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결계 의식이 매달 한 번씩 있는 줄 알았는데, 이번엔 사제들이 일정을 앞당겼다. "국경 쪽 마물 활동이 늘어서"라는 게 이유였다. 지맥에서 영혼을 빨아내는 시술이 보름에 한 번으로 바뀌었다.
보름. 달의 반쪼가리도 안 되는 시간. 회귀 전에는 그 정도 텀이면 몸이 살짝 뻐근한 정도였는데, 이번엔 아니었다. 몸이 상하는 속도가 다르다는 걸 느낀 건 두 번째 의식이 끝난 직후였다.
삼 년 전과 다른 부분이었다. 삼 년 전엔 이렇게 빨리 몸이 상하지 않았는데. 아니, 상했는데 내가 몰랐던 건가. 회귀 전 기억을 되짚어봐도 명확하지 않았다. 그때도 이렇게 자주 시술을 받았던가. 기억이란 게 참 편리하게도, 힘들었던 부분만 뭉텅 잘려나가고 없었다.
"성녀님, 좀 더 힘을 내주셔야 합니다."
"국경의 안전이 성녀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사제들이 번갈아 말했다. 지맥 위에 무릎을 꿇은 나를 내려다보며. 그들 눈엔 내가 사람이 아니라 마력을 짜내는 기계로 보이는 게 분명했다. 충전기 꽂아놓고 배터리 게이지만 확인하는 눈빛. 이 나라 사람들은 참 일관성이 있다. 삼 년 전에도 그랬고 삼 년이 되돌려진 지금도 그렇다.
"조금만... 쉬면 안 될까요."
"성녀님, 국경이 무너지면 백성들이 죽습니다."
그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국경이 무너지면 사람들이 죽는다. 그런데 나 하나 죽어가는 건 아무도 신경 안 쓴다. 이 산수가 이상하다는 걸 아는 사람이 나 말고는 없는 것 같았다. 국경엔 수만 명이 있고 나는 한 명이니까, 하나가 죽는 게 수만보다 싸다는 계산인가. 그 계산식에 내 이름은 분자에도 분모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의식이 거듭될수록 몸이 축났다. 열흘 만에 손끝이 떨리기 시작했다. 삼 년 전엔 반년쯤 지나서야 느꼈던 증상인데, 이번엔 훨씬 빨리 왔다. 뭔가 이상했다. 손끝만이 아니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시야 가장자리가 부옇게 흐렸고, 몇 걸음 걷다가 벽을 짚어야 했다. 시녀가 놀라서 의사를 부르겠다고 하면 사제들이 먼저 와서 "성녀님은 원래 신체가 특별하셔서 그렇습니다"라며 돌려보냈다.
사제들에게 직접 물어봤지만 다들 "성녀님의 그릇이 크셔서 소진이 빠른 것뿐"이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넘겼다. 그릇이 크면 소진이 느려야 하는 거 아닌가. 상식이 통하지 않는 나라였다. 아니, 상식이 통하는 나라가 있긴 한가.
유서은이 궁에 놀러 온 날이었다.
비단 치맛자락을 사락사락 끌며 들어오는 걸음부터가 이 사람은 아무 걱정이 없다는 걸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언니, 얼굴이 왜 이래?"
"성녀 노릇 하다 보니 이렇게 됐지."
"에구, 힘들겠다. 근데 그거 언니가 선택한 거잖아."
선택. 내가 이 자리를 선택했다고 말하는 저 뻔뻔함이 신선했다. 아니, 신선하다기보다 익숙했다. 회귀 전에도 매번 저렇게 말했으니까. 언니가 좋아서 하는 일이잖아, 언니가 자원했잖아, 언니가 국가에 헌신하기로 마음먹었잖아. 강제로 지정된 거라는 사실은 늘 편의상 지워졌다. 편의상, 이라는 말이 딱 맞았다. 누구한테 편한지는 뻔했다.
"내가 언제 선택했어."
"에? 그럼 뭐, 강제였다는 거야?"
유서은은 정말로 몰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표정을 연기라고 하기엔 너무 자연스러웠다. 진짜 몰랐던 거다. 알 필요가 없었으니까.
"서은아."
"응?"
"너는 이 자리 안 하고 싶어?"
유서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웃었다. 그 웃음에 담긴 안도감을 나는 정확히 읽었다. 절대 이 자리엔 오고 싶지 않다는 안도감. 그러면서도 언니가 대신 죽어가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안도감. 두 감정이 한 얼굴에 겹쳐 있는 걸 보는 기분이 묘했다. 마치 편의점에서 유통기한 지난 삼각김밥을 발견했을 때처럼, 알고는 있었지만 눈으로 확인하면 또 다른 씁쓸함이 있었다.
"언니가 잘하잖아."
그 말을 남기고 유서은은 궁을 떠났다. 잘한다, 라는 칭찬으로 모든 착취가 정당화되는 걸 이번 생에도 또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이신후는 그날 아예 오지 않았다. 요즘 자주 그랬다. 처음엔 바쁘다고 했고, 나중엔 핑계도 안 댔다. 약혼자라는 이름표만 남고 실체는 이미 사라진 관계였다. 궁 안 사람들은 여전히 나를 "이신후 공자님의 약혼녀"라고 불렀는데, 정작 그 공자님은 얼굴 한 번 비치지 않으니 그 호칭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종이에 도장만 찍혀 있고 실체는 증발한 계약서 같았다.
보름 뒤 세 번째 의식이 있었다. 이번엔 마물 활동이 더 심해졌다는 이유로 사제 세 명이 추가로 붙어 마력을 더 세게 뽑아냈다. 지맥에 무릎을 꿇는 순간부터 예감이 좋지 않았다. 늘어난 사제들의 숫자만큼 늘어난 압박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지맥과 연결된 순간 몸이 찢기는 것 같은 통증이 왔다. 눈앞이 흐려지고 귀에서 이명이 울렸다. 배 속에서부터 뭔가가 뜯겨나가는 감각. 팔다리가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멀리서 저리는 감각이 동시에 왔다.
"성녀님, 조금만 더 버텨주십시오."
"할 만큼 했잖아요."
"국경이 걸린 일입니다."
또 그 말. 국경이 걸린 일. 이 나라 사람들은 국경만 걸면 뭐든 정당화되는 줄 안다. 국경, 백성, 안전. 세 단어만 조합하면 무슨 짓을 해도 면죄부를 받는 나라. 나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몸속 마력이, 아니 영혼이 빨려 나가는 걸 그대로 느끼면서. 손끝에서부터 시작된 떨림이 팔을 타고 올라와 어깨까지 번졌다. 시야 가장자리가 완전히 검게 물들었다가 다시 밝아지는 게 반복됐다.
사제 하나가 진언을 외는 소리가 점점 빨라졌다. 다른 사제는 마법진 가장자리를 돌며 뭔가를 덧그렸다. 평소보다 손이 더 바빴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저들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멈추지 않았다. 멈추면 국경이 무너지니까. 나 하나가 무너지는 건 계산에 없으니까.
그리고 그 순간, 뭔가가 이상하게 뒤틀렸다.
지맥에서 빠져나가야 할 힘이, 나가지 않고 내 안에서 소용돌이쳤다. 마치 배수구가 막힌 것처럼, 나가야 할 물이 역류해서 다시 차오르는 느낌. 마법진이 붉게 번쩍였다. 원래는 은백색이어야 할 빛이 핏빛으로 물드는 걸 나는 흐려진 눈으로도 똑똑히 봤다. 사제들이 소리를 질렀다.
"이게 무슨..."
"멈춰야 합니다, 당장!"
"안 됩니다, 지금 끊으면 성녀님 몸이 먼저—"
목소리들이 겹치고 부서지면서 하나의 소음으로 뭉개졌다. 누구도 정확한 답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게 그 아우성 속에서 선명하게 드러났다. 몸속에서 뭔가가 임계점을 넘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로 들릴 리 없는 걸 들었다고 착각할 만큼, 감각이 온통 뒤섞였다.
의식이 폭주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