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그날 이후, 나는 나흘을 더 병원에 머물렀다.
하루는 길었다.
아침마다 간호사가 들어와 체온을 재고, 채혈을 하고, 알 수 없는 기계를 몸에 붙였다.
그때마다 손목의 문양은 얌전했다.
아무 반응도 없었다.
그게 오히려 더 불안했다.
"헌터 등급 측정 불가."
담당 검사관이 몇 번이나 고개를 저으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 사람의 얼굴에는 매번 조금씩 다른 표정이 스쳤다.
처음엔 당황, 다음엔 흥미, 그 다음엔 아예 포기한 얼굴.
"이런 케이스는 정말··· 처음 봅니다."
그는 서류를 정리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창밖을 바라봤다.
병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이상하리만치 맑았다.
이 세계에 떨어진 지 벌써 며칠째인데도,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나흘째인데도 여전히··· 이게 다 진짜라는 게 안 믿겨.'
그러던 어느 날 오후,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
낯선 여자 넷이 들어왔다.
검은 전투복을 입고, 몸가짐이 하나같이 단단해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움직임 하나하나에 절제가 배어 있었고, 눈빛은 흔들림 없이 나를 향했다.
"강도윤 님, A등급 보안팀입니다."
선두에 선 여자가 정중하게 말했다.
"오늘부터 저희가 신변 보호를 담당하게 됐습니다."
나는 순간 몸이 굳었다.
'보안팀? 나한테?'
한서연이 옆에서 재빨리 설명을 덧붙였다.
"한강기어에서 정식으로 배속한 요원들이야. 걱정하지 마."
한강기어.
한서연이 대표로 있는 사냥꾼 장비 제작 회사라고 했다.
이름은 몇 번 들었지만, 그게 얼마나 큰 회사인지는 여전히 감이 오지 않았다.
나는 침대에서 어색하게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숙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네 사람 모두, 그 인사에 순간 멈칫했다.
공기가 잠깐 얼어붙은 것 같았다.
"어··· 네, 저희도요."
선두 요원이 살짝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뒤에 있던 다른 요원 하나는 시선을 슬쩍 피했고, 또 다른 하나는 헛기침을 했다.
한서연이 그 모습을 보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직도 이러네."
그녀의 목소리에는 익숙한 듯한 피로가 묻어 있었다.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묻지 않았다.
그냥 넘어가는 게 나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날 오후, 나는 퇴원 수속을 밟고 처음으로 이 세계의 바깥을 봤다.
병원 정문을 나서는 순간,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익숙한 서울의 공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뭔가 미묘하게 낯설었다.
도시는 놀라울 만큼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건물 형태나 거리 구조는 서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간판 글자도 한글이었고, 도로 표지판도 눈에 익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비율이 확연히 달랐다.
여자 한 명이 지나갈 때마다, 그 뒤로 남자 넷 다섯이 우르르 따라가고 있었다.
어떤 무리는 마치 경호원처럼 여자를 둘러싸고 걸었고, 어떤 무리는 그냥 조용히 뒤를 따르기만 했다.
남자들끼리 무리를 지어 걷는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진짜였구나. 여성 1 대 남성 5라는 게.'
나는 그 광경을 신기하게 바라보다, 요원들의 재촉에 차에 올랐다.
검은 세단이었다.
안에는 이미 다른 요원 한 명이 운전석에 앉아 대기하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보며, 나는 계속 그 비율을 곱씹었다.
'이 세계에서는 남자가 이렇게 적다는 건가. 그럼 나 같은 존재가··· 흔치 않다는 거겠지.'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등줄기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
한강기어 본사는 거대한 유리 건물이었다.
햇빛을 받아 표면 전체가 반짝였다.
로비에 들어서자, 지나가던 직원들이 하나같이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들 속에는 호기심과 경계가 뒤섞여 있었다.
한서연은 그런 시선들을 무시하며 앞장서 걸었다.
그녀는 그곳 지하에 마련된 훈련시설로 나를 데려갔다.
엘리베이터가 아래로 내려가는 동안,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숫자가 점점 줄어드는 걸 보며 나는 괜히 손목을 만졌다.
"오늘은 간단하게 능력 확인부터 하자."
한서연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말했다.
훈련장은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
천장이 높았고, 벽 곳곳에 알 수 없는 장비들이 붙어 있었다.
훈련장 중앙에는 커다란 모니터가 있었고, 그 위에 내 이름과 함께 여러 숫자가 떠 있었다.
[강도윤 / 문장 활성도 측정 시작]
"자, 여기 서서 이 표적을 향해 뭔가 시도해봐."
한서연이 저쪽 벽에 붙은 커다란 표적을 가리켰다.
나는 어색하게 손을 뻗었다.
'뭘 어떻게 하라는 거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정적이 흘렀다.
요원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웃음을 참는 게 느껴졌다.
"괜찮아, 처음엔 다 그래."
한서연이 다독여줬다.
두 번째 시도.
손끝에 힘을 줘봤다.
아무 느낌도 없었다.
세 번째 시도.
이번엔 눈을 감고 집중해봤다.
그래도 마찬가지였다.
계속 아무 반응이 없었다.
네 번째, 다섯 번째··· 시도할수록 요원들의 표정이 점점 미묘해졌다.
누군가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갸웃했고, 누군가는 아예 시선을 돌려버렸다.
식은땀이 흘렀다.
'이게 되는 게 맞나? 나만 안 되는 거야?'
한서연도 슬쩍 눈썹을 찌푸렸다.
"음··· 이상하네. 지난번엔 확실히 발현됐었는데."
그 말에 나는 더 초조해졌다.
'그때는 어떻게 됐던 거지. 그때는 대체 뭐가 달랐던 거야.'
그때, 훈련장 문이 열리고 정하은이 들어왔다.
"경과 보러 왔어요."
그녀가 짧게 말했다.
손에는 태블릿을 들고 있었고, 표정은 여느 때처럼 담담했다.
나는 다시 표적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어차피 여러 번 실패했으니, 한 번 더 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정하은과 눈이 마주친 순간이었다.
손목의 문양이 갑자기 뜨끔거렸다.
따끔한 열기가 순식간에 팔을 타고 올라왔다.
[문장 반응 감지.]
[대상: 정하은]
[호감도 급상승. 매혹 효과 자동 발현.]
"엇···."
정하은이 갑자기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뺨이 붉어지고, 손에 든 태블릿이 바닥에 떨어졌다.
타악-
요원 넷도 순간 시선이 흔들렸다.
한 명은 무기를 꽉 쥐며 헛기침을 했다.
다른 하나는 뒷걸음질을 치듯 반걸음 물러섰다.
가장 앞에 서 있던 요원은 얼굴이 새빨개진 채 애써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한서연이 재빨리 소리쳤다.
"멈춰, 멈춰! 문장 억제해!"
나는 놀라서 어떻게 멈추는지도 모른 채 그냥 손을 내렸다.
[매혹 효과 종료.]
정하은이 그 자리에서 휘청거리며 벽을 짚었다.
"미, 미안해요, 저 잠깐···."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숨을 몇 번 몰아쉬고 나서야 겨우 평정을 찾는 듯했다.
한서연이 다급히 나를 붙잡고 물었다.
"도윤아, 지금 뭘 한 거야? 어떻게 발현시킨 거야?"
"모, 모르겠어요. 그냥 정 선생님 눈이랑 마주쳤는데···."
그 대답에 한서연의 얼굴이 더 심각해졌다.
요원들도 놀란 얼굴로 서로를 바라봤다.
"의도 없이도 발현이 된다는 거예요?"
한 요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살짝 겁먹은 기색이 섞여 있었다.
한서연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럼 통제가 안 되는 능력이라는 거잖아. 이건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케이스야."
그녀는 팔짱을 끼고 몇 걸음 왔다 갔다 하다가 나를 다시 바라봤다.
그 시선에는 걱정과 계산이 함께 담겨 있었다.
정하은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태블릿을 주웠다.
화면에 금이 갔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이 정도 매혹 강도는··· 국가 등록 성좌급 헌터에게서도 흔치 않아요."
그녀가 낮게 말했다.
"강도윤 씨는 이제 국가 헌터청에 보고 대상이 될 거예요."
그 말을 듣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보고되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정하은은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조사팀이 파견될 거예요. 그리고 어쩌면··· 다른 나라 헌터청에서도 관심을 가질 수 있어요."
"다른 나라요?"
"성좌급 축복은 국제적으로도 희귀한 자원이니까요."
정하은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강도윤 씨, 이제부턴 정말 조심해야 해요."
나는 그 말을 듣는 내내 손목을 내려다봤다.
문양은 이제 아무렇지 않게 잠잠했다.
방금 그런 일을 벌였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그냥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
한서연이 내 어깨를 붙잡았다.
표정이 굳어 있었다.
"도윤아, 오늘부터 너는 국가 보호 대상이야. 그 말은···."
그녀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훈련장 스피커에서 낮은 경고음이 울렸다.
삐이이-
[긴급: 외부 신호 감지. 미승인 접근 시도.]
훈련장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방금까지 술렁이던 요원들이 일제히 자세를 낮추고 각자의 위치로 흩어졌다.
요원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한 명이 무전기에 손을 갖다 대며 낮게 말했다.
"건물 외곽에 미확인 인원 접근 중."
무전기 너머로 다급한 목소리가 짧게 흘러나왔다.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 긴박한 어조만으로도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한서연이 나를 뒤로 끌어당겼다.
"도윤아, 뒤로 물러서."
그녀의 손에서 느껴지는 힘이 평소와 달랐다.
단단하고, 다급했다.
나는 그 다급한 목소리를 들으며, 손목의 문양이 다시 미세하게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번엔··· 대체 뭐가 온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