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비석이 깨어나는 밤

5화

무술대회를 코앞에 두고, 백결은 약속을 지키러 온 게 아니라 예고를 하러 온 거였다. 닷새 전, 그는 분명히 말했었다. "다음엔 진짜로 붙자."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저 흘려들었다. 방계 자제들 사이에서 흔히 주고받는 위협쯤으로 여겼으니까. 하지만 그날부터 닷새 동안, 나는 매일 밤 잠들기 전에 그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제야 그 말의 무게를 실감하고 있었다. 닷새 뒤, 후원 연못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시각이었다. 연못 표면에 붉은 노을이 부서지듯 흩어져 있었고, 물비린내와 풀냄새가 섞여 코끝을 스쳤다. 평소라면 사색하기 좋은 장소였을 이곳이, 오늘은 도살장 앞마당처럼 느껴졌다. 그가 나를 다시 찾아왔다. 이번엔 혼자가 아니었다. 백결을 따르는 방계 자제 셋이 뒤에서 실실 웃고 있었다. 하나는 팔짱을 낀 채 여유롭게 서 있었고, 다른 하나는 벌써부터 이 상황을 재밋거리쯤 즐기는 눈치로 입꼬리를 씰룩거렸으며, 나머지 하나는 마치 구경거리를 기다리는 관객처럼 목을 쭉 빼고 있었다. "연습 좀 해볼까 해서." 백결이 손가락을 꺾으며 말했다. 관절 꺾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대회 전에 몸이라도 풀어야지."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도 상황이 달라지지 않을 걸 알았으니까. "뭐야, 대답도 안 해? 겁먹었냐?" 백결이 웃으며 성큼 다가왔다. 걸음마다 여유가 넘쳤다. "괜찮아. 살려는 둘 거니까." 방계 자제 하나가 킬킬거리며 거들었다. "백결 형 오늘 기분 좋아 보이네." "기분 좋을 일이 뭐 있다고." 다른 하나가 대꾸했다. "그냥 심심해서 그러겠지." 그들의 대화가 마치 남의 집 불구경하듯 태평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결의 손이 내 어깨를 밀쳤다. 무공이 실린 손짓이었는지, 나는 그대로 몇 걸음이나 밀려나 바닥에 넘어졌다. 등이 돌바닥에 부딪히며 숨이 턱 막혔다. 컥. 숨을 쉬려 해도 폐가 말을 듣지 않았다. 눈앞이 하얗게 번쩍거렸다. 방계 자제들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저것 봐, 진짜 웃기다." "명륜도 못 열었다는 게 진짜였네." 손바닥이 아렸다. 무릎이 까져 피가 배어나왔다. 옷자락 사이로 스며드는 온도가 낯설게 뜨거웠다. 하지만 그보다 더 아픈 건, 이 모든 걸 그저 지켜보고 있는 이 상황 자체였다. 굴욕이었다. 명확한 굴욕. "일어나." 백결이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조금의 동정도 섞여 있지 않았다. "그 정도로 쓰러지면 대회 때까지 어떻게 버티려고."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손이 떨렸다. 두려움 때문인지, 분노 때문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 일어서는 동안에도 머릿속으로는 수십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도망칠까. 아니, 도망쳐도 결국 잡힐 거다. 소리를 질러 사람을 부를까. 그것도 소용없었다. 이곳은 후원 깊은 곳, 방계 자제들이 일부러 사람 없는 시간을 골라 온 게 분명했으니까. 방법이 없었다. 그저 버텨야 했다. 백결이 다시 손을 뻗었다. 이번엔 좀 더 세게 밀칠 셈이었는지, 손끝에 은은한 기운이 감돌았다. 태범경 2중의 진기였다. 맞으면 뼈가 부러질 수도 있었다. 그 사실이 명확해지는 순간, 뱃속 깊은 곳에서 뭔가가 폭발하듯 뜨거워졌다. 지금까지 느꼈던 그 어떤 반응과도 달랐다. 미약한 파장이 아니라, 마치 심장이 두 개가 된 것처럼 강렬한 박동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손끝이 저리다 못해 뜨거워졌고, 눈앞이 순간적으로 붉게 물들었다. 이게 뭐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백결의 손이 내 가슴께에 닿기 직전, 나는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막았다. 쾅. 둔중한 충돌음이 울렸다. 마치 두 개의 바위가 부딪치는 소리 같았다. 백결의 몸이 뒤로 튕겨나갔다. 서너 걸음이나 밀려나 바닥에 나동그라진 그는, 눈을 부릅뜬 채 나를 쳐다보았다. 방계 자제들의 웃음소리는 뚝 끊겼다. 정적이 흘렀다. 바람 소리조차 멈춘 듯한 정적이었다. 연못 표면에 일던 잔물결까지 순간적으로 멈춰버린 것 같았다. 나조차도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팔을 들어 막았을 뿐인데, 태범경 2중의 공격이 튕겨나갔다. 명륜조차 열리지 않은 몸으로. 이게 말이 되나. 방계 자제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 실실 웃던 얼굴들이 하얗게 굳어 있었다. 하나는 뒷걸음질을 치듯 반보 물러섰고, 다른 하나는 입을 벌린 채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있었다. "너..." 백결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얼굴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방금 뭘 한 거야." 대답할 말이 없었다. 나 자신도 몰랐으니까. 내가 뭘 했는지, 어떻게 했는지, 왜 그런 힘이 나왔는지,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었다. 그냥 팔을 들었을 뿐이었다. 살고 싶다는 생각, 그거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몸속에서 뭔가가 급격히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몸 안의 무언가가 통째로 뽑혀나가는 듯한 허탈감이었다. 눈앞이 흐려지고,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속에서부터 뭔가가 텅 비어버리는 감각. 방금까지 몸을 채웠던 뜨거움이 순식간에 증발해버리고, 그 자리에 냉기와 공허함만 남았다. 코끝에서 뜨뜻한 것이 흘러내렸다. 손을 들어 닦아보니, 손끝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코피였다. 이거 대체 뭐야. 뭔가 잘못되고 있었다. 힘을 쓴 대가로, 몸이 무너지고 있는 것 같았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고, 귓속에서는 이명이 울렸다.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거..." 나는 입을 열려 했지만,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시야가 점점 흔들렸다. 백결은 여전히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방금 벌어진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 눈빛 안에는 분명한 경계심이 깃들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나를 놀잇감쯤 여기던 눈빛이, 이제는 낯선 짐승을 마주한 사람의 눈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방계 자제들도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연못가 저편에서 다른 발소리가 들려왔다. 느리고 무거운 발걸음. 서두르지 않는, 이미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는 듯한 걸음걸이였다. 천천히 다가오는 그림자. 백중호였다. 큰아버지는 조용히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의 시선이 나를, 그리고 방금까지 내 팔이 있던 자리를 번갈아 훑었다. 입가에는 옅은 웃음이 걸려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방계 자제들이 그를 발견하자마자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백결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전까지 기세등등하던 태도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저 어른 앞에서 숨을 죽인 아이의 모습만 남았다. "재밌는 걸 봤구나." 백중호가 낮게 중얼거렸다. "명륜도 못 연 아이가... 태범경의 진기를 맨몸으로 튕겨냈다고?" 그의 목소리에는 흥미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 마치 잘 짜여진 연극의 결말을 확인하려는 사람 같았다. 나는 코피를 닦아내며 그를 마주보려 했지만, 시야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다리가 후들거려 서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강아." 그가 천천히 내 쪽으로 걸어오며 말을 이었다. "너, 나한테 숨기는 게 있는 모양이구나." 그 말이 귓가에 닿는 순간,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기운이 올라왔다. 몸이 무너지는 것보다 그 말이 더 무섭게 느껴졌다. 다리에 힘이 완전히 풀렸다. 무릎이 꺾이며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손을 뻗어 뭔가를 붙잡으려 했지만,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의식이 흐려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나는 백중호의 눈빛에서 확신에 가까운 무언가를 읽었다. 그는, 알아챘다. 무엇을 알아챘는지, 나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눈빛이 앞으로 벌어질 일들의 서막이라는 것만은 분명하게 느껴졌다. 의식이 완전히 끊기기 직전, 백중호의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그 말이 무엇이었는지, 나는 끝내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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