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삤빅.
또 저 소리다.
병실 모니터의 심박 그래프가 완만하게 오르내렸다. 낮게, 아주 낮게. 마치 숨쉬기조차 벅차다는 듯이.
"어머니."
대답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매번 불렀다. 7년째다. 처음 5년은 그래도 눈을 뜨셨다. 흐릿하게라도, 손을 잡아주셨다. 그다음부터는 아니었다.
숨 쉬고, 생각하고, 말하라.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의식이 남아 있던 그때, 나한테 하신 말씀이었다. 그 말을 붙잡고 나는 7년을 버텼다. 버틴 게 아니라 버텨진 걸지도 모르지만.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차가웠다. 항상 차가웠다. 그런데도 나는 매번 온기를 기대했다. 바보 같은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일곱 살 때였나. 어머니가 처음으로 마나 임플란트 시술을 받게 해주신 게. 그때는 이 골목에서도 제법 여유가 있었다. 지금은 그 여유의 흔적조차 남지 않았지만.
"강도윤 씨."
간호사실에서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낯익은 얼굴은 아니었다. 새로 온 사람인가?
"진료비 관련해서 말씀 좀 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올 것이 왔다.
"얼마나 밀렸나요?"
"이번 달까지 합치면... 팔백이 좀 넘습니다."
팔백. 만 원 단위가 아니라 그 뒤에 다시 0이 세 개 더 붙는, 그 팔백이었다.
숨이 턱 막혔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는데. 지난달에 분명 정리했었는데?
"저... 지난달에 분명히 다 냈는데요. 뭐가 잘못된 거 아닐까요?"
간호사가 태블릿을 내밀었다. 화면에 뜬 내역서를 보니 낯선 항목이 하나 추가되어 있었다.
"마나 안정제가 새로 추가돼서요. 최근 상태가 좀 불안정하셔서 어쩔 수 없이..."
어쩔 수 없이. 이 세상에서 가장 무책임한 말이 뭔지 아는가. 나는 이 병원에서 그 말을 백 번쯤 들었다.
"상태가 불안정하다는 게 정확히 어떤 의미인가요?"
"뇌파 활동이 미세하게 감소했어요. 담당의가 판단하기로는 안정제 없이는 위험할 수 있다고..."
위험. 그 단어를 들으면 나는 늘 무력해진다. 뭘 어떻게 해야 위험하지 않게 만들 수 있는지, 나는 아직도 모른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정리하겠습니다."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정리할 방법이 없었다. 나한테는.
간호사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이 오히려 더 아팠다. 동정은 내가 원하는 게 아니었다.
병원을 나서니 밤이었다. 신서울 하층지구, 사람들은 여기를 달빛골목이라고 불렀다. 낮에도 하늘이 뿌옇고 밤에도 별로 다르지 않아서, 언제부턴가 다들 '달빛'이라는 말을 조롱처럼 붙였다.
낡은 임플란트 단자가 목덜미에서 지끈거렸다. 마나를 다루려면 어쩔 수 없이 박아야 하는 장치인데, 이 싼 걸 쓰면 꼭 이렇게 통증이 남는다. 좋은 걸 살 돈이 있으면 애초에 이 골목에 살지도 않았겠지만.
편의점 앞을 지나며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을 봤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눈 밑은 시커멓고 볼은 홀쭉했다. 언제 마지막으로 제대로 잤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 이름: 최 브로커.
또 이 인간이야?
받을까? 안 받으면 어떻게 될까? 어차피 받아야 할 걸 알면서 이 짓을 왜 하는 걸까?
세 번째 벨이 울릴 때까지 나는 화면만 쳐다봤다. 마치 그렇게 하면 시간이 멈추기라도 할 것처럼.
결국 받았다.
"어이, 아크. 잘 지냈어?"
아크. 저 인간이 붙인 별명이었다. 무슨 뜻인지 물어본 적도 없다. 아마 물어보면 더 기분 나쁜 대답이 돌아올 것 같아서.
"무슨 일이시죠."
"무슨 일은. 일 있으니까 전화했지. 오늘 밤 일이야."
"오늘요? 지금 밤 열 시가 넘었는데요."
"그래서? 시간이 뭐가 중요해. 급한 건이야, 급한 건."
숨이 가빠졌다. 오늘은 그냥 쉬고 싶었는데. 병원비 얘기 듣고 나니 다리에 힘도 없는데.
"저 오늘은 정말 좀 힘든데요..."
"힘들어? 야, 너 병원비 안 밀렸어?"
순간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알았지? 아니, 이 인간이 그걸 어떻게?
병원 시스템에 아는 사람이 있는 걸까? 아니면 그냥 찍어서 말한 걸까? 이 골목 사람들 대부분이 병원비에 허덕이니까, 그냥 확률적으로 맞춘 걸지도.
"그게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는데요."
"상관없으면 오늘 일 안 해도 되고. 근데 상관있으면 해야지, 안 그래?"
낮게 웃는 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비웃음이었다. 명백한.
"이번엔 또 뭘 시키려고 그러시나요."
"직접 만나서 얘기하자고. 전화로 할 얘기가 아니야, 이건."
나는 대답을 삼켰다. 삼킬 수밖에 없었다.
"...어디로 가면 되나요."
"거봐, 착하게 말하니까 얼마나 좋아. 서쪽 항만구 12번 창고. 삼십 분 안에 와."
뚜뚜뚜.
전화가 끊겼다.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밤하늘, 아니 밤하늘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뿌연 그 위를 올려다봤다.
왜 항상 나야?
답이 나올 리 없는 질문이었다. 이런 질문을 몇 번이나 던졌는지 세어본 적도 있다. 세다가 그만뒀다. 세는 것 자체가 의미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삼십 분 안에 항만구까지 가려면 골목을 가로질러야 했다. 낡은 리사이클 자전거를 타고 페달을 밟는데, 다리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오늘 하루 뭘 먹었더라?
생각해보니 아침에 편의점 삼각김밥 하나가 다였다.
하아. 이러다 쓰러지는 거 아닌가?
쓰러지면 안 됐다. 쓰러지면 어머니 병원비는 누가 벌까.
페달을 밟을수록 다리보다 머릿속이 더 무거웠다. 팔백만 원. 이번 달에 그걸 어떻게 메꿀 수 있을까. 최 브로커가 주는 돈으로는 턱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매번 그 앞으로 자전거를 몰았다.
골목 어귀에서 낡은 광고판이 깜빡거렸다. '신서울 상층 이주 프로젝트, 당신도 참여할 수 있습니다.' 몇 년째 저 광고가 붙어 있었다. 아무도 저 프로젝트에 참여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항만구는 낮에도 을씨년스러운 동네인데 밤이 되니 더했다. 컨테이너들이 무질서하게 쌓여서 골목마다 그림자를 만들었고, 그 사이로 낡은 가로등만 깜빡거렸다.
자전거를 세우고 걸었다. 발밑에서 낡은 철판이 삐걱거렸다. 이 동네는 걸을 때마다 소리가 났다. 마치 땅 자체가 늙어서 관절이 삐걱거리는 것처럼.
12번 창고 앞에 도착하니, 이미 최 브로커가 서 있었다. 그 옆에는 낯선 사람 둘이 더 있었다. 한 명은 덩치가 크고 팔뚝에 문신이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마스크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왔네, 왔어."
최가 씩 웃었다. 그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항상 뭔가를 감추고 있는 웃음이었다.
"일이 뭔가요."
"간단해. 이 창고 안에 물건이 있는데, 그걸 빼내는 거야. 근데 그 안에 경비 시스템이 좀 살아 있어서 말이야."
"살아 있다는 게... 정확히 어느 정도인가요."
"전기 트랩. 등급은 C급 정도?"
C급이라니. C급이면 마나를 어설프게 다루는 놈은 그대로 감전되는 수준이었다.
"C급이면 저 혼자 감당하기엔 좀 위험한 수준인데요."
"그래서 부른 거 아니야. 니가 방어막 잘 쓴다고 소문 다 났는데."
옆에서 덩치 큰 남자가 낮게 웃었다. 그 웃음도 최의 웃음과 비슷했다. 뭔가를 감추고 있는 웃음.
"저 혼자 들어가는 건가요?"
"어. 니 방어막 있잖아. 그거 쓰면 되는 거 아니야?"
방어막. 내가 쓸 수 있는 유일한 능력. 마나로 얇은 막을 만들어 몸을 감싸는 것. 하지만 그건 완벽하지 않았다. 오래 유지하면 그만큼 몸에서 마나가 빠져나가고, 나중에는 코피가 터지거나 어지럼증이 몰려왔다.
"이 두 분은 뭐 하시는 건가요?"
"쟤들은 밖에서 망보는 거야. 니가 물건 들고 나오면 바로 픽업(pick up) 해서 뜨는 거지."
"보수는 얼마인가요."
"오늘은 특별히 삼십만."
삼십만. 팔백만 원의 병원비 앞에서는 새 발의 피지만, 지금 당장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계산이 빠르다는 걸 자랑스러워해야 할지, 이 상황이 슬퍼야 할지 모르겠다.
"...하겠습니다."
"그래, 역시 아크는 말이 잘 통해."
최가 등을 두드렸다. 그 손길이 마치 소를 다루는 손길 같아서 기분이 나빴지만, 지금 이걸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안에 뭐가 있는지는 안 알려주시나요?"
"몰라도 돼. 그냥 눈에 보이는 상자만 챙겨 나오면 되는 거야. 딴 거 손대지 말고."
수상했다. 항상 수상했지만 이번엔 더. 하지만 지금 그런 걸 따질 여유가 나한테는 없었다.
창고 문이 열렸다. 안은 어두웠고, 저 안쪽 어디선가 파란빛이 스파크처럼 튀는 게 보였다.
숨을 골랐다.
방어막을 펼쳤다.
목덜미의 임플란트 단자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마나가 몸속에서 빠져나가 얇은 막을 이루는 감각. 익숙하지만 매번 낯설다.
그리고 걸음을 옮겼다.
한 발, 두 발. 어둠 속에서 파란 스파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창고 안 공기는 습하고 쇠 냄새가 났다. 오래된 기계 냄새와 뭔가 타는 듯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멀리서 상자 하나가 어렴풋이 보였다. 저게 최가 말한 물건인가 보다.
조심스럽게 발을 옮겼다. 바닥에 낡은 배관이 어지럽게 깔려 있어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갑자기 발밑에서 뭔가가 삐걱 소리를 냈다.
압력 센서다.
온몸이 얼어붙었다.
다음 순간, 창고 천장 전체에서 전격이 쏟아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