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설아의 방문을 열어젖히자마자 코끝을 스치는 서늘한 냉기가 먼저 나를 덮쳤다.
한여름에도 이렇지는 않을 텐데, 지금은 봄이 한창인 계절이었다. 방 안 화로에는 불이 활활 지펴져 있는데도 공기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침상 위의 설아는 이불을 몇 겹이나 덮고 있으면서도 입술이 새파랗게 졸아들어 있었다. 손끝은 이미 하얗게 굳어가고 있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
시녀 하나가 문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이미 물수건을 짜고 있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그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설아야." 나는 침상으로 달려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설아야, 눈 좀 떠봐."
대답이 없었다.
"설아야!"
"오, 오라버니..." 설아의 목소리는 실낱같이 가늘었다. 눈꺼풀이 몇 번 떨리다 겨우 열렸다. "추워요... 너무... 추워요..."
이불을 몇 장 더 가져오라고 소리치는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불 따위로는 절대 해결되지 않을 병이라는 것을.
뒤이어 뛰어들어온 강옥영 고모가 의원을 부르라고 시녀들에게 소리쳤고, 아버지 백정헌은 이미 얼굴이 하얗게 질려 문틀을 붙잡고 서 있었다. 평소라면 위엄 넘치던 그 얼굴에 지금은 핏기 하나 없었다.
"의원! 의원은 어디 있느냐! 당장 데려와!"
아버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나는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전생의 기억을 뒤졌다.
한독(寒毒).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해 서서히 전신을 얼려가는 병이었다. 처음엔 그저 감기인가 싶을 정도로 미약한 증상으로 시작하지만, 하루 이틀 지나면 손끝부터 굳어가고, 사흘째가 되면 심장 주변까지 냉기가 파고들어 결국 심장이 멈추는 병.
전생에서 설아는 정확히 이 시기에, 이 나이에, 이 병으로 병사했다.
의원도, 약재도, 아무것도 소용이 없었다.
그날 나는 방 밖에서 발만 동동 구르며 통곡했었다. 문지방 하나 넘지 못하고 서서, 안에서 흘러나오는 곡소리를 들으며 무너져 내렸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저 손발이 묶인 무력한 인간이었다.
안 돼.
이번엔 안 된다.
의원이 도착하기까지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었고, 안다 해도 전생의 그 어떤 의원도 이 병을 고치지 못했다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손발이 떨렸다. 등줄기에 소름이 쭉 돋았다. 뭐라도 해야 했다. 뭐든.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가, 다시 새까맣게 타올랐다.
첫 번째, 의원을 기다린다 — 늦다.
두 번째, 약재를 찾는다 — 없다.
세 번째, 그냥 지켜본다 — 죽는다.
세 가지 선택지 모두 결국은 같은 결말로 이어졌다. 죽음.
그럴 순 없었다.
나는 설아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내 몸속의 온기를 그녀에게 밀어 넣으려는 듯 안간힘을 썼다. 무공도, 기감도, 아무것도 없는 몸이었지만 그 순간엔 그런 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이 아이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오라버니가 지켜줄게. 반드시.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을까. 이대로 죽으면 안 된다는 절박함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숨이 막힐 지경에 이르렀을 때 —
뱃속 깊은 곳에서, 아주 미세한 무언가가 움직였다.
처음엔 착각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분명했다. 단전 근처, 어딘가 깊숙한 곳에서, 마치 심장이 하나 더 뛰는 것처럼 미약한 파장이 한 차례 울렸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온기가 순간적으로 손끝까지 퍼졌다.
손끝이 찌릿했다.
찌릿, 찌릿.
설아의 손을 잡은 내 손바닥에서, 그 온기가 흘러나가는 게 느껴졌다. 착각인지 진짜인지 구분할 수 없었지만, 설아의 입술이 아주 조금, 그러나 확실하게 원래의 색을 되찾기 시작했다.
파랗던 입술이, 옅은 붉은빛으로.
"어..." 나는 말을 잃었다.
숨이 턱 막혔다. 이게 진짜인가. 지금 내가 뭘 한 건가. 아무것도 배우지 않았는데, 아무것도 익히지 않았는데.
"오라버니..." 설아가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조금... 따뜻해요..."
그 한마디에 눈물이 핑 돌았다. 참으려 해도 참아지지 않았다.
방 안에 있던 강옥영 고모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강아, 방금 뭘 한 거니?"
뭘 한 건지 나도 몰랐다.
확실한 건 딱 하나였다. 만고진천비가, 처음으로 반응했다.
십 년 넘게 죽어 있던 것처럼 느껴졌던 그 물건이, 지금 이 순간 살아 숨쉬듯 반응한 것이다.
의원이 도착해 진맥을 짚고 나서도 설아의 상태는 완전히 호전되지 않았다. 노의원은 설아의 손목을 몇 번이나 짚어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한독 초기 증세로 보입니다만... 이상합니다. 이미 삼사 일은 진행되었을 냉기인데, 지금은 마치 하루도 안 된 것처럼 미약합니다."
아버지가 다급히 물었다. "그러면 살 수 있는 것이오?"
"장담은 못 드립니다만, 최소한 지금 당장 목숨이 위험한 상태는 아닌 듯합니다. 며칠은 더 사경을 헤맬 것이나, 이 정도라면 약재로 다스릴 여지가 있습니다."
한기는 여전히 몸속에 남아 있었고, 며칠은 더 사경을 헤맬 거라 했다. 하지만 조금 전 그 순간, 분명히 뭔가가 바뀌었다는 걸 나는 알았다.
의원이 지어준 약을 시녀가 달이러 나가고, 아버지는 설아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며 자리를 지켰다. 나는 더 이상 그 방에 있을 이유가 없다는 걸 깨닫고 조용히 물러났다.
방을 나와 복도에 홀로 섰을 때, 나는 손을 펴보고 다시 쥐어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안에서 느껴진 온기는 진짜였다.
심장이 아직도 두근거렸다. 방금 내가 겪은 일이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절박함.
죽음의 문턱에 선 절박함이, 죽은 돌덩이 같던 만고진천비를 흔들었다.
그렇다면 —
다시 한번 그 감각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나는 이 몸으로도 명륜을 열 수 있을지 모른다.
전생에서 명륜을 여는 데에는 최소한 몇 년의 수련이 필요했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단 한 번의 절박함으로 반응이 일어났다. 이게 우연일까? 아니면 이 몸이 가진 무언가 다른 특성 때문일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등 뒤에서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아." 강옥영이 어느새 뒤에 서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평소와 달랐다. 의심도, 경계도 아닌, 그러나 분명 무언가를 캐묻는 눈이었다. "아까 그건... 대체 뭐였니?"
나는 대답 대신 마른침을 삼켰다.
목이 타는 듯했다. 그녀의 눈이 내 얼굴 구석구석을 훑고 있었다. 마치 답을 찾아내려는 듯이.
숨길 수 있을까. 이 여자의 눈을 속이고, 지금부터 벌어질 모든 일을 혼자서만 감당할 수 있을까.
확신이 서지 않았다.
강옥영이 한 발짝 더 다가섰다. "설아를 살린 게... 정말 너였느냐?"
그 질문 속에는 단순한 호기심이 아닌, 뭔가 더 깊은 것이 담겨 있었다. 마치 그녀 역시 뭔가를 알고 있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