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겨울 궁의 대전은 원래 혼례를 축하하는 자리에 어울리지 않게 서늘했다. 루한국의 왕실 예법에 따르면 혼례식은 정오의 햇빛이 대전 창을 넘어 신부의 발끝에 닿는 순간에 시작되어야 했으나, 오늘의 해는 구름에 가려 그 빛을 대전 안까지 밀어넣지 못했고, 그 탓인지 시종들이 급히 밝혀 놓은 수십 개의 촛불이 유난히 흔들리며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 그림자들 사이로 이서준의 발소리가 대전 바닥을 울린 순간, 강주헌의 손끝이 베일에서 멈췄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방향을 틀었는데, 지금까지 구석에서 존재를 지우고 있던 청연국의 삼왕자가 성큼성큼 걸어 나오는 광경을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이서준은 이 자리에 초대받은 손님이라기보다 어머니의 뒤를 따라온 그림자에 가까운 존재였다. 각국 사절단이 늘어선 줄의 맨 끝, 창가에 가까운 자리에서 그는 반나절 내내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그 조용함이 오히려 사람들의 관심에서 그를 지워주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갑자기 대전 한복판으로 걸어 나왔으니, 놀라움은 당연한 것이었다.
"손 치우십시오." 이서준이 말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낮음이 오히려 대전 전체를 울렸다.
강주헌이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돌아보았다. 루한국의 왕태자로 알려진 그는 훤칠한 체격과 화려한 예복으로 대전 안에서 단연 눈에 띄는 인물이었는데, 그 화려함이 오히려 그의 성정을 감추는 데는 실패하고 있었다. "청연국의 삼왕자셨습니까. 이건 루한국의 내부 사정입니다. 끼어들 자리가 아닌 것 같은데요."
"내부 사정이라 하기엔," 이서준이 대전을 둘러보며 말했다. "보는 눈이 너무 많군요."
그가 눈짓으로 가리킨 것은 벽을 따라 늘어선 각국의 사절들이었다. 청연국뿐 아니라 서쪽의 강국들과 남쪽의 소국들까지, 오늘 이 자리에 초청받은 이유는 단 하나, 도윤서와 강주헌의 혼례가 두 나라의 오랜 동맹을 확인하는 상징적 사건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상징의 한복판에서 신랑이 신부의 얼굴을 가린 베일을 함부로 걷어내려 한다면, 그것이 어찌 내부 사정으로 그칠 수 있겠는가.
그 말에 몇몇 사절들이 나직이 웃음을 삼켰는데, 그것이 강주헌의 자존심을 건드렸다는 걸 알아차린 사람은 이서준 자신뿐이었을 것이다. 왜 자신이 이 자리에 나섰는지, 이서준은 그 순간에도 명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다만 오랫동안 삼켜온 무언가가 목구멍을 밀고 올라왔고, 그것을 더는 누르고 있을 수 없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손이 떨렸다. 수년간 파혼 통지서를 받으면서도 단 한 번 항변하지 않았던 그였으므로, 지금 이 낯선 감각이 분노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스스로도 헷갈렸다. 파혼 통지서란, 이서준에게는 이제 익숙한 종잇장이었다. 첫 번째는 열일곱 살 때, 두 번째는 열아홉 살 때, 세 번째는 작년 겨울이었는데, 그때마다 상대국은 정중한 문장으로 사정을 설명했으나 결국 요지는 하나였다. 삼왕자는 왕위 계승권이 없으니 혼인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것. 그는 그 문장을 읽을 때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것이 왕실이 요구하는 침묵이라는 걸 알았기에 그저 삼켰을 뿐이었다. 다만 저 여인이 베일 뒤에서 견디고 있는 침묵이, 자신이 서류 뒤에서 견뎌온 침묵과 겹쳐 보였다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이서준 왕자." 강주헌이 팔짱을 끼며 비웃듯 말했다. "소문으로 듣기로는 혼담이 매번 깨진다고 하던데, 오늘은 남의 혼담까지 깨보시려는 겁니까?"
그 말에 대전 안이 순간 얼어붙었다. 누군가는 숨을 삼켰고, 누군가는 시선을 피했다. 대전 뒤쪽에 선 어느 사절은 손에 든 부채를 저도 모르게 접었고,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릴 만큼 정적이 깊었다. 이서준은 얼굴이 창백해지는 걸 느꼈으나, 그것을 감정으로 명명하기보다 먼저 등 뒤에 선 어머니, 청연국 왕비 정소혜의 시선을 의식했다. 왕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그 침묵이 오히려 아들을 지지하고 있다는 걸 이서준은 알 수 있었다. 어머니는 늘 그런 식이었다. 말로 편들지 않으면서도, 아들이 물러설 자리를 만들어주지 않는 방식으로 곁을 지켰다.
"제 혼담이 몇 번 깨졌는지가," 이서준이 말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중요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그럼 뭐가 중요한데요?" 강주헌이 되물었다. 그의 입가에는 여전히 웃음이 걸려 있었는데, 그것은 상대를 깔보는 자의 여유라기보다, 상황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자의 무지에 가까웠다.
"약속을 지키는 것." 이서준이 답했다. 짧고 단정한 문장이었다.
강주헌의 표정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베일을 걷어내겠다는 것은 그에게 단순한 확인 절차였을 뿐인데,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것을 다른 시선으로 보고 있다는 걸 그제야 깨달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 깨달음은 뉘우침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턱을 치켜들며 손끝을 다시 베일 쪽으로 가져갔다.
그 순간 대전 뒤편 문이 요란하게 열리며 다온국 사절단이 데려온 호위 병사들이 검을 뽑아 든 채 뛰어 들어왔고, 그것을 본 루한국 근위대 역시 즉각 창을 세워 대응 자세를 취했다. 각국 사절들이 자리에서 물러서며 비명 같은 탄식을 흘렸고, 대전은 순식간에 예식장이 아니라 대치의 현장으로 뒤바뀌었다. 누군가는 넘어졌고, 누군가는 부축하려다 함께 휘청거렸으며, 화려하게 꾸며진 대전 바닥 위로 흩어진 꽃잎들이 병사들의 발에 짓밟혔다.
"물러서십시오!" 도상현 경이 다온국 병사들을 향해 외쳤으나, 이미 양측의 무기가 서로를 향해 겨눠진 뒤였다. 창끝에 반사된 촛불빛이 대전 바닥에 어지럽게 흔들렸는데, 그 흔들림이 지금 이 자리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졌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도상현은 다온국의 사절로서 수년간 이런 자리를 겪어왔으나, 오늘 같은 순간은 처음이었다. 혼례식이 국경 분쟁의 축소판으로 변하는 광경을, 그는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강주헌은 이 상황을 즐기는 듯한 표정을 지었는데, 자신이 얼마나 큰 위기를 촉발했는지 여전히 실감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그것이 그의 성정이었다. 남의 자리를 자기 기분으로 부수고도, 그 부서진 자리가 국제적 사건이 될 수 있다는 걸 마지막까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그는 이 대치조차 자신을 향한 존경의 표시인 양 여기는 듯, 병사들 사이에서 여유롭게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이서준은 병사들 사이에서 여전히 미동도 없이 서 있는 도윤서를 보았다. 그녀는 이 모든 소란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정작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베일 아래로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오르내리는 것이 보였는데, 그것이 두려움 때문인지 억눌린 다른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침묵이 이서준의 눈에는 두려움보다 더 깊은 무엇으로 보였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모두 무기를 내리시오!" 정소혜 왕비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대전에 울려 퍼졌다. 왕비의 음성은 크지 않았으나 대전의 정적을 뚫고 모든 병사들의 귀에 닿을 만큼 또렷했다. 그러나 그 명령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창들 사이 어디선가 낮은 웃음소리가 섞여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