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루한국의 겨울은 유난히 길어서, 왕궁 정원의 눈은 봄이 오기 전까지 결코 녹지 않는다는 말이 사람들 사이에 오래전부터 떠돌았다. 그 말을 증명하듯 그해 혼약식이 열리던 날 아침에도 대전 앞뜰에는 무릎 높이까지 눈이 쌓여 있었고, 처마 끝에 매달린 고드름은 아침 햇살을 받아 날카로운 빛을 뿜어냈다. 각국에서 모인 사절들은 두꺼운 외투 자락을 여미며 대전 안으로 몰려들었는데, 대전 안은 밖보다는 따뜻했으나 벽을 따라 늘어선 화로의 불빛조차 그날의 냉기를 완전히 몰아내지는 못했다. 그 틈에 섞여 구석 기둥 옆에 홀로 서 있던 사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청연국의 삼왕자 이서준이었다.
이서준, 스물다섯, 미혼. 그 이름 뒤에는 언제나 '설곰'이라는 별칭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는데, 눈밭에서도 굴하지 않는 곰처럼 거칠고 우람한 체격과 무뚝뚝한 얼굴선 때문에 붙은 이름이었다. 그러나 그 이름이 붙은 뒤로 그에게 들어온 혼담은 하나같이 파혼으로 끝났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처음 혼담이 깨졌을 때는 상대 가문의 변덕이라 여겼고, 두 번째는 사주가 맞지 않는다는 핑계였으며, 나중에는 아예 이유조차 듣지 못한 채 파혼 통지서만 받아들었다. 어느 사교계 소식지는 그를 두고 '청연국이 자랑하는 용맹한 왕자, 다만 인연에는 서투른 듯하다'는 식으로 은근히 비꼬는 문장을 실었는데, 이서준은 그 기사를 읽고 웃지도 화내지도 않았다. 그저 종잇조각을 접어 벽난로에 던져 넣었을 뿐이었다. 곰. 사람들은 그를 그렇게 불렀고, 그는 그 말을 부정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부정한다고 달라질 것이 없다는 사실을 몸으로 익혔기 때문이었다.
이서준은 오늘도 그 자리에서 침묵을 지켰다. 이번 혼약식은 자신과는 무관한 자리였으므로, 그저 어머니인 청연국 왕비 정소혜의 곁을 지키며 국제 의례에 참석한 것뿐이었다. 정소혜는 아들 곁에서 연회복 자락을 매만지며 낮게 말했다. "표정 좀 풀어라, 서준아. 여기 온 사람들 중 절반은 네 얼굴을 살피고 있을 거다." 이서준은 대답 없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을 뿐, 시선은 여전히 대전 중앙을 향해 있었다.
대전 중앙에는 루한국 왕태자 강주헌과 그의 정식 약혼녀 도윤서가 나란히 섰다. 도윤서는 다온국 왕가와 연결된 고귀한 신분으로 지난 2년간 왕태자비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아온 여인이었고, 오늘은 흰 예복 위에 얇은 백색 베일을 두른 채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있었다. 그 침묵이 다온국 여인들의 고전적인 예법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알았고, 모르는 사람은 그저 순종적인 신부라 여겼다. 다온국에서는 혼약의 서약을 나누는 순간까지 신부가 먼저 입을 열지 않는 것이 오랜 관례였으나, 루한국 궁정에서는 그 관례를 두고 뒤에서 수군거리는 자들도 없지 않았다. 얼마나 답답한 여자일까, 얼마나 자기 목소리가 없는 여자일까 하는 식의 뒷말이었다.
이서준은 그 여인을 바라보며 문득 이상한 동질감을 느꼈다. 자신도 늘 저렇게 시선을 견디는 쪽이었기 때문이었다. 파혼 통지서를 받아들 때마다 사람들은 그를 향해 묘한 눈빛을 던졌는데, 동정인지 비웃음인지 구분이 안 되는 그 눈빛을 견디는 법을 그는 오래전에 배웠다. 다만 자신은 파혼 서류 한 장으로 조용히 버려졌고, 저 여인은 수백 개의 눈 앞에서 무언가를 통과하고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견딤의 무게가 저 여인 쪽이 훨씬 무겁겠구나, 하고 이서준은 생각했다.
혼약식이 절정에 이르러 두 사람이 서약의 잔을 나눌 차례가 되었을 때, 대전 안의 공기는 잠시 얇게 팽창하는 듯했다. 시종이 은잔에 붉은 술을 채워 두 사람 앞에 올렸고, 사절들은 저마다 숨을 고르며 그 순간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강주헌이 갑자기 잔을 내려놓았다. 잔이 탁자에 부딪히며 낮은 소리를 냈고, 대전 안이 순간 조용해졌는데, 그 정적을 깬 것은 왕태자 자신의 목소리였다.
"이 혼인, 못 하겠습니다."
강주헌이 말하며 도윤서를 향해 시선을 던졌는데, 그 눈빛에는 경멸이 섞여 있었다. 그는 자기도취적인 인물이었고 신분 서열이라는 개념보다 자신의 기분을 앞세우는 데 익숙했으므로, 이 자리가 얼마나 많은 눈이 지켜보는 국제적 의례인지는 애초에 안중에도 없었다. 사절들 몇몇은 옆 사람과 눈짓을 주고받았고, 누군가는 낮게 헛기침을 했다.
"베일을 벗어보시오." 강주헌이 명령했다. "다들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2년간 무엇과 혼인하기로 되어 있었는지를 말입니다."
그 말에 사절들 사이에서 낮은 탄식이 흘렀고, 도윤서는 몸을 미세하게 떨었으나 베일을 벗지도, 항변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견디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 견딤의 방식이 이서준의 눈에는 낯설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시선을 그렇게 견뎌왔을까. 이서준은 자신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강주헌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말해보시오. 왜 침묵하는 겁니까? 혹시 부끄러운 게 있어서 그런 건 아니겠지요."
그 순간 대전 문 쪽에서 병사들의 창끝이 부딪는 소리가 낮게 울렸는데, 아직은 누구도 그것이 무엇을 예고하는지 알지 못했다. 화로의 불빛이 흔들렸고, 벽에 걸린 촛대의 그림자가 대전 바닥에 길게 늘어졌다.
도상현 경이, 도윤서의 아버지이자 다온국 왕가 방계 가문 출신인 그가, 딸의 곁으로 한 걸음 다가서며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왕태자 전하, 이는 양국 간의 정식 서약입니다. 자리를 봐가며 말씀하시지요."
"자리를 봐가며?" 강주헌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가 대전의 높은 천장에 부딪혀 이상하게 울렸다. "제가 지금 이 자리를 안 보고 말하는 것 같습니까, 도상현 경. 저는 오히려 이 자리를 아주 정확히 보고 있는데요."
도상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딸의 팔을 붙잡으려 손을 뻗었으나, 그 손이 닿기도 전에 강주헌이 먼저 움직였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주헌은 도윤서의 베일 끝을 손끝으로 잡아 들어 올렸다.
이서준은 그 손이 베일에 닿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기둥에서 등을 떼고 있었다. 저것이 무엇인지, 왜 자신의 몸이 먼저 반응했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으나, 발은 이미 대전 중앙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