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윤아린은 그를 이끌고 학교 뒤편, 인적이 드문 화단까지 걸어갔다. 5월의 오후였고,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그 짧은 시간 동안 강민준은 자신을 향하던 시선들이 등 뒤로 흩어지는 걸 느꼈다. 웃음소리, 수군거림, 그 모든 것들이 거리를 두고 멀어졌다가 결국 완전히 사라졌다.
손목을 잡은 그녀의 손은 걸음을 멈출 때까지도 놓아지지 않았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온도였는데, 강민준은 그 감촉이 어색한 동시에 이상하게 안정감을 준다는 사실을 깨닫고 스스로 놀랐다. 누군가 그의 손목을 이렇게 오래 붙잡고 있었던 적이, 마지막으로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화단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꽃들이 듬성듬성 피어 있었고, 그 사이로 벌 한 마리가 낮게 날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꽃잎이 흔들렸고, 그 흔들림이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을 대신 채우는 것 같았다.
"괜찮아?" 그녀가 물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건조했지만, 그 질문 자체가 낯설었다. 누군가 그에게 이런 걸 물어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을 더듬어봐도 떠오르지 않았다.
"...괜찮아." 그가 대답했다. 거짓말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다는 걸, 그 자신도 알고 있었다.
윤아린은 그 대답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 같지 않았다. 그녀는 화단 옆 벤치에 앉으며 옆자리를 손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그 손짓에는 강요도, 부탁도 아닌, 그냥 당연한 듯한 태도가 배어 있었다. 강민준은 잠시 머뭇거리다 그 옆에 앉았다. 벤치의 나무 표면은 낮 동안 데워진 열기를 아직 품고 있었다.
"왜 도와준 거야." 그가 물었다. "우리 서로 말해본 적도 없잖아."
"보기 안 좋아서." 그녀가 짧게 답했다.
그러고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소리만 두 사람 사이를 채웠다. 강민준은 그 정적이 불편하지 않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낯설었다. 보통이라면 이런 침묵은 견디기 힘든 것이었는데, 지금은 왜인지 그 안에 몸을 맡기고 싶었다.
강민준은 무릎 위에 놓인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끝이 아직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이 언제부터 시작된 건지, 교실에서였는지, 복도에서였는지, 혹은 방금 그녀가 손목을 잡았을 때였는지 구분할 수 없었다.
"초등학교 때도 이런 적 있었어." 그가 불쑥 말을 꺼냈다.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마치 오래 참고 있던 물이 작은 틈으로 새어 나오는 것처럼, 말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애들이 나 좋아하는 척하다가 나중에 벌칙이었다고... 그때도 다 웃었어."
그날의 교실 풍경이 잠시 눈앞을 스쳤다. 칠판 앞에 서서 편지를 받아 든 채, 반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둘러싸여 있던 자신의 모습. "장난이었는데 왜 진지하게 받아들여?" 누군가 그렇게 말했었다. 그 목소리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강민준은 씁쓸함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걸 느꼈다.
"그때, 넌 어떻게 했어?" 그녀가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물었다.
"아무것도 안 했어."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냥 참았어. 그러면 지나가니까."
"이번에도 그럴 거야?"
그 질문에 강민준은 대답하지 못했다. 참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을 아예 몰랐기 때문이었다. 참는 것이 유일한 생존 방식이었고, 그 외의 선택지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오래 걸어온 길에서 갑자기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표지판을 마주한 것처럼, 그는 순간적으로 어디로 걸어야 할지 감을 잃었다.
윤아린은 그를 잠시 응시하다가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그녀의 눈동자는 짙은 갈색이었고, 그 안에 담긴 감정을 읽어내기란 쉽지 않았다.
"참지 마." 그녀가 말했다. 짧고 단정한 문장이었다.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가슴에 남았다. 누구도 그에게 그런 말을 해준 적이 없었다. 참아라, 견뎌라, 시간이 지나면 나아진다, 그런 말들만 들어왔을 뿐이었다. 참지 말라는 말은, 그에게는 낯선 언어처럼 들렸다.
"...너, 왜 웃는 걸 본 적이 없다던데." 강민준이 화제를 돌리듯 물었다. 학교에 도는 소문이었다. 윤아린은 누구에게도 웃지 않는다고, 그 무표정이 그녀의 상징이라고, 아이들은 그렇게 말했다. 냉정한 눈빛, 흔들림 없는 걸음걸이,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는 거리감. 그 모든 것이 그녀를 둘러싼 이야기의 재료가 되어 있었다.
윤아린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입꼬리가 아주 조금, 정말 아주 조금 올라갔다. 미소라기엔 희미했지만 분명 웃음이었다. 화단의 그늘 사이로 스며든 햇빛이 그녀의 얼굴 절반을 비추고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여전히 어둠 속에 남아 있었다.
강민준은 그 미소를 보고 순간적으로 숨을 멈췄다. 소문이 틀렸다는 걸, 아니 자신 앞에서만 예외라는 걸, 그는 그 순간 처음 알았다. 심장이 이상한 방식으로 뛰기 시작했다. 두려움도 아니고 기쁨도 아닌,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감각이 가슴 안쪽을 서서히 채웠다.
"...웃었네." 그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윤아린은 대답하지 않고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그 무표정 속에 방금 있었던 미소가 마치 없었던 것처럼 지워졌다. 마치 벽에 그려진 그림을 지우개로 문질러 지운 것처럼,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다시 말해봐." 그녀가 불쑥 말했다.
"...뭐를?"
"방금 한 말. 놀랐다는 거."
강민준은 어리둥절한 채로 다시 입을 열었다. "...웃었네, 라고 했는데."
윤아린은 눈을 살짝 감았다. 마치 그 목소리를 귀 안쪽에 새겨 넣는 것처럼, 그 짧은 순간 그녀의 표정이 이상하게 진지해졌다. 그녀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고, 그 떨림은 바람 때문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강민준은 그 모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어딘가 서늘한 위화감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마치 잘 알지 못하는 문 앞에 서서, 그 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게 무슨 감정인지, 그는 그때도 알지 못했다.
바람이 다시 불었다. 화단의 꽃잎 몇 개가 떨어져 두 사람의 발밑으로 흩날렸다. 윤아린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고, 강민준은 그녀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이 순간이 왜 이렇게 오래 남을 것 같은 예감이 드는지,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