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정소혜 왕비의 명령에도 대전의 긴장은 쉽게 풀리지 않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양측 병사들의 창끝은 여전히 서로를 겨누고 있었고, 대전을 채운 수십 명의 숨소리마저 하나로 얼어붙은 듯했기 때문이었다. 벽에 걸린 등불의 불꽃마저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 정적 속에서, 낮게 섞여든 웃음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환청인가 싶을 정도로 작았으나, 그 소리는 점점 또렷해지며 대전의 무거운 공기를 갈랐고, 곧 그 웃음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연주였다. 화려한 붉은빛 비단옷을 입은 그녀는 강주헌의 애첩으로, 오늘 이 자리에 공개적으로 동석해 있었는데, 그 옷차림만으로도 자신의 위치가 단순한 첩실이 아니라는 걸 과시하려는 의도가 뚜렷했다. 소매 끝에 금실로 수놓인 문양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등불 빛을 받아 번쩍였고, 그녀는 그 화려함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듯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천천히 도윤서 앞으로 다가섰다.
"어머, 결국 이렇게 되었네요." 하연주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말했으나, 그 손짓은 웃음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웃음을 강조하는 몸짓이었다. "2년이나 준비하셨다면서요, 도윤서 님. 이렇게 끝나면 그 2년은 다 어디로 가는 걸까요?"
그 말에 도윤서의 어깨가 처음으로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것을 본 이서준은 저 흔들림이 두려움이 아니라 굴욕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다온국 궁정에서 도윤서를 여러 차례 마주친 적이 있던 하연주는, 그녀가 늘 완벽한 예법으로 자신을 하대해왔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있었고, 지금 이 순간이 바로 그 오래된 굴욕을 되돌려줄 기회라고 여기는 듯했다. 예법이란 늘 약자가 강자에게 지키는 것이라 여겨왔던 그녀에게, 도윤서의 흠 없는 태도는 언젠가 반드시 되갚아야 할 빚처럼 남아 있었던 것이다.
"베일을 계속 쓰고 계시네요." 하연주가 다가서며 말을 이었다. "뭘 그렇게 숨기세요? 사람들이 이미 다 알고 있을 텐데."
"무엇을 안다는 겁니까." 도상현 경이 앞을 막아서며 물었으나, 하연주는 그 물음에 답하지 않고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의 눈은 웃고 있었으나 입술은 다물려 있었고, 그 침묵이야말로 자신이 던진 말보다 훨씬 무거운 무기라는 걸 그녀는 정확히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침묵이 오히려 더 큰 효과를 냈다. 사절들 사이에서 다시 수군거림이 번졌고, 부채로 입을 가린 여인들이 서로 귀를 맞대며 뭔가를 속삭였으며, 누군가는 이미 결함이 있는 신부라는 표현을 조심스럽게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결함 있는 신부. 그 말이 대전 안을 떠돌기 시작한 순간, 도윤서는 자신이 앞으로 무엇을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지를 직감했을 것이다. 베일 아래로 감춰진 얼굴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누구도 볼 수 없었으나, 꽉 쥐어진 두 손끝이 하얗게 변해가는 것만은 도상현 경의 시야에 똑똑히 들어왔다.
다음 날 왕궁 소식지에는 이렇게 적혔다.
《루한국 왕태자, 결함 있는 약혼녀와의 혼약을 끝내 파기하다. 다온국 명가의 자제가 지닌 것으로 알려진 흠결이 마침내 드러났으며, 이는 양국 간 신뢰 문제로까지 번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 문장을 나중에 전해 들은 도윤서는, 자신이 어떤 흠결을 지녔는지조차 정확히 설명되지 않은 기사를 앞에 두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종이 위에 인쇄된 활자들은 무엇 하나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으면서도, 읽는 이의 상상 속에서는 온갖 흠결로 채워질 여백을 남겨두고 있었다. 그 여백이야말로 가장 잔인한 형벌이라는 것을, 도윤서는 그제야 깨달았다. 명예. 그것을 되찾는다는 게 이제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될지, 그녀는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다. 2년을 준비해온 것은 혼례가 아니라 어쩌면 이 순간, 이 몰락을 위한 것이었을까.
이서준은 하연주의 조롱이 계속되는 걸 보며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명치까지 차오르는 걸 느꼈다. 이 여인은 지금 남의 굴욕 위에 자신의 지위를 확인하고 있었고, 그것이 이서준에게는 낯설지 않은 풍경이었다. 자신도 파혼을 겪을 때마다 누군가의 뒷말과 소문 속에서 존재를 확인당해왔기 때문이었다. 사교계라는 곳은 늘 그런 식이었다. 누군가의 상처가 벌어져야 다른 이들의 안도가 시작되는 곳. 그 안도를 얻기 위해 사람들은 상처를 벌리는 손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만하시지요." 이서준이 말했다.
하연주가 그를 힐끗 보며 웃었다. "설곰 왕자님까지 나서시네요. 오늘 아주 다들 바쁘시네."
그 별칭이 자신의 입이 아닌 남의 입에서, 이토록 가벼운 조롱으로 나오는 걸 들으며 이서준은 얼굴이 굳는 걸 느꼈다. 언젠가부터 자신을 따라다니던 그 별칭이, 정작 지금 이 순간 얼마나 하찮게 다뤄질 수 있는지를 그는 처음으로 실감했다. 그러나 그는 그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다만 도윤서 쪽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섰다. 누군가는 옆에 서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걸, 그는 자신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 순간, 대전 상석에서 정소혜 왕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움직임 하나에 병사들의 창끝이 잠시 흔들렸는데, 청연국 왕비가 무슨 말을 할지 모두가 숨죽여 기다리는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왕비의 입가에는 뜻을 알 수 없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 미소가 무엇을 뜻하는지, 대전 안의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