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저주받은 변경백의 계약 성녀

5화

그날 밤, 아지는 진짜로 다시 왔다. 창문 틈으로 스며든 빛이 방 한가운데서 사람 모양을 갖췄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그 모습을 지켜봤다. 이번엔 놀라지 않았다. 낮에 이미 한 번 봤으니까. 사람이란 게 참 신기하다. 처음 보는 요정 앞에서 심장이 튀어나갈 뻔했는데, 두 번째 보니까 그냥 '아, 왔네' 소리가 나온다. 적응력이라는 게 이렇게 무섭다. "계약할 거야, 안 할 거야?" 아지는 서론이 없었다. 본론부터 들이대는 성격인 모양이었다. 나비 날개를 팔랑거리면서, 마치 편의점 알바생이 마감 정산 빨리 끝내자고 재촉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조건이 뭔데." "조건? 조건보다 먼저 알아야 할 게 있어. 너, 죽었었어." "그건 알아." "근데 되돌아왔지. 그게 공짜인 줄 알아? 시간을 되돌리는 힘은 세상에서 가장 비싼 값을 치르는 마법이야. 내가 그 값을 대신 치렀어." 순간 웃음이 나왔다. 냉소가 아니라 진짜로, 뭔가 어이가 없어서 나온 웃음이었다. 마치 배달 앱에서 최소주문금액 채우려고 필요 없는 걸 더 시켰다가 결제 직전에 정신 차린 기분이었다. "그럼 나한테 그 값 받아내려고 온 거야?" "틀렸어. 나는 그 값을 이미 치렀고, 되돌릴 수도 없어. 그러니까 이제 남은 건 하나야. 그 시간을 헛되게 쓰지 마." 헛되게 쓰지 말라는 말이 생각보다 뼈아프게 들렸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이불이 어깨에서 스르륵 떨어졌다. 방 안 공기가 서늘했다. "그럼 계약이라는 건 뭘 의미해?" "내가 네 안의 재능을 깨워줄게. 지맥의 힘을 거꾸로 흡수하는 능력, 그거 제대로 쓰면 이 나라 결계 전체를 네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어. 대신 너는 나한테 그릇이 되어줘. 내가 이 세계에 계속 머물 수 있도록." "그릇이라니, 나 빙의당하는 거야?" "아니, 아니, 그런 거 아니고. 그냥 내가 네 옆에 있을 수 있는 자격 같은 거야. 계약자와 정령의 관계, 딱 그 정도." "정령이라고 자기소개한 적은 없는데." "방금 했잖아." 아지가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정령이라는 단어를 방금 처음 들었는데 이렇게 당당하다. 자기소개서를 면접장에서 즉석으로 써 내는 수준의 자신감이었다.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 "만약 계약 안 하면?" "그럼 너 그 재능, 다시 폭주해서 자멸해. 오늘 낮에 느꼈지? 그거 조절 안 되면 다음번엔 몸이 못 버텨." 선택권이 있는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상 협박이었다. 이 세계에서 성별과 나이를 떠나 나를 협박하는 존재가 이렇게 작고 반짝이는 요정일 줄은 몰랐다. 키가 내 손바닥만 한 게, 말투는 무슨 대기업 채용담당자처럼 사무적이었다. "좋아. 계약해." "생각보다 빨리 결정하네." "어차피 이 나라에 남아 있어도 죽고, 능력을 못 다스려도 죽는 거면 차라리 뭐라도 걸어보는 게 낫지." 죽음은 이미 한 번 겪어봤다. 두 번째는 조금 덜 무서울 줄 알았는데, 막상 닥치면 첫 번째나 두 번째나 똑같이 무서울 거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빨리 결정했다. 무서운 건 어차피 무서운 거고, 선택은 빨리 하는 게 그나마 덜 아프다. 아지가 손을 내밀었다. 나비 날개가 달린 손, 손톱마다 작은 빛이 맺혀 있었다. 나는 그 손을 잡았다. 순간 몸속에서 뜨거운 게 퍼졌다.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오랫동안 막혀 있던 뭔가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배수구가 뚫리는 느낌이랄까. 오래된 하숙집 화장실 배수구가 몇 년 만에 시원하게 뚫리는, 그런 종류의 해방감이었다. 낭만은 없지만 정확한 비유였다. "계약 완료. 이제 넌 지맥의 힘을 조금씩 다룰 수 있게 될 거야. 처음엔 서투르겠지만." "고마워." "고마움은 나중에. 지금은 계획을 세워야지." "계획?" "너 여기 계속 있을 거야? 이 궁에서, 그 사람들 밑에서?" 아지의 말에 나는 창밖을 봤다. 삼 년 전과 같은 달, 같은 하늘. 별자리도 그대로였다. 달라진 건 나 하나였다. 창틀에 손을 얹으니 나무 표면이 차가웠다. 삼 년 전에도 이 손으로 이 창틀을 만졌던 기억이 났다. 그때는 이 궁을 벗어날 생각조차 못했다. "아니. 떠날 거야." "어디로?" 나는 오래전, 회귀 전 삼 년 동안 궁 안에서 스치듯 들었던 이름을 떠올렸다. 왕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변경, 저주받은 영주가 다스린다는 땅. "설한령." 아지가 눈을 크게 떴다. 놀란 얼굴이었다. 반짝이던 날개가 순간 멈칫하는 게 보였다. "거긴 왜? 거기 영주 소문 못 들었어? 저주받아서 아무도 안 가려고 하는 곳인데." "들었어. 그래서 가는 거야. 그 저주가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해보고 싶어서." 사실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회귀 전 삼 년, 궁 안에서 도는 소문 중에 딱 하나, 왕실이 두려워하는 이름이 있었다. 설한령의 변경백. 왕도가 손대지 못하는 유일한 세력. 그곳이라면, 적어도 이 나라 왕실 사람들이 함부로 나를 다시 도구로 쓸 수는 없을 거였다. 성녀라는 이름으로 삼 년을 살아봤다. 기도를 올리고, 신탁을 받고, 사람들 앞에서 웃고, 왕실이 원하는 말을 원하는 순간에 뱉는 일. 그게 얼마나 사람을 갈아 없애는 일인지 이 나라 누구도 몰랐다. 아니, 알았어도 상관 안 했다. 나는 그 갈아 없어짐의 결과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죽음. 그것도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조용하고 깔끔하게 처리되는 죽음. 두 번은 그렇게 안 죽는다. "아지." "으응?" "너 그거 알아? 나 여기서 삼 년 살아봤어. 결과가 어땠는지도 알고." 아지는 잠시 말이 없었다. 요정도 눈치는 있는 모양이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궁을 나설 준비를 시작했다. 사제들은 성녀가 요양을 청했다는 명목으로 순순히 허락해줬다. 이상 반응을 일으킨 성녀를 당분간 왕도 밖에 두는 게 낫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다행히 이번 삶에서는 아직 내가 그렇게까지 쓸모 있는 물건으로 자리 잡기 전이었다. 그게 유일하게 고마운 우연이었다. 짐은 많지 않았다. 어차피 성녀궁에 있던 물건 중 내 것이라 부를 만한 건 몇 개 없었다. 옷 몇 벌, 여벌 신발, 그리고 삼 년 전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던 지도 한 장. 왕도의 상단이 파는 지도에는 설한령이 아예 표시가 안 되어 있었다. 지도 가장자리, 잉크가 흐려지는 구석에 겨우 이름만 적혀 있는 정도였다. 나라 전체가 그 땅을 없는 셈 치고 있다는 뜻이었다. 짐을 꾸리며 아지에게 물었다. "그 저주받은 변경백, 너 뭔가 알고 있는 거 같은데." 아지는 대답하지 않고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 반응이 오히려 더 신경 쓰였다. 요정이 시선을 피한다. 이건 마치 친구한테 "너 어제 술자리에서 무슨 얘기 했어?"라고 물었을 때 갑자기 휴대폰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는 반응이랑 똑같았다. 뭔가 있다는 뜻이다. "아지." "...가보면 알아." "그건 대답이 아니잖아." "가보면 알아, 라니까." 똑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하는 요정의 태도가 더욱 의심스러웠다. 나는 짐 가방 끈을 조이며 그 얼굴을 다시 쳐다봤다. 작고 반짝이는 얼굴에 숨길 줄도 모르면서 숨기려는 표정이 겹쳐 있었다. 그게 더 우스웠다. "좋아, 안 물어볼게. 대신 가서 큰일 나면 네 탓이야." "그건 좀 억울한데." "내가 더 억울하지." 아지는 입을 삐죽였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답을 피하는 요정의 태도에서, 나는 설한령으로 가는 길이 생각보다 훨씬 복잡할 거라는 예감을 지울 수 없었다. 창밖으로 왕도의 첫 마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짐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확인하고, 성녀궁의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 문을 나서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못을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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