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오승재가 둔 첫 수는 마였다.
마가 중앙으로 튀어나왔다.
초보자라면 상을 먼저 움직인다.
마를 먼저 움직이는 사람은 드물다.
나는 판을 내려다봤다.
이건 그냥 도박장 손님이 아니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도박장 안은 여전히 어수선했다.
구석에서 투전판이 돌아가는 소리, 술잔이 부딪히는 소리, 누군가 욕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
그 모든 소음 속에서 이 장기판만 조용했다.
섬 같았다.
"왜 그렇게 봐."
오승재가 웃으며 물었다.
"장기 안 둬본 사람 같지 않아서요."
"안 둬봤어. 처음이야, 이 게임."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얼굴에는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런데 진짜라고 믿기에도 너무 매끄러웠다.
판돈은 은화 열 개.
형제가 반년을 벌어야 하는 돈이었다.
그 돈이 이 나무판 위에 걸려 있었다.
내 손바닥에 땀이 배기 시작했다.
나는 병을 하나 올렸다.
무난한 응수였다.
정석대로.
오승재가 곧바로 상을 움직였다.
마와 상의 조합이 낯설었다.
이 세계 사람들은 장기를 모른다.
적어도 내가 아는 정석은 모른다.
그런데 이 남자는 첫판부터 정석을 벗어난다.
정석을 벗어나면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흔들리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정석을 몰라서 벗어나는 사람은 다음 수에서 반드시 헤맨다.
헤매는 티가 난다.
눈동자가 판 위를 훑는 속도, 손끝이 말 위에서 머뭇거리는 시간.
그런데 오승재는 그런 게 없었다.
손이 곧바로 다음 자리를 찾았다.
"태호 형."
나는 옆을 보지 않고 말했다.
"저 사람 원래 뭐 하던 사람이에요."
"몰라. 돈 많은 귀족 자식."
태호가 낮게 대답했다.
"장기는 처음일 거다."
처음이라는 말에 안심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불안해졌다.
장기를 처음 두는 사람이 이런 수를 낸다면.
타고난 감각이라는 뜻이었다.
타고난 감각을 가진 사람과 붙는 건 위험하다.
내가 아는 정석은 앞으로 몇 수까지 유효할까.
이 남자가 감각으로 내 정석을 깨는 순간이 온다면.
그때는 뭘 믿고 다음 수를 둬야 하나.
오전이었다.
도박장 안은 어둑했다.
창으로 들어오는 빛이 판 위에만 떨어졌다.
그 빛 속에서 말들이 유난히 하얗게 보였다.
구경꾼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처음에는 두세 명이었다.
이제는 열 명이 넘었다.
다들 판돈 얘기를 듣고 몰려온 것이었다.
은화 열 개짜리 대국이라는 말이 도박장 안에 퍼진 모양이었다.
일곱 번째 수에서 오승재가 포를 올렸다.
평범한 수였다.
나는 안심할 뻔했다.
그런데 그 포가 다음 자리를 위한 발판이라는 걸 세 수 뒤에야 알았다.
열두 번째 수에서 오승재가 차를 내밀었다.
내 포를 노리는 수였다.
나는 숨을 삼켰다.
포를 빼면 진영이 무너진다.
포를 두면 차에 잡힌다.
선택해야 했다.
머릿속에서 판이 몇 겹으로 갈라졌다.
포를 빼는 경우, 다음 세 수.
포를 두는 경우, 다음 세 수.
둘 다 나쁘게 끝나는 그림이 보였다.
그런데 하나는 조금 덜 나쁘게 끝났다.
나는 포를 뒤로 뺐다.
대신 마를 앞으로 밀었다.
오승재의 표정이 처음으로 굳었다.
"어."
짧은 감탄이었다.
마가 상을 잡았다.
판이 조용해졌다.
주변에서 누군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오후 12시 20분이었다.
대국은 벌써 삼십 분을 넘기고 있었다.
보통 도박장의 투전은 몇 초 안에 끝난다.
장기는 다르다.
장기는 사람을 붙잡아둔다.
붙잡아두는 시간 동안 사람의 밑바닥이 드러난다.
초조함, 자만심, 조급함.
투전판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장기판에서는 보인다.
나는 오승재의 밑바닥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아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주인장이 팔짱을 낀 채 판 앞에 서 있었다.
눈매가 날카로웠다.
나를 보는 게 아니었다.
판을 보고 있었다.
주인장의 시선이 판 위를 훑는 걸 느꼈다.
저 사람도 뭔가를 계산하고 있었다.
승패가 아니라 다른 것.
어떤 계산인지는 알 수 없었다.
불안이 조금 더 깊어졌다.
나는 다시 병을 움직였다.
오승재는 사를 안으로 넣었다.
방어적인 수였다.
방어적으로 나온다는 건 신호였다.
내가 우세하다는 신호.
손끝이 조금 따뜻해졌다.
하지만 오승재가 곧바로 차를 뺐다.
차가 내 사 옆을 스쳐 지나갔다.
외통의 냄새가 났다.
심장이 한 박자 빨라졌다.
외통이면 여기서 끝이다.
은화 열 개, 반년 치 벌이.
형제가 흘린 땀이 이 한 수에 날아간다.
나는 판을 다시 봤다.
한 번, 두 번, 세 번.
같은 자리를 세 번 봐도 답이 같았다.
외통이 아니었다.
허장성세였다.
허장성세라는 걸 확인하는 순간 등에 소름이 돋았다.
이 남자는 겁을 주는 방식을 안다.
실제 수읽기가 아니라 상대의 흔들림을 노린 수.
장기를 진짜 처음 두는 사람은 이런 계산을 못한다.
"차를 뺀 건 실수예요."
내가 말했다.
오승재가 눈을 크게 떴다.
"아직 안 끝났어."
"네, 안 끝났죠."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애를 썼다.
안에서는 심장이 계속 빠르게 뛰고 있었다.
겉으로는 침착해야 했다.
침착한 쪽이 이긴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마로 차를 노렸다.
오승재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비단옷 안의 몸이 살짝 움직였다.
반지를 낀 손가락이 판을 두드렸다.
그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붉은 보석이 박힌 반지였다.
평범한 사람이 낄 수 없는 물건.
저 반지 하나가 형제의 반년 치 벌이보다 더 비쌀 것 같았다.
오후 1시였다.
판 위에는 이제 말이 절반도 남지 않았다.
내 왕은 안전했다.
오승재의 왕은 사 하나에 의지하고 있었다.
구경꾼들 사이에서 낮은 웅성거림이 시작됐다.
"저기 저 애가 이기는 거야?"
"귀족 나리가 밀리는데?"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태민이가 내 뒤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게 느껴졌다.
나는 차를 밀었다.
포로 길을 열었다.
마지막 수순이었다.
"장군."
오승재가 왕을 옆으로 뺐다.
갈 곳이 없었다.
한 칸, 두 칸.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장군."
나는 다시 말했다.
오승재의 손이 판 위에서 멈췄다.
움직일 말이 없었다.
주변이 조용해졌다.
숨소리조차 크게 들렸다.
누군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오승재가 손을 들었다.
"졌다."
그 한마디에 도박장이 터졌다.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누군가 손뼉을 쳤다.
누군가 욕을 했다.
"이겼다!"
태민이가 내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형, 형, 이겼어요!"
태호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손등의 흉터가 판 위를 지나갔다.
주인장에게 은화를 받아드는 손이었다.
은화 열 개.
손바닥 위에서 무겁게 흔들렸다.
그 무게가 손목까지 전해졌다.
반년.
형제가 그동안 굶고 아끼고 버틴 시간이 이 열 개의 은화 값이었다.
이제 그 시간을 하루 만에 벌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쁘지가 않았다.
"허."
오승재가 웃었다.
웃음이 이상했다.
진 사람의 웃음이 아니었다.
그 웃음을 어디선가 본 것 같았다.
게임 시절 랭킹전에서 만난 하위권 유저들의 웃음.
져도 아무렇지 않은 웃음.
왜냐하면 이 판이 진짜 승부가 아니었으니까.
"뭐가 그렇게 웃겨요."
태민이가 물었다.
오승재는 반지를 낀 손으로 판을 정리했다.
손놀림이 느긋했다.
방금 은화 열 개를 잃은 사람의 손놀림이 아니었다.
마치 다음 판을 위해 말을 정리하는 것 같았다.
그 다음 판이 이 판이 아니라는 걸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너희, 재밌는 걸 봤다."
오승재가 나를 보며 말했다.
"근데 이 도박장에 너보다 강한 사람이 곧 올 거야."
그 말에 태민의 손이 멈췄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웃음소리가 등 뒤로 멀어졌다.
도박장의 소음이 다시 나를 감쌌다.
그런데 그 소음이 조금 전과는 다르게 들렸다.
승리의 흥분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로 채워지고 있었다.
불안이라는 이름의 무언가.
주인장이 판을 다시 세팅하는 손을 지켜봤다.
그 손이 새 말을 판 위에 올려놓았다.
다음 대국을 위한 판이었다.
누구를 위한 판인지는 아직 몰랐다.
"강한 사람이 곧 온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내가 물었다.
오승재는 이미 등을 돌리고 있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비단옷 자락이 문 쪽으로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손에 쥔 은화의 무게를 다시 느꼈다.
반년 치 벌이가 손안에 있는데 안심이 되지 않았다.
그 남자가 두고 간 말 한마디가 계속 귓가에 남았다.
너보다 강한 사람이 곧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