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20년 내공, 이세계 생존

1화

비가 내렸다. 서울 강북의 골목길, 가로등 불빛이 빗물에 번졌다. 아스팔트 위로 기름 얼룩이 무지개처럼 퍼졌다가 사라졌다. 이강혁은 우산도 없이 걷고 있었다. 마흔셋, 전직 특수부대 용병대장. 퇴역한 지 반년째. 할 일 없는 밤마다 걷는 게 유일한 습관이었다. 낮에는 잠을 잤고, 밤에는 걸었다. 사람들은 그걸 불면증이라 불렀지만, 이강혁은 그냥 습관이라고 생각했다. 빗물이 재킷 안으로 스며들었다. 어깨가 축축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몸이 젖는 것보다 방 안에 갇혀 있는 게 더 견디기 힘들었다. 전쟁터에서는 비를 피할 곳을 찾는 게 본능이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이제 피할 곳도, 피할 이유도 없었다. 발끝에 튀는 물방울이 구두를 적셨다. 낡은 구두였다. 3년은 신은 것 같았다. 새로 살 돈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냥 귀찮았다. 골목 끝에서 담배 냄새가 흘러왔다. 편의점 앞에 앉은 남자 둘이 우산도 없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강혁은 시선을 주지 않고 그대로 지나쳤다. 끼이이익— 타이어 마찰음이 골목을 갈랐다. 이강혁의 시선이 먼저 움직였다. 몸보다 눈이 먼저 반응하는 건 20년 넘게 굳은 습관이었다. 우산을 쓴 여자가 도로 한복판에 서 있었다. 헤드라이트 두 개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빗물에 젖은 도로가 빛을 반사해 시야를 어지럽혔다. 여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는지 고개가 숙여져 있었다. 생각할 시간 없었다. 이강혁의 몸이 먼저 움직였다. 발끝이 젖은 바닥을 밀어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팔을 뻗어 여자의 팔을 붙잡았다. 그대로 인도 쪽으로 당겼다. 체중을 실은 힘이었다. 여자의 몸이 휘청거리며 끌려왔다. 쾅! 차량이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바람이 얼굴을 훑고 갔다. 사이드미러가 이강혁의 어깨를 치고 부서졌다. 플라스틱 파편이 빗물 위로 튀었다. 통증이 뒤늦게 밀려왔다. 어깨뼈 근처가 뜨끔했다. 부러지진 않은 것 같았다. 그 정도는 감각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이 새끼, 브레이크는 발로만 밟나. 차는 멈추지 않았다. 속도를 줄이지도 않았다. 그대로 골목 끝으로 사라졌다. 번호판을 확인할 틈도 없었다. 이강혁은 욕설을 삼켰다. 대신 어깨를 한 번 돌렸다. 뻐근함이 팔 전체로 퍼졌다. 여자를 돌아봤다. 우산은 이미 손에서 놓쳐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빗물이 그대로 여자의 머리와 어깨를 두들기고 있었다. 얼굴이 하얗게 굳어 있었다. 입술이 살짝 벌어진 채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괜찮습니까. 여자가 겨우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감사합니다. 정말... 말이 끝맺지 못하고 끊겼다. 손이 떨리는 게 눈에 보였다. 다친 데 없죠. 네. 없는 것 같아요. 여자는 자신의 팔과 다리를 내려다보며 확인했다. 그러고는 다시 이강혁을 올려다봤다. 눈이 마주쳤다. 그럼 됐고. 이강혁은 짧게 대답하고 어깨를 돌렸다. 뻐근한 통증이 계속 남아 있었다.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느꼈다. 예전에는 이 정도 충격, 느끼지도 못했는데. 퇴역이 몸을 이렇게 만드는 건지, 나이가 그런 건지, 이강혁은 구분할 수 없었다. 그래도 반사속도만큼은 그대로였다는 게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떨어진 우산을 발끝으로 슬쩍 밀어 여자 쪽으로 보냈다. 이름이라도... 여자가 다급히 물었다. 됐습니다. 그런 거 몰라도 삽니다. 이강혁이 몸을 돌려 걸어가려던 순간, 여자가 다시 불렀다. 서연이에요. 한서연. 이강혁은 잠깐 멈췄다. 뒤를 돌아볼까 하다가 그냥 걸어갔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이름 알아서 뭐하나.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람 구했다고 인연이라도 생기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얘기였다. 그런 드라마는 자기 인생에 없다는 걸 20년 넘게 확인했다. 용병 생활 하면서 구해준 사람이 몇인데. 기억나는 얼굴은 하나도 없었다. 이름을 안다고 뭐가 달라지나. 사람은 구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그 뒤로 이어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빗줄기가 더 굵어졌다. 우산도 없이 걷던 이강혁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어깨의 통증 때문인지, 발밑에 고인 물이 신발 안으로 스며들어서인지 알 수 없었다. 골목 끝에서 방향을 틀었다. 지하도 쪽이었다. 비 피할 데는 저기밖에 없나. 주위를 둘러봤다. 근처 상가는 이미 문을 닫았고, 편의점 처마 아래는 아까 그 남자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딱히 갈 곳이 없었다. 지하 주차장 옆, 낡은 철제 뚜껑이 반쯤 열려 있었다. 서울시 하수도 공사 표지판이 옆에 세워져 있었다. 페인트가 벗겨진 표지판에는 공사 기간이 적혀 있었는데, 이미 지난 날짜였다. 인부들은 이미 퇴근한 듯 인기척이 없었다. 안전 고깔 몇 개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이강혁은 뚜껑 안쪽을 들여다봤다. 냄새가 코를 찔렀다. 습기와 곰팡이, 오래된 흙냄새가 섞인 악취였다. 그래도 비는 안 맞겠지, 생각했다. 몸을 낮춰 뚜껑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어깨의 통증이 다시 신경을 건드렸다. 참을 만했다. 발을 들이는 순간, 등 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우우우웅— 낮고 무거운 진동음이었다. 배 속까지 울리는 듣기 싫은 저주파였다. 단순한 기계 소음 같지 않았다. 지하 저편에서 뭔가가 울리고 있었다. 이강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거 뭐야. 발밑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마치 땅 밑에서 뭔가 거대한 것이 숨을 쉬고 있는 것 같았다. 이강혁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손끝이 저절로 허리춤을 더듬었다. 무기는 없었다. 습관이 몸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빗소리가 갑자기 멀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진동음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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