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폭주라는 게 정확히 뭘 뜻하는지 나도 그 순간엔 몰랐다. 그냥 알 수 있었던 건, 몸속에서 뭔가가 거꾸로 흐르고 있다는 감각뿐이었다. 마치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다가 갑자기 방향을 틀어 위로 솟구치는 것 같은, 말도 안 되는 느낌.
지맥 의식이라는 게 원래 그렇게 화려한 행사였다. 사제들이 나를 원 중앙에 세워두고,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이 서서히 빛을 내면서 내 몸의 힘을 끌어내는 방식. 회귀 전 삼 년 동안 매달 한 번씩 겪었던 일이라 이제는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통증이었다. 뽑히는 느낌, 빨리는 느낌, 텅 비어가는 느낌.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마법진이 붉었다가 다음 순간 초록빛으로 물들었다. 사제들이 뒷걸음질 치며 주문을 외웠지만 소용없었다. 저 사람들, 저렇게 당황한 얼굴 처음 봤다. 원래는 인형 다루듯 무표정하게 나를 세워두던 사람들인데.
"성녀님이 지맥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말도 안 됩니다, 성녀가 지맥을 거부하다니!"
나는 거부한 게 아니었다. 그냥 몸이 알아서 그렇게 움직였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손끝에서 빛이 흘러나왔고, 그 빛이 마법진을 따라 흐르면서 지맥과 나 사이를 잇던 연결을 완전히 뒤집어버렸다. 마치 빨대를 거꾸로 문 느낌이었다. 빨려 나가던 게 아니라, 뭔가가 나에게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편의점에서 파는 그 이상한 탄산음료 있잖아, 마시면 목구멍이 얼어붙는 것 같은 그거. 딱 그런 느낌으로 뭔가가 식도를 거슬러 올라오는데, 근데 이게 목이 아니라 온몸에서 동시에 일어나고 있었다.
"으윽."
머리가 터질 것 같았지만 동시에 이상하게 선명해졌다. 회귀 전엔 몰랐던 감각이었다. 회귀 전 삼 년간 나는 그저 힘을 빼앗기는 쪽이었지, 이렇게 되받는 감각은 처음이었다. 마치 게임에서 늘 얻어맞기만 하던 캐릭터가 처음으로 반격 스킬을 쓴 기분이랄까. 근데 그 반격 스킬이 내 몸을 이렇게까지 개박살 낼 줄은 몰랐지.
의식은 그대로 끝났다. 정확히는, 내가 정신을 잃으면서 강제로 끝났다는 게 맞겠다. 눈을 떴을 때 나는 이미 다른 방에 누워 있었고, 낯익은 천장이 아니었다.
의식이 끝나고 나서야 나는 알았다. 내 안에 뭔가가 새겨졌다는 걸. 사제들은 이걸 "이상 반응"이라고 불렀고, 곧바로 나를 격리시켰다. 성녀가 지맥을 거부했다는 소문이 궁 안에 퍼지면 안 된다는 게 이유였다. 참 편리한 논리다. 성녀가 아프면 아픈 대로 숨기고, 이상하면 이상한 대로 숨기고. 나만 빼고 다들 자기들끼리 뭔가를 결정하는 이 구조, 회귀 전부터 지긋지긋하게 봐온 그림이었다.
격리된 방에서 나는 처음으로 혼자 있는 시간을 가졌다. 침대는 딱딱했고 창문은 밖에서 못을 박아놓은 것처럼 꽉 닫혀 있었다. 감옥이라고 부르기엔 가구가 너무 좋았고, 방이라고 부르기엔 문에 자물쇠가 너무 많았다. 그 애매한 공간에 누워서 천장 무늬를 세고 있었는데, 그 시간에, 그 빛이 다시 나타났다.
손톱만 한 크기, 반짝이는 초록빛. 죽던 순간 봤던 그 빛과 똑같았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저거, 저거 그때 그거잖아.
"...너 그때 그거지."
빛이 대답 대신 내 눈앞에서 뱅글뱅글 돌았다. 마치 놀아달라고 조르는 강아지처럼, 아니 강아지보다는 좀 더 재수 없게, 약 올리듯이 뱅글뱅글. 그러다가 갑자기 사람처럼 목소리를 냈다. 작고, 조금 짜증스러운 목소리였다.
"드디어 알아보네. 셋 다 지켜봤는데 눈치도 없이."
"너 뭐야."
"나? 아지. 이름 정도는 물어보고 반응하지, 사람이 너무 무례하네."
무례하다는 지적을 요정한테서 듣는 기분이 참 묘했다. 죽다 살아난 사람 붙잡고 예의범절 강의를 하다니, 이 조그만 게 보통내기가 아니구나 싶었다.
빛이 서서히 모양을 갖추기 시작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작은 존재, 나비 같은 날개를 달고 있었는데 색깔이 초록에서 금빛으로 계속 바뀌었다. 얼굴은 인간과 비슷했지만 눈동자가 없이 그냥 은은하게 빛났다. 어디서 이런 걸 본 적이 있나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없었다. 이 세계에서도, 전생의 기억에서도.
"너 나 살렸어?"
"살렸다기보단, 되돌렸지. 살리는 거랑 되돌리는 거랑은 다른 개념이야."
"왜?"
아지가 팔짱을 끼는 시늉을 했다. 팔이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어떻게든 팔짱 흉내를 냈다. 그 조그만 몸으로 그런 몸짓까지 완벽하게 소화하는 게 우습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했다.
"그건 지금 말해줘도 이해 못 해. 일단 하나만 알려줄게. 너 방금 그 폭주, 그거 재능이야."
"재능? 몸이 터질 것 같았는데?"
"지맥의 힘을 거꾸로 흡수하는 재능. 이 나라에서 몇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종류야. 원래 있었는데 너 몰랐던 거지. 그동안 계속 뺏기기만 했잖아, 그럴 시간에 뺏는 법을 배웠어야지."
뺏는 법이라니. 나는 아지를 빤히 쳐다봤다. 이 요정이 지금 나한테 도둑질하는 법을 가르치겠다는 건가. 근데 또 듣고 보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삼 년 동안 뺏기기만 했던 걸 생각하면, 뺏는 법 하나쯤 진작 배워뒀어야 했다.
"...나 지금 무슨 상황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모르는 게 당연해. 시간을 되돌리는 거, 아무 대가 없이 되는 일 아니거든."
아지의 목소리가 순간 낮아졌다. 그 낮은 톤이 뭔가 심상치 않았다. 방금까지 장난스럽게 뱅글뱅글 돌던 그 태도와는 완전히 다른, 무게가 실린 목소리였다.
"대가?"
"응. 나랑 계약해. 그럼 알려줄게, 네가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 그리고 그걸 어떻게 되찾을 건지도."
계약이라는 단어가 귀에 걸렸다. 이 세계에서 계약이라는 단어는 절대 공짜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걸, 나는 삼 년의 경험으로 안다. 성녀라는 이름도 결국 계약이었고, 그 계약서에 도장 찍은 건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었다. 근데 이번엔 다르다. 적어도 물어보고는 있잖아.
"그 대가라는 게 뭔데, 미리 좀 알려주면 안 돼?"
"안 돼. 계약하기 전에는 말 못 해. 그게 규칙이야."
"규칙 되게 편리하게 만들었네."
"규칙 만든 거 나 아니거든. 억울하면 그쪽한테 따져."
그쪽이 누군지 물어볼 새도 없었다. 방문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여러 명의 발소리, 그리고 그 사이로 섞여 들리는 낮은 대화 소리. 사제들이 다시 오고 있었다.
아지가 순식간에 빛으로 변해 내 소매 속으로 숨었다. 좁은 소매 안에서도 그 빛은 여전히 은은하게 온기를 냈다.
"생각할 시간, 별로 없을 거야. 다시 올게."
그 말과 함께 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문이 벌컥 열리고 사제들이 들어왔다. 아까 그 당황한 얼굴들이 이번엔 애써 침착한 표정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다들 뭔가를 숨기려는 얼굴이라는 게 딱 보였다.
"성녀님, 상태를 확인해야 합니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손끝에는 아직도 그 초록빛의 온기가 남아 있었고, 소매 안쪽 어딘가에는 여전히 그 조그만 존재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제 하나가 내 손목을 잡고 맥을 짚었다. 다른 하나는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뭔가를 중얼거렸다. 나는 그 모든 손길을 가만히 받아들이면서 생각했다. 계약, 대가, 되찾는다는 것. 저 사람들은 지금 이 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절대 모른다. 그리고 나는, 저들이 모르는 것보다 더 많은 걸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