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300년 등대, 그녀만이 고친다

4화

유하진의 서찰에는 군더더기 없는 문장 몇 줄만이 적혀 있었다. 청하 변경의 등대가 삼백 년 가까이 자리를 지켜왔으나 근래 이상 진동이 감지되고 있으며, 그것을 살펴볼 수 있는 기술자를 급히 구한다는 내용이었다. 서율은 그 서찰을 몇 번이고 되읽으며, 자신을 향한 그 어떤 수사도 없는 건조한 문장이 오히려 낯설게 편안하다는 것을 느꼈다. 사교계의 편지들이 늘 겉치레로 가득했던 것과는 달리, 이 서찰에는 오직 필요한 사실만이 담겨 있었다. 존함 뒤에 붙는 격식조차 최소한으로 줄여져 있어서, 마치 상대가 자신의 시간을 아까워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문장 하나로 증명하려는 듯했다. 편지지의 질감마저 화려한 문양 하나 없이 매끈했는데, 서율은 그 매끈함을 손끝으로 쓸어보며 나직이 웃었다. *이런 편지를 받아본 게 얼마 만인지.* 청하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서율은 창밖으로 스쳐 가는 황량한 해안선을 바라보며 자신이 챙겨온 도구함을 다시 한번 점검했다. 태엽을 조이는 작은 렌치들과 이가 맞물리는 정도를 재는 게이지, 그리고 낡은 부품을 대신할 몇 가지 여분의 톱니바퀴까지, 모든 것이 정확한 자리에 놓여 있었다. 백작가에서 그녀에게 요구했던 것은 언제나 자수와 예법이었지만, 지금 그녀의 무릎 위에 놓인 것은 기름때가 묻은 도구함이었고, 그 무게가 오히려 마음을 가라앉혔다. 청하에 도착한 서율은 삼백 년 된 등대의 내부 태엽 장치가 이미 위험한 수준으로 마모되어 있다는 것을 손끝으로 확인하는 데 채 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등대지기 박순덕은 처음에는 그녀를 의심의 눈초리로 훑어보았는데, 백작가에서 왔다는 젊은 여인이 무슨 대단한 기술을 안다고 나서는지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서율이 낡은 부품을 만지는 순간 나직이 흘러나온 한마디에 그 표정이 바뀌었다. "이 태엽, 왼쪽 세 번째 이가 어긋난 채로 삼 년은 더 버텨왔군요." 그 말에 순덕은 눈을 크게 뜨며, 이십칠 년을 등대와 함께해온 자신조차 미처 짐작하지 못했던 부분을 짚어낸 이 여인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녀는 팔짱을 풀고 등대 벽에 걸린 낡은 도면을 가져와 서율 앞에 펼쳐 보였다. "어떻게 그걸 한 번에 아셨습니까? 저는 지난달에야 소리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챘는데." "소리는 마지막에 나는 겁니다." 서율은 게이지를 태엽 사이에 밀어 넣으며 담담히 대답했다. "이가 어긋나기 시작하면 처음엔 진동으로 오고, 그다음엔 열로 오고, 소리는 가장 늦게 옵니다. 이미 세 단계를 다 지나온 상태예요." 순덕의 얼굴에서 의심의 기색이 완전히 사라지고, 대신 오래도록 혼자 등대를 지켜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안도가 스쳐 지나갔다. 문제는 등대의 수리를 정식으로 승인받고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청하에 모인 지역 유력 가문들과 왕도에서 파견된 감독관들이 참석하는 연회에서 그 위험성을 공식적으로 알려야 한다는 점이었다. 유하진은 서율에게 그 연회에 참석할 것을 권했으나, 그 어조는 강요라기보다는 사실을 전달하는 담담한 것이었다. "당신이 나서지 않으면, 저들은 등대가 무너지는 그 순간까지 예산 하나 내주지 않을 겁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떤 위로도 격려도 없었지만, 그 안에 담긴 신뢰만큼은 분명했다. 서율은 잠시 침묵했다가 되물었다. "제가 나선다고 해서 저들이 제 말을 들을까요. 저는 그저 파혼당한 백작가의 영애일 뿐인데." "그럴 겁니다." 유하진은 서율의 눈을 똑바로 보며 짧게 답했다. "당신이 증명한 것은 태엽의 이가 아니라, 저들이 삼백 년 동안 보지 못한 걸 본 눈이니까." 그 말에 서율의 등줄기를 타고 미묘한 열기가 지나갔는데, 그것이 부끄러움인지 오래 잊고 있던 자긍심인지 그녀 자신도 쉽게 구분하지 못했다. 연회 전날 밤, 서율은 다시 낡은 거울 앞에 섰다. 이번에는 백작가에서 가져온 화려한 예복 대신, 청하에서 새로 지은 단정한 짙은 남색 의복을 걸쳤는데, 소매는 손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좁게 재단되어 있었고 옷깃에는 작은 금속 장식 대신 실용적인 단추가 달려 있었다. 그녀는 머리를 높이 틀어 올리며, 화려하게 꾸미기보다는 자신의 손이 여전히 도구를 다룰 수 있도록 하는 데 신경을 쏟았다. 거울 속에는 더 이상 사교계가 원하는 얼굴도, 방 안에 숨어 도구를 만지던 얼굴도 아닌, 두 얼굴이 겹쳐진 채로 하나로 굳어가는 낯이 비쳤다. 서율은 손끝으로 자신의 광대뼈를 가만히 눌러보았다. 예전이라면 분을 두껍게 발라 감추었을 자리였지만, 지금은 그저 맨살 그대로였고, 그 맨살이 오히려 낯빛을 또렷하게 만들었다. *오늘은, 어느 쪽 얼굴로도 살지 않겠어.* 그녀는 거울 앞을 떠나기 전, 도구함에서 작은 렌치 하나를 꺼내 옷깃 안쪽 주머니에 몰래 밀어 넣었다. 누군가는 그것을 우스운 미신이라 여길지 몰랐으나, 서율에게는 그것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스스로에게 되새기는 방식이었다. 연회장 입구에 선 서율은 등대의 도면을 담은 가죽 통을 옆구리에 낀 채,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다른 영애들 사이를 지나쳐 걸어갔다. 그 걸음걸이는 조심스럽지 않았고, 오히려 목적지가 명확한 사람의 것처럼 곧고 빨랐다. 연회장 안의 시선들이 하나둘 그녀에게로 옮겨왔고, 그중 몇몇은 노골적인 경멸을 담아 그녀의 옷차림을 훑어보았다. "저 옷깃 좀 보세요, 무슨 장인의 견습생 같지 않나요?" 부채 뒤에서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서율은 그 목소리의 주인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오직 상석 근처, 유하진이 앉아 있는 자리를 향해 있었다. 몇 걸음 더 걸어가자, 이번엔 낮은 남성의 목소리가 그녀의 발치에 걸리듯 들렸다. "백작가에서 파혼까지 당한 여식이 이제는 등대나 고치겠다고 나선 모양인데, 저러다 다음엔 하수도라도 손보겠다고 하겠어." 서율은 그 말에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다만 도면이 담긴 가죽 통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손등의 정맥이 살짝 도드라졌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 조롱에 반응하는 순간, 이 자리에서 준비한 세 번째 얼굴이 무너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유하진은 그녀를 발견하고도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지만, 그 무심한 인정 하나가 서율에게는 어떤 화려한 환영보다도 크게 다가왔다. 유하진의 곁에 서 있던 감독관 하나가 서율의 옷차림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눈살을 찌푸렸으나, 유하진이 짧게 손을 들어 자리를 권하자 감독관도 더는 말을 얹지 못했다. "도면을 준비해왔습니까." 유하진이 물었다. 목소리에는 어떤 다정함도 없었지만, 그 안에는 서율이 해낼 것이라는 확신이 배어 있었다. "준비했습니다." 서율은 가죽 통을 살짝 들어 보이며 답했다. 연회장 한쪽에서 누군가 낮게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파혼당한 영애가, 이번엔 등대 타령을 하러 왔다는군." 그 말을 들은 서율의 어깨가 순간 미세하게 굳었으나, 그녀는 그 반응을 애써 억누르며 도면을 펼칠 자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 비웃음의 주인이 누구인지 짐작이 가면서도, 서율은 굳이 돌아보지 않았다. 지금 돌아본다면 그 시선 속에서 옛 자신의 얼굴을, 파혼 통보를 받던 그 밤의 얼굴을 다시 마주하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 순간을 위해, 그녀는 이미 자신의 두 얼굴 중 어느 것도 아닌 세 번째 얼굴을 준비해두고 있었다. 그러나 도면을 펼치기 위해 자리에 앉는 그 짧은 순간, 상석 저편에서 그녀를 향해 곧게 뻗어오는 또 다른 시선 하나가 있었다. 익숙한 듯 낯선 그 눈빛의 주인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서고 있었다는 것을, 서율은 아직 알지 못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