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번개로 온 가짜 딸

5화

최인규 박사는 부산 사투리를 쓰는 나이 든 의사였다. 나이는 육십 줄쯤 되어 보였고, 흰머리가 이마 위로 성글게 넘어가 있었다. 그가 병실에 들어올 때마다 뭔가 묵직한 분위기가 따라왔다. 발소리부터 달랐다. 느리고 무거운 걸음, 그리고 그 걸음에 맞춰 흔들리는 서류철 소리. 흰 가운 안에 넥타이를 단정히 매고, 손에는 항상 서류철을 들고 있었다. 안경 너머로 눈을 가늘게 뜨고 환자를 살피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 시선이 나한테 닿을 때마다 나는 괜히 몸을 움츠렸다. 그가 이번엔 정밀검사 결과를 들고 왔다. 그는 침대 옆에 앉아 서류를 펼쳤다. 종이 넘기는 소리가 병실 안의 정적을 갈랐다. 미경 씨는 옆에서 손을 모으고 그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하은이 니, 참 신기한 케이스다. 오만 암페어짜리 낙뢰를 온몸으로 맞았는데 신경 손상이 거의 없어. 이런 케이스는 문헌에서도 찾기 힘들어.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속으로 다른 걸 생각했다. 오만 암페어라는 숫자가 이 몸과 내 정신을 뒤바꿔놓은 원흉이라는 걸, 이 의사는 상상도 못 할 것이다. 그 숫자를 들을 때마다 이상하게 손끝이 저렸다. 그날의 번쩍임, 그리고 정신을 잃기 직전의 감각이 잠깐 스쳤다가 사라졌다. 최 박사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근데 이상한 게 있어. 근육 조직 검사에서 뭔가 미세한 이상 소견이 나왔어. 뭐라 설명하기가 애매한데, 세포 단위에서 뭔가 재배열이 있었던 흔적 같은 게 보여. 나는 순간 숨이 멈추는 걸 느꼈다. 그가 뭔가를 알아챈 걸까. 이 몸이 원래의 것과 다르다는 걸. 손가락이 이불 끝을 저도 모르게 움켜쥐었다. 미경 씨는 그 미묘한 떨림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재배열이라는 게 정확히 무슨 뜻인가요. 미경 씨가 물었다. 최 박사는 안경을 살짝 밀어 올리며 대답했다. 정확히는 저도 모릅니다. 세포 단위에서 뭔가 다시 조립됐다고 해야 할까, 원래 있던 배열이랑 좀 다른 패턴이 관찰됩니다. 흔한 소견은 아니라예. 흔한 소견이 아니라는 말이 유독 귓가에 오래 남았다. 흔하지 않다는 건, 곧 눈여겨볼 만한 무언가라는 뜻이었다. 최 박사는 서류를 넘기며 미경 씨를 향해 물었다. 하은이가 예전에 어떤 성격이었습니까. 좀 활발했나요, 조용한 편이었나요. 미경 씨가 대답했다. 활발했어요. 친구도 많고, 운동도 좋아하고. 근데 최근엔 좀 조용해졌어요. 사고 전부터. 최 박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뭔가를 메모했다. 사고 전후로 성격 변화가 있었다면, 그것도 기록해둬야 할 부분이라. 뇌 손상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으니까. 나는 그 대화를 들으며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성격 변화. 그것은 곧 내가 다른 사람이 됐다는 증거였다. 그런데 이 의사는 그걸 뇌 손상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다행인 걸까, 아니면 시간문제일 뿐인 걸까. 차라리 뇌 손상이라는 진단이 내려진다면, 이 몸에 숨겨진 진짜 이유는 영원히 묻힐 수 있을까. 아니면 언젠가 더 정밀한 검사로, 세포 하나까지 파고들어 결국 진실이 드러나게 될까. 최 박사가 나를 향해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오늘이 며칠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자기 이름이 뭔지. 간단한 질문들이었다. 날짜는 병실 벽에 걸린 달력을 보고 대답했고, 장소는 병원 이름이 적힌 팔찌를 보고 대답했다. 하지만 이름을 말하는 순간, 나는 순간 대답을 머뭇거렸다. 이름을 말하는 순간, 내가 대답해야 하는 이름이 두 개나 겹쳐 떠올랐다. 차은호, 그리고 윤하은. 입술이 잠시 벌어졌다가 다시 다물어졌다. 윤하은입니다. 나는 겨우 그렇게 말했다.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최 박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메모를 이어갔다. 인지 기능은 정상이네. 좋습니다. *** 검사가 끝나고 최 박사가 나가려는 순간, 그가 문득 멈춰 서서 나를 돌아봤다. 손잡이를 쥔 채로 반쯤 몸을 튼 자세였다. 하은이 니, 혹시 요즘 이상한 기억이나 꿈 같은 거 없나. 낯선 장소나 사람이 나오는 꿈. 나는 순간 얼어붙었다. 이 질문이 왜 이렇게 정확하게 나를 겨누는지 알 수 없었다. 심장이 크게 한 번 뛰는 걸 느꼈다. 낯선 장소, 낯선 사람이라니. 내 전생의 모든 순간이 그 문장 안에 다 들어 있는 것 같았다. 회사 사무실, 야근하던 책상, 팀장이라는 직함, 그리고 그날의 번쩍이던 하늘까지. 나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아니요, 특별한 건 없어요. 최 박사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시선이 유독 길게 느껴졌다. 마치 내 대답의 틈을 찾으려는 것처럼. 알겠다. 이상한 게 있으면 바로 얘기해라. 이런 사고는 몸뿐만 아니라 정신에도 영향을 줄 수 있으니까. 그가 나가고 문이 닫혔다. 나는 그제야 숨을 크게 내쉬었다. 참았던 숨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면서 가슴이 저릿했다. 미경 씨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봤다. 괜찮아? 얼굴이 하얗다. 괜찮아요. 그냥 좀 어지러워서. 나는 거짓말을 했다. 미경 씨는 내 이마를 짚어보더니 다시 자리에 앉았다. 손바닥의 온기가 잠깐 이마에 닿았다가 떠났다. 그녀가 서류철을 살짝 곁눈질하다가 물었다. 선생님, 근육 조직 이상이라는 게 위험한 건가요? 최 박사는 문 앞에서 다시 몸을 돌렸다. 지금은 확실하게 말하기 어렵습니다. 좀 더 지켜봐야죠. 근데 이런 재배열 흔적이 나온 케이스는 저도 처음이라, 대학병원 쪽에도 자문을 좀 넣어볼까 합니다. 대학병원 자문이라는 말에 나는 다시 심장이 조여드는 걸 느꼈다. 더 많은 사람이 이 몸을 들여다볼수록, 뭔가 숨겨진 것이 드러날 위험이 커진다는 뜻이었다. 대학병원이라면 이 지역 의료진보다 더 정밀한 장비와 더 많은 전문가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 중 누군가는, 이 재배열이라는 흔적의 진짜 의미를 알아챌지도 몰랐다. 혹시 그 자문이라는 게, 빨리 진행되나요. 내가 물었다. 목소리가 너무 조급하게 들리지 않을까 순간 걱정됐다. 최 박사는 별생각 없다는 듯 대답했다. 그건 좀 걸릴 거다. 서류 준비하고 자료 넘기고, 최소 몇 주는 걸릴 거야. 걱정 마라, 급한 일은 아니니까. 몇 주. 그 시간이 나한테는 유예처럼 느껴졌다. 최 박사가 나가고, 병실에 정적이 흘렀다. 창밖에서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잠깐 울리다가 멀어졌다. 미경 씨가 내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여전히 따뜻했고, 손가락 마디마디가 거칠었다. 걱정하지 마. 무슨 일이 있어도 엄마가 있잖아.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만약 저 근육 조직의 재배열이라는 것이, 내가 이 몸에 들어온 흔적이라면. 만약 그것이 밝혀진다면, 이 가족은 나를 어떻게 볼까. 딸이라고 믿었던 존재가 사실은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미경 씨는 지금처럼 내 손을 잡아줄 수 있을까. 그리고 원래 이 몸의 주인이었던, 어딘가로 사라진 진짜 하은이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혹시 내가 있던 자리에, 그녀가 들어가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머릿속이 온통 뒤엉키는 기분이 들었다. 창밖으로 저녁 해가 지고 있었다. 노을빛이 커튼 사이로 스며들어와 병실 바닥에 붉은 줄무늬를 만들었다. 병실 벽에 붉은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나는 그 그림자를 바라보며, 처음으로 이 낯선 몸이 언젠가 나를 배신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 몸속 어딘가에 새겨진 흔적이, 언젠가 누군가의 손끝에서 완전히 해독되는 날. 그날이 오면 나는 지금 이 침대 위에서, 지금 이 손을 잡아주는 사람 앞에서,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까. 대답을 찾지 못한 채로, 나는 그저 붉게 물든 천장을 오래도록 올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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