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영애님, 장기 두실까요?

5화

빚은 금화 스물일곱 개였다. 오승재를 이긴 다음날부터 계좌 아닌 계좌, 도박장 장부 위의 숫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금화 스물일곱. 금화 스물다섯. 금화 스물둘. 일주일 만에 다섯 개가 줄었다. 형제가 반년을 사냥해야 갚을 돈이었다. 나는 매일 도박장으로 갔다. 매일 판이 벌어졌다. 매일 이겼다. 오전 10시, 첫 판. 정오, 두 번째 판. 저녁 6시, 세 번째 판. 같은 시간에 같은 자리. 다른 상대, 같은 결과. 상대의 얼굴은 매번 바뀌었지만 표정은 항상 같았다. 처음엔 자신만만했다. 중반엔 당황했다. 끝날 땐 굳어 있었다. 나는 그 순서를 외울 정도가 됐다. 자신감, 당황, 경직. 세 단계를 거치면 판이 끝났다. 그게 지겨워질 만큼 반복됐다는 게 이상했다. 나는 지금 사람을 상대로 게임을 하는 게 아니라 패턴을 상대로 게임을 하는 것 같았다. 소문이 도박장 밖으로 새어나갔다. "동쪽에서 온 이방인이 이상한 게임으로 판을 쓸어간다." 그런 말이 골목마다 돌았다. 어떤 사람은 나를 마법사라고 불렀다. 어떤 사람은 사기꾼이라고 불렀다. 둘 다 아니었다. 나는 그냥 이 세계에 없는 게임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 차이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알아도 상관없었다. 결과는 똑같았으니까. 오후 3시였다. 태민이 은화 뭉치를 세고 있었다. 손끝이 빠르게 움직였다. 동전 부딪치는 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철컥, 철컥. 규칙적인 소리였다. "형, 이러면 두 달 안에 다 갚아요." 태민의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두 달이요?" "어. 두 달." 태민이 계산을 다시 했다.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오늘까지 열다섯 개 채웠어요. 이 속도면 진짜 두 달이에요." "빠르네." "빠른 거 맞죠? 형 대단해요." 나는 그 말이 좋으면서도 불편했다. 두 달이라는 숫자가 너무 쉽게 나왔다. 원래 세계에서 나는 오 년을 갈아도 안 되던 걸 이 세계에서는 두 달로 계산하고 있었다. 그 차이가 감사한 게 아니라 무서웠다. 숫자가 너무 쉽게 만들어지는 세계. 그 세계에서 나는 무엇을 만들고 있는 걸까. "빚 다 갚으면 뭐 할 거야." 내가 물었다. 태민이 대답을 멈췄다. 동전을 세던 손이 멈췄다. "몰라요." 짧은 대답이었다. "근데 그때 되면 뭔가 할 거예요." "뭔가라니." "모르니까 뭔가죠." 태민이 웃었다. 웃는 얼굴이었는데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뭔가, 라는 말 안에 아무것도 없었다. 형제가 도박장을 벗어나 무엇을 할지, 아무도 몰랐다. 장기가 아니면 형제는 다시 무엇을 할까. 나는 그 질문을 삼켰다. 원래 세계에서도 그런 질문들이 있었다. 빚 다 갚으면 뭐 할 거야. 회사 그만두면 뭐 할 거야. 나는 그 질문들에 대답한 적이 없었다. 대답이 없어도 사는 게 가능했으니까. 대답이 없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습관이었다. 태호는 은화를 세지 않았다. 대신 판을 정리하고 있었다. 손등의 흉터가 나무 판 위를 문질렀다. 그 손동작은 항상 똑같았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태호는 돈에 대해 말이 없었다. 많이 벌어도, 조금 벌어도 표정이 같았다. 나는 그 무표정이 태호의 방식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도 없다. 그게 태호가 사는 방식이었다. "주인장이 부른다." 태호가 짧게 말했다. 주인장의 방은 도박장 뒤편에 있었다. 좁고 어두운 방이었다. 촛불 하나가 벽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림자가 흔들릴 때마다 방 안의 물건들이 커졌다가 작아졌다. 나무 책상 위에 장부가 몇 개나 쌓여 있었다. 숫자들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이도현." 주인장이 내 이름을 정확히 불렀다. 처음이었다. 그 전까지 주인장은 나를 "야" 아니면 "너"라고 불렀다. 이름을 부른다는 건 뭔가 달라졌다는 뜻이었다. "네." "너 때문에 손님이 줄었어." "죄송합니다." "아니, 좋은 뜻이야." 주인장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웃는 얼굴이 아니었다. 계산하는 얼굴이었다. "다른 도박장에서 손님이 여기로 넘어와. 네 소문 듣고." "그럼 손님이 준 게 아니라 늘어난 거네요." "그래. 근데 종류가 바뀌었어." 주인장이 장부 하나를 펼쳤다. "예전엔 이거 하러 왔어." 주사위 그림이 그려진 페이지를 가리켰다. "지금은 이거 하러 와." 장기판 그림이 그려진 페이지를 가리켰다. "장기판을 하나 더 놓을 거다." 주인장이 말했다. "장기 전용 판을 늘린다는 거야." "저 말고 다른 사람도요?" "네가 가르치면 되잖아."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가르친다는 말이 이상하게 무겁게 들렸다. 장기가 이 도박장의 새로운 상품이 되고 있었다. 그 상품의 원산지가 나였다. 원래 세계에서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내가 잘하는 걸 회사가 상품으로 만들던 순간. 그 상품이 팔릴수록 나는 소모품이 됐다. 이 세계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이번엔 내가 그 구조를 알아챘다는 것. "싫으면요." 내가 물었다. "싫으면 안 해도 돼." 주인장이 어깨를 으쓱했다. "근데 그럼 나도 너한테 판 안 열어줘." 간단한 협박이었다. 장식이 없는, 직접적인 협박. "할게요." "잘 생각했어." "대신." 주인장이 말을 이었다. "곧 특별한 손님이 온다." "특별한 손님이요." "돈이 아주 많은 손님." 주인장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평소와 다른 어조였다. "어디서 왔는데요." "모르겠어. 근데 사람을 보내서 미리 물어봤어. 장기 하는 이방인이 여기 있냐고." "저를요?" "너를." 오승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보다 강한 사람이 곧 올 거야. 등골이 서늘해졌다. 목이 마르기 시작했다. 침을 삼켜도 마른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다. "누군데요." "나도 몰라. 소문만 들었어." 주인장이 어깨를 으쓱했다. "돈이 많으면 다야. 이 장사는." 그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돈이 많으면 다다. 이 도박장이 돌아가는 방식이었다. "언제 온다는데요." "곧. 정확한 날짜는 몰라." "곧이 언제인데요." "내일일 수도 있고, 모레일 수도 있고." 명확하지 않은 대답이 더 불안했다. 언제 올지 모른다는 건 매 순간을 대기 상태로 만든다는 뜻이었다. 오후 8시였다. 나는 형제와 함께 도박장 밖으로 나왔다. 밤바람이 차가웠다. 거리에는 등불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 낮과는 다른 냄새가 났다. 숯불 냄새, 술 냄새, 그리고 뭔가 익숙하지 않은 향료 냄새. "형, 뭐래요?" 태민이 물었다. "장기판을 더 놓겠대." "그럼 우리 더 벌어요?" "그럴 것 같아." 태민의 얼굴이 밝아졌다. 나는 그 밝음이 부러웠다. 동시에 조금 무서웠다. "근데 형." 태민이 목소리를 낮췄다. "주인장이 다른 말도 했어요?" 나는 잠시 멈췄다. 말할까 말까 고민했다. "특별한 손님이 온대." "손님이요?" "돈 많은 손님이라는데, 나를 찾아왔다더라." 태민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거 좋은 거예요, 나쁜 거예요?" "몰라." 정직한 대답이었다. 좋은지 나쁜지, 나도 판단할 수 없었다. 태호가 뒤에서 걸어오며 한마디 던졌다. "돈 많은 손님은 좋은 적이 없었어." 경험에서 나온 말투였다. 나는 그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숫자만 보고 있으면 다 괜찮아 보였다. 스물일곱에서 열둘로. 열둘에서 곧 영으로. 하지만 숫자 뒤에 뭐가 있는지, 나는 모르고 있었다. 숫자는 결과만 보여준다. 과정도, 위험도 보여주지 않는다. 나는 그 사실을 나중에야 깨닫게 됐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태민이 자꾸 뒤를 돌아봤다. "왜 그래." "아니, 그냥." "뭔데." "누가 따라오는 것 같아서요." 나도 뒤를 돌아봤다. 아무도 없었다. 어두운 골목이 이어져 있을 뿐이었다. "착각이겠지." 내가 말했다. "그렇겠죠." 태민의 목소리에 확신이 없었다. 나도 확신이 없었다. 다음 날 오전. 도박장 문이 평소보다 일찍 열렸다. 안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평소라면 도박장은 정오 즈음에야 사람이 모이기 시작했다. 오전부터 웅성거린다는 건 뭔가 있다는 뜻이었다. 태호가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가 멈춰 섰다. "뭐야." 태호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나는 그 어깨 너머를 봤다. 도박장 입구에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낡은 나무 건물 앞에 어울리지 않는 마차였다. 장식이 화려했다. 금장식이 아침 햇빛을 받아 번쩍였다. 바퀴에도 은으로 된 테두리가 둘러져 있었다. 말도 이 도시에서 흔히 보던 말과 달랐다. 털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이 마차를 힐끔거리면서도 감히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누군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거 누구 마차야." "몰라. 저런 거 처음 봐." 마차에서 내리는 발이 보였다. 작고 하얀 신발이었다. 신발 위로 드레스 자락이 흘러나왔다. 비단인지 뭔지 알 수 없는 재질이 아침 빛에 반사됐다. 도박장 안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동전 세는 소리도, 판 정리하는 소리도 멈췄다. 모두가 입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숨을 멈춘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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