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유하진이 상경했다는 소식은 국청 안을 더욱 팽팽하게 조여놓았다. 문이 열리고 시종이 그 소식을 전하는 순간, 조금 전까지 한산하게 오가던 신료들의 발걸음이 일제히 멈추어 섰고, 그 정적은 마치 누군가 방 안의 공기를 통째로 틀어쥔 것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한정욱은 다시 자리에 앉으며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는데, 그 몸짓 하나에서도 오래 눌러둔 신경질이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손끝이 관자놀이를 누르는 힘이 조금씩 세지는 것을, 곁에 선 시종은 알아차렸으나 감히 티를 내지는 못했다.
"변경백이 무슨 연유로 자청해서 왕도까지 올라왔단 말이냐."
그의 물음에 시종은 고개를 조아린 채 조심스럽게 답했다. 목소리에는 상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움이 배어 있었다.
"등대 수리에 관한 정식 계약을 왕실에 승인받고자 함이라 들었사옵니다. 강 영애를 정식으로 기술자로 고용하겠다는 뜻을 전하러 오셨다 하옵니다."
그 말에 신료들 사이에서 다시 웅성거림이 일었고, 그것은 마치 잔잔한 물 위에 돌을 던진 것처럼 파문을 그리며 퍼져나갔다. 누군가는 헛기침을 했고, 누군가는 옆 사람과 눈짓을 주고받았으며, 그 모든 소란 속에서 한정욱은 잠시 말을 잃은 채 서류를 손끝으로 짓눌렀다. 종이가 손끝에서 미미하게 구겨지는 소리가 났으나, 그 소리를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기술자로 고용하겠다니."
그는 나직이 되뇌며 헛웃음을 터뜨렸으나, 그 웃음 속에는 억누르지 못한 불쾌감이 그대로 배어 있었다. 웃음소리가 짧게 끊기는 지점에서, 그의 눈매는 이미 웃음기를 잃고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백작가의 영애를, 그것도 왕세자 전하와 파혼한 계집을, 변경백이 제 손으로 데려다가 장인바치처럼 부리겠다는 것이냐."
그의 목소리가 점점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빛과 함께 높아졌으나, 곧 스스로 그것을 억누르듯 숨을 길게 내쉬었다. 숨을 내쉬는 동안에도 손끝은 여전히 서류 위에서 떠나지 못했고, 그 손끝의 떨림이 그가 얼마나 이 소식을 불편하게 여기는지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국청 한쪽에 조용히 서 있던 늙은 사관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는 오랜 세월 국청의 그늘에서 살아온 자였고, 그 목소리에는 세월이 만들어낸 무게가 실려 있었다.
"대감, 혹 청하 변경백의 속내를 짚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 물음에 한정욱의 시선이 사관에게로 향했고, 시선이 마주치는 짧은 순간, 사관의 눈빛에는 조심스러움과 함께 무언가를 짚어보려는 노회한 계산이 섞여 있었다. 사관은 목소리를 더욱 낮추며 말을 이었다.
"변경백의 선대와 왕실 사이에,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것을 대감께서도 잊지 않으셨을 줄 압니다."
한정욱의 턱이 순간 단단하게 조여지며, 이가 갈리는 소리가 낮게 새어 나왔다. 그 소리는 작았으나, 가까이 서 있던 시종의 등줄기를 서늘하게 만들 만큼 뚜렷했다.
"그 이야기를 여기서 꺼낼 필요는 없다."
그는 짤막하게 말을 끊었으나, 그 짧은 문장 안에는 이미 오래 묵은 무언가가 건드려진 흔적이 역력했다. 사관은 고개를 숙였으나 말을 완전히 멈추지는 않았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았지만, 그 안에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가 은근히 스며 있었다.
"청하 변경백의 선대가 조정에서 억울하게 밀려난 것이, 벌써 이십여 년 전 일이었지요. 그때 그 일을 주도했던 것이 다름 아닌..."
"그만."
한정욱은 손을 들어 사관의 말을 끊었고, 국청 안은 다시 침묵으로 메워졌으나, 그 정적은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른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마치 방 안의 공기가 한층 더 조밀해진 것처럼, 신료들은 숨을 죄고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못했으며, 그 무언의 시간이 얼마나 지속되었는지 가늠하는 이조차 없었다.
한정욱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그의 발걸음은 평소보다 무거웠고, 그 조용함 속에는 억눌린 분노가 여전히 꿈틀거리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어스름이 내려앉는 왕도의 지붕들이 늘어서 있었고, 그 위로 희미하게 새어드는 저녁빛이 마치 오래된 양피지처럼 누렇게 번지고 있었다. 지붕들 사이로 저녁 종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고, 그 소리는 국청 안의 무거운 정적과 대비되어 더욱 아득하게 들렸다.
그는 한참을 창밖만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등 뒤로 신료들의 시선이 따라붙는 것을 알았으나, 개의치 않는 듯 그저 저녁빛이 번지는 지붕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유하진이 제 발로 상경했다는 것은, 단순히 계약 승인을 위한 발걸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그의 머릿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 의심은 처음에는 희미한 안개처럼 흐릿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또렷한 형체를 갖추어 갔다.
*저 냉정한 변경백이, 아무 이유 없이 움직일 리는 없지.*
한정욱은 그 생각을 곱씹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유하진이라는 자는 변경의 척박한 땅을 다스리면서도 왕도의 정세에 발을 담그는 일이 거의 없던 인물이었다. 그런 자가, 등대 수리 하나를 명분으로 삼아 직접 왕도까지 걸음을 옮겼다는 것 자체가 이미 예사롭지 않은 일이었다.
만약 유하진이 그 옛 원한을 잊지 않고 있다면, 강서율이라는 계집을 앞세워 무언가를 도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그의 등줄기를 타고 스며들었다. 이십여 년 전의 그 일, 청하 변경백의 선대가 조정에서 밀려나던 그 밤의 일을 떠올리자,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때 그 자리에 자신도 있었다는 사실이, 지금 이 순간 새삼스럽게 목덜미를 조여왔다.
그는 곧 시종을 불러 낮은 목소리로 명했다. 그 목소리는 겉으로는 침착했으나, 그 안에 담긴 조급함은 숨길 수 없었다.
"강서율이라는 계집이, 어떤 경위로 파혼을 당했는지 다시 조사하라. 그리고 그 계집이 청하로 가기 전, 왕도에서 무슨 짓을 하며 살았는지도 함께 알아보아라."
시종은 고개를 깊이 숙이며 그 명을 받아 조용히 물러났다. 그 물러가는 발걸음이 소리 없이 문밖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한정욱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녁빛은 이미 붉은 기운을 잃고 잿빛으로 가라앉고 있었으며, 지붕들 위로 어둠이 서서히 내려앉는 것이 마치 오래된 석고상 위로 그림자가 스미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국청 밖 어딘가에서는 이미 두 달 전, 그 모든 일이 시작되었던 그 밤의 기억이 다른 시점에서 조용히 되살아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는 그 밤을 떠올리며 조용히 숨을 삼켰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 밤의 기억을 지워버리고 싶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두 개의 서로 다른 기억이 왕도의 어스름 속에서 서서히 겹쳐지고 있었으나, 국청 안의 누구도 아직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