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번개로 온 가짜 딸

3화

다음 날 아침, 병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미경 씨였다. 그날은 유독 얼굴이 밝았다. 화장을 곱게 하고, 머리도 단정하게 빗어 넘긴 채였다. 손에는 종이가방이 두 개나 들려 있었다. 하나는 과일 바구니였고, 다른 하나는 옷이 들어 있는 쇼핑백이었다. 이거, 하은이 네가 좋아하는 브랜드 옷이야. 지난번에 백화점 갔을 때 봐뒀던 거. 그녀는 옷을 하나씩 꺼내 침대 위에 펼쳐 보였다. 파스텔톤의 니트와 체크무늬 스커트, 리본이 달린 블라우스. 나는 그 옷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좋아하지도 않는데, 좋아한다고 알려진 옷을 봐야 하는 이 상황이 낯설었다. 이 몸의 취향은 뭐였을까. 나는 알 수 없었다. 옷 태그를 만지작거리며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예쁘네요. 내 목소리가 어색하게 갈라졌다. 미경 씨는 그 반응이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그러다 침대 옆 보조 의자를 끌어와 앉더니 내 손을 잡았다. 손이 따뜻했다. 손등을 쓰다듬는 손길이 익숙한 리듬으로 반복됐다. 아마 예전부터 자주 그랬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내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요즘 왜 이렇게 말이 없어. 예전엔 조잘조잘 잘 떠들었잖아. 학교에서 있었던 일, 친구들 얘기, 뭐 그런 거. 엄마가 귀찮다고 할 정도로. 나는 시선을 피했다.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예전의 하은이는 어떤 아이였을까. 학교에서 뭘 좋아했고, 누구랑 친했고, 어떤 말투로 조잘거렸을까. 나는 그걸 하나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걸 알려줄 사람도 없었다. 아니, 있었다. 이 여자가, 미경 씨가 알고 있었다. 눈앞에서 나를 바라보며 손을 잡고 있는 이 사람이. 그런데 나는 그걸 물어볼 수도 없었다. 물어보면, 내가 하은이가 아니라는 게 들킬 것 같았다. 정상적인 딸이라면 굳이 물을 필요가 없는 것들이었으니까. 미경 씨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손가락으로 과일 바구니의 셀로판 포장을 만지작거리면서. 아빠는 출장 갔다가 다음 주에 온다더라. 전화했더니 당장 오겠다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회사 일이 있어서 어쩔 수 없었나 봐. 소라 언니는 매일 전화해서 너 걱정하고. 태현이는 학교도 안 가고 여기 붙어 있으려고 했는데 내가 억지로 보냈어. 걔가 원래 좀 그런 게 있잖아, 너한테. 그녀의 목소리는 다정했다. 조금은 수다스럽기까지 했다. 그 다정함이 이상하게 나를 짓눌렀다. 나는 이 사람이 나를, 아니 정확히는 이 몸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눈빛에서, 손길에서, 말투에서 그게 그대로 흘러나왔다. 그런데 그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나는 하은이가 아니었으니까. 나는 이 사랑의 수신인이 아니었으니까. 미경 씨는 과일을 깎기 시작했다. 사과 껍질이 나선형으로 길게 이어지며 벗겨졌다. 손이 능숙했다. 몇 번이나 이 짓을 했을까, 이 몸을 위해서. 미경 씨, 아니, 엄마. 그렇게 불러야 하나. 나는 입술을 뗐다가 다시 다물었다. 사과를 깎는 손이 멈췄다. 왜, 할 말 있어? 미경 씨가 물었다. 칼을 든 손이 살짝 기울어졌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라고 말하려던 순간, 갑자기 무언가가 목구멍을 밀고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눌러도 눌러지지 않는 감정이었다. 배 속 깊은 곳에서부터 밀려 올라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뜨거운 것이었다. 엄마. 그 한마디가 입에서 나온 순간, 눈물이 터졌다. 참으려고 했는데 참아지지 않았다. 나는 왜 우는지 정확히 몰랐다. 이 여자가 낯설어서 우는 건지, 아니면 이 여자의 사랑이 너무 따뜻해서 우는 건지. 아니면 내가 이 여자의 진짜 딸이 아니라는 죄책감 때문인지. 어쩌면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밀려온 건지도 몰랐다. 미경 씨는 놀란 표정으로 과도를 내려놓고 나를 끌어안았다. 사과 조각이 침대 위로 굴러떨어졌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어디 아파. 간호사 불러줄까. 그녀의 목소리에 걱정이 뚝뚝 떨어졌다. 손이 내 등을 급하게 두드리다가, 이내 천천히 쓸어내리는 것으로 바뀌었다. 나는 그 품 안에서 오열했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그녀의 어깨에 스며들었다. 나는 말하고 싶었다. 나는 하은이가 아니에요. 나는 다른 사람이에요. 나는 원래 죽었어야 할 사람이고, 이 아이는 지금 어디 있는지도 몰라요. 그 말들이 목구멍 안에서 형태를 갖추려다가, 이내 부서졌다. 대신 나는 그저 울기만 했다. 소리 내어, 짐승처럼, 오래 참아온 것을 다 토해내듯이. 미경 씨는 그런 나를 아무 말 없이 안고 있었다. 등을 쓰다듬는 손길이 느려지고 부드러워졌다. 병실 안에는 내 울음소리와, 그녀가 낮게 흥얼거리듯 내는 다독임의 소리만 남았다. 오랜만에 우는구나. 힘들었지, 많이. 아무 말 안 해도 돼. 그냥 울어. 엄마 여기 있잖아. 나는 그 말을 듣고 더 크게 울었다. 이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나를 완전히 받아주고 있었다. 그게 너무 고마워서, 동시에 너무 미안해서 나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숨을 쉬려고 할 때마다 목이 메었다. 눈물은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나왔다. 볼을 지나 턱 끝에 방울로 맺혔다가, 미경 씨의 어깨로 떨어졌다. *** 한참을 울고 나서, 나는 그녀의 품에서 벗어났다. 눈이 부어서 시야가 더 흐릿했다. 눈꺼풀이 뜨겁고 무거웠다. 미경 씨는 협탁에 놓인 물티슈를 뽑아 내 얼굴을 닦아주며 미소 지었다. 그녀의 손끝이 눈가를 스칠 때마다 차가운 감촉이 남았다. 앞으로 힘든 일 있으면 엄마한테 다 얘기해. 알겠지? 엄마는 항상 네 편이야. 세상 사람들이 다 뭐라고 해도, 엄마만은 네 편이야. 네 편이라는 말이 가슴에 박혔다. 나는 원래 있던 하은이의 편이 아니었다. 나는 그 아이의 자리를 차지한 이물질이었다. 어쩌면 침입자였다. 그런데 이 여자는 그것도 모르고 나를, 아니 이 몸을, 자신의 딸이라고 믿고 사랑하고 있었다. 그 믿음이 견고할수록 나는 더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미경 씨는 다시 사과를 깎기 시작했다. 아까와 같은 리듬으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녀가 건네준 사과 한 조각을 받아 입에 넣었다. 달았다. 그 단맛이 이상하게 서글펐다. 그날 밤, 나는 병실 불을 끄고 누워서 생각했다. 이 관계를 계속 이어가도 되는 걸까. 이 사람의 사랑을 계속 받아먹으면서, 이 몸으로 살아가도 되는 걸까. 언젠가 진짜 하은이가 돌아온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이 자리에서 밀려나는 걸까, 아니면 아예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는 걸까. 아니, 그전에 이 몸에 원래 있던 사람은 지금 어디 있는 걸까. 나처럼 어딘가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가 있는 걸까, 아니면 완전히 사라져버린 걸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나는 이불을 끌어당겨 몸을 덮었다. 병실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코끝에 남아 있었다. 창밖으로 도시의 불빛이 흐릿하게 번져 보였다.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지나가는 소리,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가 사라졌다. 나는 그 불빛을 보며 오랜만에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느꼈다. 낮에 미경 씨의 품에서 울었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그 온기가 아직 몸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눈을 감았다. 잠이 스르르 밀려왔다. 그게 위험한 감정이라는 걸, 그때는 미처 몰랐다. 그 온기에 익숙해지는 순간, 진짜 하은이의 자리를 완전히 지워버리게 될 거라는 것도, 나는 그때는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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