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설마 하는 마음으로 방 안을 뒤졌다. 장롱을 열고, 서랍을 뒤지고, 마지막으로 책상 아래까지 손을 넣어봤다. 먼지만 한 움큼 잡혔다. 그러다 서랍 맨 밑바닥에서 낡은 목판 달력을 찾아냈다. 날짜를 새겨 넣은 나무 조각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요즘으로 치면 탁상 캘린더 같은 물건이었다.
손끝으로 그 표면을 짚어가며 오늘 날짜를 확인했다. 한 줄, 한 줄, 손톱으로 홈을 긁듯이.
숫자를 보고 나는 그대로 방바닥에 다시 주저앉았다.
삼 년 전이었다. 정확히, 내가 성녀로 책봉되기 딱 사흘 전.
와.
이건 뭐지. 시간이 거슬러 갔다는 건 알겠는데, 도대체 어떤 원리로 이런 일이 가능한 건지 감이 안 왔다. 이게 무슨 게임 세이브 로드도 아니고. 죽었다 깨어났더니 삼 년 전이라니, 이런 전개는 웹소설에서나 보던 거 아니었나. 근데 내가 지금 그 웹소설 안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아까 그 빛나던 손톱만 한 존재가 자꾸 떠올랐다. 반짝거리면서 내 눈앞을 맴돌던 그 조그만 빛. 그게 나를 여기로 밀어 넣은 게 틀림없었다. 근데 왜? 무슨 목적으로? 자선사업을 하기엔 이 나라 사람들 중에서 나만큼 도움 안 되는 대상이 없을 것 같은데. 로또도 아니고 시간을 이렇게 되돌려줘서 뭘 어쩌라는 건지.
일단 몸을 살펴봤다. 손을 펴고, 팔을 굽혀보고, 심지어 발가락도 꼼지락거려봤다. 열일곱. 죽기 직전 스무 살이었으니 삼 년 전으로 돌아온 게 맞았다. 손끝이 떨리지 않는다는 것도 확인했고, 심장이 규칙적으로 뛰는 것도 확인했다. 지맥에 영혼을 갈아 넣기 전, 아직 온전한 몸이었다. 손목을 짚어봤다. 맥박이 힘차게 뛰었다. 죽기 전엔 이 맥박이 실 끊어지듯 흐려졌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다행이다, 라고 생각한 시간은 딱 반나절이었다.
오후가 되자 사가에서 사람이 왔다. 왕실에서 보낸 관리였다. 정식 서류를 들고, 정식 예를 갖추고, 정식으로 나를 데려가려고 왔다. 옷차림부터 격식이 흘러넘쳤다. 관복 소매가 방바닥까지 끌릴 정도로 길었고, 손에 든 두루마리엔 옥새 같은 도장이 몇 개나 찍혀 있었다.
"성녀 후보 유서연 님, 사흘 후 책봉식이 있으니 준비해주십시오."
"거절할 수는 없는 건가요?"
관리가 나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눈썹이 위로 슥 올라가는 게, 내가 방금 무슨 외계어를 한 것처럼 보는 표정이었다. 성녀가 되는 걸 거절한다는 개념 자체가 이해 안 된다는 얼굴. 뭐, 그럴 만하지. 국가 최고의 영예니 뭐니 하는 걸 마다하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니까. 실제로는 국가가 삼 년짜리 인신 공양을 하는 거였지만.
"영광스러운 자리입니다."
"영광이요."
나는 그 단어를 곱씹었다. 영광. 지맥에 매달려 영혼이 삭아가면서 죽어가는 걸 영광이라고 부르는 나라. 매달 몸속에서 뭔가 빨려 나가는 감각을 견디는 걸 영광이라고 부르는 나라. 그리고 그 끝에서 독까지 먹여주는 나라. 참으로 영광스러운 나라였다. 영광이라는 말이 이렇게 소름 끼치게 들릴 줄 몰랐다.
거절하고 싶었지만 거절할 방법이 없었다. 이 시대의 성녀 후보는 선택받는 게 아니라 지정되는 존재였고, 지정을 거부하면 가문 전체가 반역죄로 몰렸다. 삼 년 전에도 나는 그래서 받아들였고,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관리는 내 대답을 기다리며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서두르는 기색은 없었다. 어차피 결과는 정해져 있으니까, 라는 태도였다.
다만 이번엔 알았다. 삼 년 후에 벌어질 일을. 유서은이 웃으면서 독을 건넬 거라는 것도, 이신후가 아무 말 없이 그걸 지켜볼 거라는 것도. 그 웃는 얼굴이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다정한 척, 걱정하는 척, 마지막까지 나를 안심시키던 그 표정이.
"알겠어요. 준비할게요."
관리가 안심한 얼굴로 돌아갔다. 두루마리를 다시 말아 넣으면서 콧노래라도 부를 것 같은 걸음걸이였다. 나는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불을 덮었다가 걷어냈다가, 다시 덮었다가. 창밖에 뜬 달을 보면서 계속 그 손톱만 한 빛을 생각했다. 그게 다시 나타나줬으면 좋겠다고, 처음으로 뭔가를 간절히 바랐다. 신도 안 믿는 내가 뭔가한테 빌어본 게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작은 빛아, 나와라. 나와서 설명이라도 해줘라. 나 지금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고.
그러나 그 밤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방 안은 조용했고, 창밖 달빛만 방바닥에 네모나게 떨어졌다. 나는 그 네모난 빛을 손으로 덮어봤다. 따뜻하지도 않았다.
사흘 뒤, 나는 다시 한양성으로 끌려갔다. 정확히는 걸어서 갔지만 기분은 끌려가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마차 안에서 흔들리는 내내 창밖 풍경을 봤다. 삼 년 전엔 이 풍경이 설레었는데, 지금은 사형장으로 가는 길처럼 느껴졌다. 대전에서 다시 관을 썼다. 머리 위에 얹히는 그 무게가 삼 년 전과 똑같았다. 삼 년 전과 똑같은 얼굴들이 나를 내려다봤다. 국왕, 왕비, 그리고 어린 유서은. 아직 열넷쯤 됐을까, 나를 보는 눈에 순진한 호기심만 담겨 있었다. 저 애가 삼 년 후에 나한테 독을 먹일 거라는 걸 알면 지금 저 얼굴이 얼마나 다르게 보일까.
이신후는 이번엔 아직 내 옆에 서 있었다. 약혼자로서. 표정 하나 없이, 예의 그 무심한 얼굴로. 삼 년 전엔 저 무표정을 진중함이라고 착각했었다. 지금 보니 그냥 무관심이었다.
"성녀 유서연은 이제부터 국가의 지맥을 수호할 것이다."
국왕이 선언했다. 목소리가 대전 안에 울렸다. 나는 무릎을 꿇고 그 말을 들었다. 돌바닥이 무릎에 닿는 감각까지 삼 년 전과 똑같았다. 이번에도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싶었다. 시간을 되돌린 게 무슨 의미가 있나. 결국 같은 자리, 같은 역할, 같은 결말로 향하는 거 아닌가. 손톱만 한 빛은 대체 뭘 바꾸라고 나를 여기로 되돌려놓은 건지.
의식이 시작됐다. 사제들이 나를 지맥 위에 세우고 마법진을 그렸다. 바닥에 그려지는 선들이 푸르게 빛났다. 몸속으로 뭔가가 빨려 나가는 감각이 시작됐다. 익숙했다. 삼 년간 매달 겪었던 그 감각이, 이번엔 첫날부터 시작됐다.
첫날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