음속에 낯선 경계심을 만들어냈다. 사람은 보통 무언가를 바라고 다가온다는 걸, 그는 한서연을 통해 배운 바 있었으니까.
"왜 자꾸 이렇게 잘해줘." 그가 어느 날 물었다. 캔음료를 받으며, 캔 표면에 묻은 물기가 손바닥을 따라 흘러내리는 걸 느끼며.
"싫어?" 윤아린이 반문했다. 목소리에는 억양이랄 게 거의 없었다.
"싫은 건 아닌데..." 강민준이 말을 흐렸다. "이유가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윤아린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이 향한 곳은 텅 빈 운동장이었는데, 정작 그곳에 뭔가 볼 게 있어서라기보다는 강민준의 눈을 피하기 위한 동작처럼 보였다.
"이유 없이도 좋을 수 있는 거야." 그녀가 말했다. 담담한 어조였지만, 그 말 속에는 뭔가 그녀 자신도 다 설명하지 못하는 무게가 실려 있는 것처럼 들렸다. 마치 저울 위에 올려놓은 추가 한쪽으로만 기울어 있는데, 그 무게의 정체를 그녀 자신조차 재보지 않은 채 방치해둔 것 같은.
그날 이후로도 두 사람은 매일 마주쳤다. 아침에는 교문 앞에서, 점심시간에는 급식실 앞에서, 하교할 때는 신발장 앞에서. 우연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정교한 반복이었지만, 강민준은 그 반복 속에서 이상하게 편안함을 느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웃는 법을 다시 배우고 있었다. 한서연에게 받은 상처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윤아린과 함께 있는 시간만큼은 그 상처가 조용히 잦아드는 걸 느꼈다.
그러나 이상한 순간들이 반복되었다.
윤아린은 유난히 그의 목소리에 집착하는 듯한 행동을 보였다. 같은 말을 두 번, 세 번 시켰고, 그가 무심코 웃으며 뭔가를 말할 때마다 시선을 고정한 채 미세하게 숨을 죽였다. 처음엔 그저 그의 말을 흥미롭게 듣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의 눈동자가 그를 향할 때마다, 그 안에 담긴 건 흥미라기보다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한 조심스러운 긴장이었다.
"그거 다시 한번 말해봐." 그녀가 말했다. 방금 그가 지나가는 말로 던진 문장을 두고서.
"뭐를?" 강민준이 되물었다.
"방금 그거. 똑같이." 윤아린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
강민준은 영문을 모른 채 같은 말을 다시 뱉었다. 윤아린은 그 말을 듣는 내내 눈을 감고 있었는데, 그 표정이 마치 오래전에 잃어버린 무언가를 더듬어 찾는 사람의 얼굴 같았다.
한번은 그가 노래를 흥얼거리자, 그녀는 스마트폰을 슬쩍 꺼내더니 화면을 켜는 듯한 동작을 하다가 그가 쳐다보자 재빨리 주머니에 넣었다. 그 손놀림이 너무 빨라서, 마치 오래 연습한 사람의 반사작용처럼 보였다.
"...방금 뭐 했어?" 강민준이 물었다.
"아무것도 안 했어." 그녀가 짧게 대답했다.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그 대답이 너무 빠르게 나왔다는 사실이 오히려 의심을 키웠다.
강민준은 그 순간의 위화감을 애써 넘겼다. 그녀의 호의가 진심이라는 걸 의심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누군가에게 다시 마음을 여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 줄 몰랐다고, 그는 생각했다. 한서연과의 관계가 무너진 뒤로 사람을 믿는다는 것 자체가 낯선 감각이 되어버렸으니까.
하지만 마음 한구석, 아주 작은 틈으로 물음이 새어들었다.
그녀는 왜 내 목소리에 그렇게까지 매달릴까?
단순한 관심이라면 설명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스마트폰을 숨기는 순간의 그 조급함, 같은 문장을 반복하게 만드는 그 집요함은 관심이라는 말로는 다 담기지 않는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마치 그의 목소리 자체가 어떤 증거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답을 찾기도 전에, 예상치 못한 그림자가 그의 앞에 다시 드리워졌다.
방과 후 복도, 신발장 앞에서 강민준은 낯익은 향기를 맡았다. 은은하고 서늘한, 예전 옥상에서 맡았던 그 향이었다. 그 향이 코끝에 닿는 순간, 그는 잠시 숨을 멈췄다. 몸이 먼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의 옥상, 그날의 바람, 그날 들었던 말들을.
"이제 그만하자." 그 말이 귓가에 다시 스쳐 지나갔다.
그 사실을 떠올렸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었을 것이다.
"강민준."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한서연이 서 있었다. 표정은 예전과 다름없이 단정했지만, 눈빛만큼은 어딘가 다른 계산을 품은 듯 날카로웠다. 교복 카디건 소매를 매만지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는데, 그것이 추위 때문인지 다른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무슨 일이야." 강민준이 경계하며 물었다.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한서연이 한 걸음 다가섰다. 신발 밑창이 복도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할 말이 있어서." 그녀가 말했다. "이번엔 진짜야."
그 말을 어디서 들었더라, 강민준은 생각했다. 언젠가 그녀는 비슷한 말을 했었다. 그때도 진짜라고 했었다. 그리고 그 진짜라는 말 뒤에는 늘 다른 얼굴이 숨어 있었다.
강민준의 심장이 낯선 방식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그는 판단할 수 없었다. 등 뒤로 느껴지는 서늘한 공기, 복도 끝에서 이쪽을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시선, 그리고 방금 전까지 옆에 있었던 윤아린의 부재. 세 가지 감각이 동시에 그를 조여왔다.
한서연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마치 하려던 말을 삼키고 다른 말을 고르는 것처럼.
"뭔데." 강민준이 다시 물었다. 이번엔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한서연은 대답 대신 그를 응시했다. 그 시선 끝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강민준으로서는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