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20년 내공, 이세계 생존

5화

하린의 얼굴이 굳었다. 숲 저편을 가리키며 뭔가 급하게 말했다.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표정만으로도 위험하다는 뜻은 충분히 전해졌다. 또 뭐야. 이강혁은 소리가 나는 방향을 살폈다. 숲의 나무들이 규칙적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일정한 간격, 일정한 속도. 발소리의 무리였다. 한둘이 아니었다. 최소 십수 명, 아니 그 이상일 수도 있었다. 거인의 부하들인가. 하린이 이강혁의 손을 확 낚아채듯 잡았다. 손바닥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다른 방향으로 강하게 끌었다. 숲을 벗어나 언덕 쪽이었다. 발밑에 자갈이 굴렀다. 이강혁은 넘어질 뻔하다가 하린의 팔에 걸려 겨우 균형을 잡았다. 이 속도로 계속 뛰면 심장이 먼저 터질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할 여유도 없었다. 하린의 발걸음이 조금도 느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덕을 넘자 시야가 열렸다. 마을이 보였다. 나무집들이 서로 다리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낡았지만 정교한 구조였다. 지붕마다 푸른 빛이 은은하게 새어나왔다. 사람들의 형체가 오가고 있었다. 사람이 있어? 다행이네. 안도감이 밀려왔다. 동시에 의문도 함께 밀려왔다. 이 세계에도 마을이라는 게 존재하는구나. 하린이 언덕을 뛰어 내려가며 손을 흔들었다. 목청껏 뭔가를 외쳤다. 마을 입구에서 몇몇이 놀란 얼굴로 달려왔다. 선두에 있던 여자가 하린을 끌어안았다. 은빛 머리, 뾰족한 귀. 하린과 비슷한 종족 같았다. 하린! 살아있었구나. 말은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어조로 봐선 재회의 반가움이었다. 여자의 목소리가 떨렸다. 하린의 몸을 몇 번이나 매만지며 상처가 없는지 확인하는 손짓이었다. 여자의 시선이 이강혁에게 옮겨왔다. 위아래로 훑어보는 눈빛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이 인간은? 경계보다는 순수한 궁금함이었다. 하린이 몸짓으로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거인의 동굴, 이강혁이 자신을 도운 것, 강을 건너 도망친 것까지. 손짓이 점점 커졌다. 강물을 헤엄치는 시늉, 팔을 휘두르는 시늉, 마지막엔 두 손을 모아 감사를 표하는 시늉까지. 대부분이 전달됐다. 여자의 표정이 놀라움에서 존경으로 바뀌었다. 그녀가 이강혁에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유나예요. 말은 못 알아들어도 이름은 알아들었다. 이강혁도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 하나 알아들은 걸로 대화가 통할 리는 없지만. 일단은 인사부터 챙기는 게 순서였다. 마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몇몇은 손에 농기구 비슷한 것을 든 채였고, 몇몇은 아이를 안은 채였다. 대부분이 여성이었고, 남성은 드물게 보였다. 그 특이한 성비가 눈에 들어왔지만 지금 궁금해할 때는 아니었다. 이강혁은 주변을 훑었다. 어림잡아 백여 명은 될 듯한 인구, 그중 남자로 보이는 이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이유가 있겠지. 사람들 사이에서 나이 든 남자가 걸어 나왔다. 은빛 머리카락에 흰 것이 섞여 있었고, 지팡이 같은 것을 쥐고 있었다. 몸에 새겨진 문양이 다른 사람들보다 정교했다. 족장인가. 주변 사람들의 태도가 확연히 달라졌다. 고개를 숙이고 길을 터주는 모습이었다. 남자가 이강혁 앞에 서서 눈을 맞췄다. 눈동자가 깊고 조용했다. 무진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것 같았다. 유나가 통역하듯 손짓을 더했다. 무진의 시선이 이강혁의 얼굴에서 손, 발, 옷차림까지 천천히 훑었다. 뭔가를 가늠하는 눈빛이었다. 무진이 이강혁의 팔을 잡았다. 손끝에서 옅은 초록빛이 흘러나왔다. 뭐 하는 거지. 이강혁은 순간 팔을 빼려 했지만 하린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는 뜻인지, 참으라는 뜻인지 알 수 없었다. 무진이 낮게 뭔가를 읊기 시작했다. 언어라기보다는 노래에 가까운 소리였다. 주변의 공기가 미세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머리카락이 미세하게 곤두섰다. 하린이 놀란 눈으로 무진을 쳐다봤다. 뭔가 만류하려는 듯 손을 뻗었지만 이미 늦었다. 멈춰요! 하는 것 같은 손짓이었다. 무진의 몸에서 빛이 점점 강해졌다. 빛이 이강혁의 팔을 타고 어깨까지 번졌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이상한 감각이었다. 이강혁의 머릿속에 갑자기 낯선 소리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언어의 조각들이 퍼즐처럼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귀가 먹먹해졌다. 이명이 울렸다. 시야가 잠깐 흔들렸다. 이거 뭔가 잘못된 거 아닌가. 불안이 스쳤지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순간, 이강혁의 귀에 처음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들렸다. 조심... 하시게... 무진의 목소리였다. 또렷하지 않았지만, 분명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 이게 지금 통한 거야? 내심 놀랄 새도 없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무진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코와 입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족장님! 유나가 다급히 소리치며 달려갔다. 무진의 몸이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쿵. 둔탁한 소리가 땅을 울렸다. 이강혁은 굳은 채 그 모습을 지켜봤다. 방금 알아들은 첫 마디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조심하라고 했었다. 그 말을 하는 대가로 자신이 쓰러진 건가. 마을 사람들이 무진 주위로 몰려들며 비명과 흐느낌을 쏟아냈다. 몇몇은 무릎을 꿇고 무진의 손을 붙잡았다. 유나가 무진의 몸을 흔들며 소리쳤지만 반응이 없었다. 족장님, 정신 차리세요! 눈 좀 떠보세요! 말은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 절박함만큼은 명확하게 전해졌다. 이강혁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손끝이 아직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방금 그 마법의 대가가 자신에게 향할 뻔했다는 걸 직감했다. 이게 나 때문인가. 하린이 이강혁의 옷깃을 붙잡았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뭔가 말하고 싶은데 말이 나오지 않는 얼굴이었다. 무진의 눈이 감긴 채 떠지지 않았다. 숨은 옅게 이어지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는 상태였다. 가슴이 아주 얕게 오르내렸다. 그마저도 점점 느려지는 것처럼 보였다. 마을 전체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바람 소리마저 멎은 듯했다. 이강혁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방금 얻은 언어라는 게 이런 대가를 요구하는 거라면. 앞으로 이 마을에서 살아남는 게 생각보다 더 복잡해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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