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거인의 손이 이강혁의 코앞에서 멈췄다.
손톱 사이에 낀 흙먼지가 눈에 들어왔다. 손가락 하나가 어른 팔뚝만 했다.
이게 죽는 건가.
머릿속이 이상하게 차분했다. 죽음 직전엔 오히려 담담해진다더니, 그 말이 맞는 모양이었다.
동굴 안쪽에서 갑자기 날카로운 소리가 터졌다.
캬아아—
작은 무언가가 튀어나와 거인의 눈을 향해 뭔가를 던졌다. 반짝이는 돌덩이 같은 것이었다.
거인이 고통스러운 울음을 토했다.
크아아아!
거인이 몸을 뒤로 젖히며 눈을 감쌌다. 그 틈에 작은 형체가 이강혁 쪽으로 달려왔다.
작은 소녀였다. 은빛 머리카락, 뾰족한 귀. 나이는 열대여섯쯤 되어 보였다. 몸엔 상처가 여러 군데 나 있었다. 팔뚝엔 채 아물지 않은 상처가 있었고, 종아리엔 긁힌 자국이 선명했다.
누구야, 넌.
물을 시간도 없었다.
소녀가 뭔가를 빠르게 말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다.
뭐라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발음이 새처럼 짧게 끊겼다. 억양만으로도 다급함이 느껴졌다.
소녀가 손짓으로 넝쿨을 가리켰다. 이강혁은 상황을 이해했다. 손목을 조금 들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가 손톱으로 넝쿨을 긁기 시작했다.
손톱 끝이 넝쿨의 이음매를 정확히 찾아냈다. 아무렇게나 뜯는 게 아니었다. 매듭이 풀리는 위치를 아는 손짓이었다.
생각보다 빠르게 넝쿨이 풀렸다. 이강혁의 손목이 자유로워졌다.
손목이 저릿저릿했다. 피가 다시 돌면서 따끔거리는 감각이 손끝까지 퍼졌다.
감사하다는 말을 하려다 관뒀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소용없었다.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도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눈빛만으로 뜻이 통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눈치는 잘 맞네.
거인이 다시 눈을 뜨고 있었다. 붉은 눈알이 두 사람을 향했다.
크르르르—
낮은 울음이 동굴 벽을 타고 진동했다. 발바닥 밑으로 미세한 떨림이 전해졌다.
소녀가 이강혁의 손을 잡고 반대쪽 통로로 뛰기 시작했다. 이강혁도 다리를 움직였다. 손목이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아 밧줄 자국이 남아 있었지만 참을 수 있었다.
이 정도 통증이야 별거 아니지.
발목이 시큰거릴 때마다 이를 악물었다. 지금 멈추면 정말로 죽는다는 걸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
동굴 통로는 좁고 어두웠다. 발밑에 물이 고여 있어 미끄러웠다.
한 발 디딜 때마다 물이 튀었다. 차가운 감촉이 발목까지 스몄다. 벽에서는 축축한 이끼 냄새가 났다.
소녀가 갑자기 멈춰 섰다. 앞을 가리켰다.
막다른 길이었다.
젠장, 이게 뭐야.
바위벽이 앞을 완전히 가로막고 있었다. 옆으로도, 위로도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끝인가.
뒤에서 거인의 발소리가 다시 가까워지고 있었다.
쿠웅. 쿠웅. 쿠웅.
발소리마다 천장에서 흙먼지가 부스스 떨어졌다. 거리가 좁혀지는 게 소리로 느껴졌다.
소녀가 벽을 손으로 더듬었다. 뭔가를 찾는 듯했다. 손끝에서 옅은 초록빛이 반짝였다.
뭐야, 저 빛은.
이강혁은 눈을 의심했다. 소녀의 손끝에서 나오는 빛이 벽의 무늬를 따라 흘러가는 게 보였다.
식물의 뿌리인 것 같았다. 벽 틈에서 뻗어 나온 뿌리를 소녀가 살살 매만졌다. 뿌리가 마치 살아 있는 듯 움찔거렸다.
이강혁의 눈이 커졌다.
저건 또 뭐야.
뿌리가 소녀의 손길에 반응하듯 서서히 몸을 뒤틀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처럼, 뿌리가 소녀의 명령을 알아듣는 것 같았다.
뿌리가 벽을 따라 갈라지며 좁은 틈을 만들었다.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갈 정도의 공간이었다.
틈에서 서늘한 바람이 새어 나왔다. 바깥과 이어져 있다는 뜻이었다.
살았다.
소녀가 먼저 몸을 밀어 넣었다. 이강혁도 뒤따라 몸을 구부렸다.
어깨가 바위에 긁혔다. 옷이 뜯기는 소리가 났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등 뒤에서 거인의 그림자가 통로 입구를 가득 채웠다.
크아아아아!
포효가 동굴 전체를 흔들었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소리였다.
거인의 손이 틈으로 뻗어 들어왔다. 손끝이 이강혁의 발목을 스쳤다.
닿았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발목을 붙잡히는 순간, 몸을 그대로 잡아당기는 그림이 눈앞을 스쳤다.
이강혁은 온몸의 힘을 다해 몸을 앞으로 밀었다. 좁은 틈을 겨우 통과했다.
가슴이 바위 틈에 짓눌리는 감각이 났다. 숨이 턱 막혔지만 멈추지 않았다.
밖으로 나온 순간, 눈앞에 펼쳐진 건 낯선 숲이었다.
나무 사이로 옅은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공기가 다르게 느껴졌다. 동굴 안의 축축한 냄새 대신 흙과 풀 냄새가 코를 채웠다.
여긴 또 어디야.
그리고 등 뒤에서 벽이 무너지는 소리가 울렸다.
쿠구구구궁!
거인이 틈을 부수고 몸을 밀어 넣고 있었다.
바위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거인의 상반신이 틈 사이로 서서히 밀려 나오는 게 보였다. 근육이 뒤틀리며 좁은 구멍을 강제로 넓히고 있었다.
소녀가 이강혁의 팔을 잡아끌었다. 눈빛만으로도 뜻은 분명했다.
여기서 멈추면 죽는다.
이강혁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발목의 통증도, 어깨의 상처도 지금은 사치였다.
두 사람은 숲을 향해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거인이 완전히 틈을 부수고 몸을 빼내는 소리가 들렸다.
쿠웅.
땅이 흔들렸다. 거인이 숲 안으로 발을 들여놓은 것이었다.
크르르르—
낮은 숨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