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브레이크음이 길게 늘어졌다. 그다음은 빛이었다. 하얗고 지독한 빛. 나는 그 빛 속에서 아무것도 붙잡지 못했다. 몸이 뜬 것 같기도 했고, 어딘가로 빨려 들어간 것 같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떠오른 생각은 어이없게도 이거였다. 오늘 회의 자료를 못 냈는데.
그다음은 없었다. 소리도, 감각도, 시간도. 그저 검은 것이 삼켰다.
눈을 떴다.
천장이 낯설었다. 나무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난 천장이었다. 대들보 사이로 거미줄 같은 그림자가 흔들렸다. 향 냄새가 났다. 오래된 나무와 약재 냄새가 뒤섞인 공기였다. 어딘가에서 탕약 달이는 냄새도 섞여 들었다. 익숙하지 않은데, 이상하게 몸이 먼저 그 냄새를 안다는 듯 반응했다.
손을 들어보려 했다. 팔이 무거웠다. 아니, 가벼웠다. 내 팔이 아니었다.
손가락이 가늘었다. 손톱 밑에 낀 것 하나 없이 깨끗했다. 노동으로 단련된 손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위로 멍이 있었다. 여러 겹으로 겹친 멍이었다. 색이 다 달랐다. 시퍼런 것도 있고, 누렇게 변해가는 것도 있었다. 누군가 오랫동안, 여러 번 때린 흔적이었다. 한 번의 폭행이 아니었다. 반복이었다. 습관처럼 가해진 폭력.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때 문이 열렸다.
"도련님, 깨셨습니까."
나이 든 여인이었다. 허리를 굽히고 들어와 이불부터 살폈다.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낯선 얼굴, 낯선 목소리, 낯선 걱정. 그녀는 내 눈치를 살피더니 다시 말했다.
"신우 도련님. 정신이 드셨습니까."
신우. 이신우. 그 이름이 낯설게 귀에 감겼다. 내 이름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몸의 이름이었다. 입안에서 발음해보니 이상하게 걸리지 않았다. 몸이 먼저 그 이름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는 침묵 속에서 상황을 정리했다. 습관이었다. 회의 자료를 정리하듯, 문제를 항목별로 나누는 버릇.
첫째, 나는 죽었다. 확실하다. 그 빛과 그 소리를 기억한다.
둘째, 나는 지금 살아있다. 이것도 확실하다. 심장이 뛰고 있고, 통증이 느껴진다.
셋째, 이 몸은 내 것이 아니다. 손의 형태부터 다르다.
넷째, 이 몸의 원래 주인은 이신우라는 이름을 가진 자다.
환생인가. 빙의인가. 아니면 이건 그저 죽음 직전의 긴 꿈인가.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확인할 수 있는 건 오직 눈앞의 사실뿐이었다. 눈앞의 사실만 붙잡는다. 그게 유일한 생존 방식이었다.
"유모." 나는 그렇게 불러봤다. 낯선 단어였는데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왔다. 이 몸에 남은 기억의 파편인 듯했다. 손끝에 스며든 습관처럼. "내가 며칠이나 누워 있었소."
그녀의 눈이 커졌다.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목소리 톤이 달라졌나. 말투가 낯설었나. 확신할 수 없었지만, 뭔가 이상함을 감지한 눈치였다.
"사흘이옵니다, 도련님. 최 공자님 일행이 다녀가신 후로 사흘째 정신을 못 차리셨습니다."
최 공자. 그 이름에서 뭔가 서늘한 것이 스쳤다. 원래 몸에 남은 감각인지, 지금 내 판단인지 구분이 안 됐다. 다만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손끝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몸이 기억하는 두려움이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보려 했다. 갈비뼈에서 불이 났다. 신음이 절로 나왔다. 숨을 얕게 쉬어야 했다. 깊게 들이쉬면 갈비뼈가 쪼개질 것 같았다.
"무리하지 마시옵소서." 유모가 다급히 손을 뻗었다. "몸이 성한 곳이 없으신데."
나는 이를 악물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벽에 등을 기댔다. 나무 벽의 서늘한 감촉이 등을 타고 올라왔다. 통증을 참으며 나는 조용히 물었다.
"내가 무공을 익힌 몸이었소."
유모의 얼굴이 굳었다. 그 표정 하나로 답이 나왔다. 익혔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그녀는 잠시 입을 열었다 닫았다. 말을 고르는 기색이었다.
"세 살 되던 해부터 연체구천공을 익히셨습니다. 도련님은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근골이라 하여 세가의 자랑이셨지요. 그런데—"
그녀가 말끝을 흐렸다. 나는 기다렸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답은 무거워질 게 뻔했다. 유모의 손이 무릎 위에서 가볍게 떨렸다.
"이 년 전, 도련님의 근골이 갑자기 무너졌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무 이유도 없이. 명의를 다 불러도 원인을 못 찾았지요. 그날 이후로 도련님은... 무재로 판정받으셨습니다."
무재. 무공을 익힐 수 없는 몸. 이 세계에서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정확히 몰랐다. 하지만 유모의 목소리와 표정만으로도 충분히 짐작이 갔다. 낙인이었다. 이 몸은 한때 정점에 있었고, 지금은 바닥에 있다. 그 낙차가 이 멍들의 이유일 것이다.
"그럼 지금 세가를 이끄는 건 누구요."
"도현 공자님이십니다."
도현. 이도현. 처음 듣는 이름인데도 명치가 서늘해졌다. 유모가 목소리를 낮췄다. 문 쪽을 흘깃 살피기까지 했다.
"도련님보다 한 달 늦게 태어나신 종제분이시온데, 도련님이 무재가 되신 이후로... 연체 육중천의 경지에 오르셨습니다. 세가의 재산도, 지위도 지금은 전부 그분 손에 있습니다."
연체 육중천이 정확히 어느 정도 경지인지는 몰랐다. 그러나 세가의 전부를 가로챌 정도라면, 결코 약한 힘이 아니었다. 유모의 말투에서도 그 이름 앞에서는 조심스러움이 묻어났다. 두려움을 넘어선, 체념에 가까운 어조였다.
나는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축 하나, 나는 무재로 낙인찍힌 폐인이다.
축 둘, 사촌 동생이 나의 모든 것을 빼앗았다.
축 셋, 최 공자라는 자가 사흘 전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
세 개의 축이 하나로 모였다. 이 몸의 주인은 이미 밑바닥까지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밑바닥에서도 더 아래로 끌어내리려는 손이 있다. 최 공자든, 도현이든.
생존이 먼저다. 복수는 그다음이다.
이 몸이 어떤 상태인지, 이 세가가 어떤 구조인지, 아직 아는 게 없다. 그러나 확실한 건 하나였다. 나를 가만히 둘 생각이 없는 자들이 있다는 것.
그때였다. 바깥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여러 명이었다. 무겁고, 급했다. 마루를 밟는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유모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얘졌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도련님, 숨—"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