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처음엔 그냥 뜨거운 감각인 줄 알았다. 단전 언저리가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느낌, 그 정도로만 여겼다. 그런데 곧, 그것은 목소리를 냈다.
[크윽… 드디어… 봉인이 풀렸구나.]
머릿속이 아니라 몸속 깊은 곳에서 울리는 목소리였다. 나는 순간적으로 정신이 다른 공간으로 끌려가는 걸 느꼈다. 발밑이 꺼지는 감각.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곧 거대한 황금빛 형체가 나타났다.
용이었다. 몸통 전체가 금빛 비늘로 뒤덮인 거대한 용. 눈이 화로처럼 붉게 타올랐다. 비늘 하나하나가 사람 몸통만 했고, 그 위로 흐르는 빛은 마치 살아 숨 쉬는 것처럼 일렁였다. 게임 속 최종 보스가 현실로 걸어 나온다면 딱 이런 모습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웃을 때가 아니었다.
[네놈의 몸을 빌리마. 오랜 세월 봉인당한 한을 풀어야겠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밀리면 이 몸도, 나 자신도 사라진다. 이 정신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이 현실의 몸에 그대로 반영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손끝이 저릿했다. 이건 비유가 아니라 진짜 위기였다.
[너는 그저 껍데기일 뿐이다.]
용이 포효했다. 그 포효만으로 주위 공간이 산산이 깨져나갔다. 발밑의 바닥이 유리처럼 갈라지고, 허공에 떠 있던 파편들이 빛의 입자로 흩어졌다. 나는 버텼다. 버티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생각했다. 이 용은 환약에 봉인되어 있었다. 봉인은 왜 지금 풀렸는가. 답은 하나였다. 죽음의 위기, 그 순간 시스템이 강제로 이 환약을 지급했고, 봉인이 불완전하게 풀린 것이다.
불완전하다는 건, 완전한 용이 아니라는 뜻이다.
첫째, 완전한 존재라면 처음부터 협박이 아니라 힘으로 나를 짓눌렀을 것이다. 저렇게 말이 많다는 건 여유가 없다는 뜻이다.
둘째, 이곳은 이 몸의 단전, 즉 내 영역이다. 용은 침입자다. 침입자에게는 이 공간의 규칙을 완전히 지배할 힘이 없다.
셋째, 시간을 끌수록 불리한 쪽은 나다. 저 용이 이 공간에 완전히 뿌리내리기 전에 끝내야 한다.
나는 그 틈을 노렸다. 정면으로 맞서지 않았다. 대신 정신 공간의 구조를 살폈다. 바닥은 갈라졌지만 그 아래로 희미하게 내 기운의 흐름이 보였다. 이곳의 주인은 나다. 저 용이 아무리 크게 울부짖어도, 뿌리는 내가 쥐고 있었다.
[내가 왜 네게 밀려야 하지.]
용이 다시 달려들었다. 거대한 발톱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귓속이 아니라 뼛속에서 울렸다. 나는 이번엔 피하지 않았다. 대신 그 거대한 몸통 속으로 뛰어들었다.
무모해 보이는 선택이었지만, 계산된 것이었다. 용은 나를 삼키려는 순간, 자신의 힘을 이 공간에 전부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힘을 드러낸다는 건, 곧 약점을 드러낸다는 것과 같았다.
숨이 막혔다. 뜨거운 비늘 사이로 밀려드는 압력이 온몸을 짓눌렀다. 그래도 눈을 감지 않았다. 용의 중심, 심장이라 불릴 법한 자리에 황금빛이 응축되어 있었다. 다른 곳보다 유독 밝고, 유독 흔들리는 그 빛. 나는 그곳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이 타들어가는 감각이 들었다. 살갗이 벗겨지는 것 같은 고통이었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여기서 손을 거두면 다음은 없다.
[멈춰라! 네놈이 감히—]
너무 늦었다. 나는 그 응축된 빛을 움켜쥐고, 온몸의 정신력을 쏟아부었다. 부순다는 생각 하나만 남기고. 다른 잡생각은 전부 지웠다. 살고 싶다는 마음조차, 지금은 방해였다.
빛이 산산이 흩어졌다. 용의 포효가 길게 이어지다, 서서히 잦아들었다. 공간을 채우던 압력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졌구나.]
용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힘을 잃었다. 조금 전까지의 위압감은 사라지고, 어딘가 지친 노인의 목소리 같았다.
[그래, 좋다. 대신 내 마지막 힘을 가져가라. 용위(龍威). 완전하진 않지만, 이 정도면 네게 도움이 될 것이다.]
빛이 내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뜨겁지만 이번엔 고통이 아니었다. 무언가 채워지는 감각이었다. 텅 비어 있던 그릇에 물이 차오르는 것처럼,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눈을 떴을 땐 다시 방 안이었다. 유모가 겁에 질린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두 손을 가슴께에 모은 채, 입술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도련님… 방금 눈이, 눈이 금빛으로—”
나는 손을 들어 그녀를 안심시켰다. 목이 잠겨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목구멍이 타는 것처럼 뻑뻑했다.
“괜찮다. 놀랐을 텐데… 미안하다.”
[신급 기술 ‘용위’ 습득 완료. 기운 소모 시 발동 가능.]
몸은 여전히 무재였다. 겉보기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손을 들어보아도 떨림은 여전했고, 걸음을 옮겨도 기운은 흩어졌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이 몸 안에 이제 진짜 힘이 자리 잡았다는 것을.
문제는, 이 힘을 언제 어떻게 써야 하느냐였다. 도현의 감시망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최견도의 죽음도 곧 알려질 것이다. 시체가 발견되고, 사람들이 모이고, 소문이 돌 것이다. 나는 아직 무재를 연기해야 했다.
칼을 뽑는 놈은 읽힌다. 지금 이 힘을 드러내는 순간, 도현은 나를 진짜 위협으로 규정할 것이다. 그전까지는 껍데기 안에 이 빛을 숨겨두어야 했다.
그리고 사흘 뒤, 세가에서 대연회가 열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도현이 자신의 경지를 공식적으로 세가 전체에 알리는 자리라고 했다.
유모가 물러난 뒤, 나는 방문이 완전히 닫힌 것을 확인했다. 복도에서 멀어지는 발소리까지 사라지고 나서야 자세를 바로잡았다.
단전에 남은 기운을 아주 조금 끌어올렸다.
용위.
의식이 닿는 순간, 눈동자 안쪽에 희미한 금빛이 떠올랐다. 방 안의 공기가 잠시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변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세 번 숨을 고르기도 전에 손끝이 가늘게 떨렸고, 가슴이 거칠게 들썩이기 시작했다.
나는 즉시 기운을 거두었다.
눈동자에 떠올랐던 금빛이 사라지자 짓눌렸던 공기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하지만 호흡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겨우 그 정도를 사용했을 뿐인데도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간 듯했다.
현재의 용위로 도현을 정면에서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오래 유지하려 들면 도현에게 닿기도 전에 이 육체가 먼저 버티지 못할 것이다.
사흘 동안 위력을 키울 생각은 버려야 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강하게 발동하느냐가 아니었다. 필요한 순간에만 짧게 사용하고, 금빛이 밖으로 드러나기 전에 거두는 것. 사용 시간과 노출 여부를 완벽하게 조절해야 했다.
도현은 연회에서 분명 나를 시험하려 들 것이다.
그때까지, 용위의 존재를 완벽하게 숨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