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20년 내공, 이세계 생존

2화

우우우웅— 소리가 점점 커졌다. 이강혁은 걸음을 멈추고 벽에 손을 짚었다. 벽 자체가 떨리고 있었다. 공사장 소음이 아니었다. 지진인가. 이강혁은 미간을 좁혔다. 서울 한복판 지하 3층, 하수도 보수 작업 중에 지진이라니. 말이 안 됐다. 그렇다고 다른 설명이 떠오르는 것도 아니었다. 벽을 짚은 손바닥에 미세한 진동이 계속 전해졌다. 두두두둑. 머리 위에서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이강혁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발밑의 바닥이 갑자기 푹 꺼졌다. 쿠구구궁! 이강혁의 몸이 아래로 떨어졌다. 손을 뻗어 뭔가를 붙잡으려 했지만 잡히는 게 없었다. 어둠 속으로 그대로 낙하했다. 젠장, 이대로 죽는 건가. 찰나의 생각이었다. 몸이 계속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동안, 이강혁의 머릿속엔 이상하게도 냉정한 계산이 스쳐 지나갔다. 낙하 속도, 벽까지의 거리, 착지 시 충격. 계산이 끝나기도 전에 시야가 온통 흰빛으로 가득 찼다. 번쩍— 귓속이 먹먹해졌다. 몸무게가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붕 뜬 채로 회전하는 감각. 시간이 늘어지는 것 같기도, 순식간에 지나가는 것 같기도 했다. 속이 울렁거렸다. 위아래 구분이 안 됐다. 팔다리를 움직이려 해도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어둠. 깊고 완전한 어둠이었다.   눈을 뜨자 천장이 낯설었다. 돌로 된 천장이었다. 습한 공기, 짙은 흙냄새와 함께 비린내가 섞여 있었다. 서울의 하수도라면 절대 나지 않을 냄새였다. 이강혁은 코를 킁킁거렸다. 이거 무슨 냄새냐. 썩은 고기 냄새 같기도 했다. 아니면 짐승의 체취 같기도 했다. 확실한 건 하나였다. 여기는 서울이 아니었다. 이강혁은 몸을 일으키려 했다. 손목이 움직이지 않았다. 묶여 있었다. 굵은 밧줄, 아니 밧줄이라기보다는 질긴 넝쿨 같은 것이었다. 뭐야, 이거. 이강혁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손목을 살폈다. 초록빛이 도는 넝쿨이 손목을 두 겹, 세 겹으로 감고 있었다. 표면은 축축했고,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미세하게 꿈틀거리는 것도 같았다. 식물이 사람을 묶어놨다고? 이강혁은 넝쿨을 잡아당겨 보았다. 손목에 살이 파고들 정도로 팽팽했지만 끊어지지는 않았다. 주위를 둘러봤다. 동굴이었다. 천장은 사람 키의 세 배는 될 만큼 높았고, 바닥엔 뼈처럼 보이는 것들이 널려 있었다. 동물 뼈인지 사람 뼈인지 구분이 안 갔다. 좋은 그림은 아니네. 이강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뼈 무더기를 훑었다. 크기가 제각각이었다. 손가락뼈처럼 작은 것도 있었고, 사람 팔뚝만 한 큰 뼈도 섞여 있었다. 몇 개는 이빨 자국처럼 보이는 흠집이 나 있었다. 씹혀서 버려진 건가. 속으로 중얼거리며 손목의 넝쿨을 다시 당겨봤다. 단단했다. 20년간 다져온 힘으로도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이강혁은 이를 악물고 몸을 뒤틀어 봤다. 등 뒤로 넝쿨이 벽에 박힌 쇠고리 같은 것에 연결돼 있는 게 느껴졌다. 도망칠 방법이 있다면 저 고리를 부수는 것뿐이었다. 발로 벽을 밀어봤다. 돌벽은 단단했다. 발끝에 힘을 줘도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나. 그 순간, 동굴 저편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쿠웅. 쿠웅. 쿠웅. 땅이 흔들릴 만큼 무거운 발소리였다. 이강혁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발소리에 맞춰 바닥에 흩어진 자갈이 튀어 올랐다가 다시 떨어졌다. 이강혁은 숨을 죽이고 어둠 속을 응시했다. 그림자가 먼저 나타났다. 벽에 비친 그림자가 동굴 입구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실체가 걸어 들어왔다. 키는 어림잡아 20미터. 피부는 회갈색으로 갈라진 나무껍질 같았다. 얼굴 중앙에 눈이 하나뿐이었다. 붉게 충혈된 눈알이 이강혁을 향해 천천히 돌아갔다. 이강혁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저게 뭐냐. 동화책에서나 보던 외눈박이 거인이었다. 다만 동화책 삽화보다 백 배는 흉측했다. 온몸 곳곳에 오래된 상처와 화상 흔적이 남아 있었고, 그 위로 검붉은 진액이 말라붙어 있었다. 괴물이 낮게 울음소리를 냈다. 크르르르— 입가에서 끈적한 침이 흘러내렸다. 침이 바닥에 떨어지자 치익, 소리를 내며 작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산성인 것 같았다. 이강혁은 순간 깨달았다. 이거, 나 잡아먹으려는 거네. 머릿속이 빠르게 돌았다. 넝쿨을 끊을 방법, 거인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릴 방법, 그마저도 안 되면 최소한의 시간이라도 버는 방법. 계산은 계속됐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묶인 손목을 다시 힘껏 당겼다. 넝쿨이 조금씩 늘어나는 게 느껴졌다. 손목 안쪽 피부가 쓸려 뜨거운 통증이 올라왔다. 거인의 발걸음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거인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동굴 전체가 낮게 울렸다. 뼈 더미 위로 흙먼지가 부슬부슬 떨어졌다. 이강혁은 등을 벽에 바짝 붙였다. 물러날 곳은 그곳까지였다. 거인의 외눈이 이강혁을 정확히 겨눴다. 눈동자 안쪽에서 뭔가 붉은 빛이 넘실거리는 것도 같았다. 이강혁은 침을 삼켰다. 목이 바짝바짝 말랐다. 거인의 손이 천천히 뻗어왔다. 손톱만 해도 이강혁의 팔뚝보다 두꺼웠다. 손끝에서 짙은 흙냄새와 부패한 냄새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이강혁의 눈이 그 손을 향해 고정됐다. 손가락 하나가 이강혁의 어깨 바로 옆까지 다가왔다. 넝쿨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손목을 파고들었다. 도망갈 곳도, 막을 방법도 없었다. 여기서 이렇게 끝나나. 거인의 손아귀가 서서히 오므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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