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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서아에게 먼저 다가간 건, 도서관 자료실에서였다. 늦은 오후였다. 창가 쪽 테이블에 그녀가 혼자 앉아 있었다. 흉작 대비 시나리오 자료가 책상 위에 산처럼 쌓여 있었고, 그 옆에 놓인 필기 노트에는 같은 수식을 몇 번이나 지웠다가 다시 쓴 흔적이 남아 있었다. 표정이 지쳐 보였다. 펜을 쥔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저 상태로 밤새겠네.' 나는 잠시 그 광경을 지켜봤다. 서아는 종이에 코를 박은 채 몇 번이나 같은 계산을 반복하고 있었다. 틀린 걸 알아채지도 못한 채로. 나는 그 옆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세율 산정표, 그거 낡은 방식 쓰고 있네요.' 서아가 놀란 얼굴로 나를 봤다. 펜이 손에서 미끄러질 뻔했다. '아, 선하은…님?' 호칭을 어떻게 붙여야 할지 몰라 잠깐 머뭇거리는 게 눈에 보였다. 백작가 영애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그런 고민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하은이라고 불러도 돼요.' 나는 그녀 앞에 놓인 노트를 슬쩍 끌어당겼다. 종이를 눌러 펴고, 그녀가 지운 자리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 부분, 이렇게 계산하면 시간이 반으로 줄어요.' 나는 종이 위에 새로운 산식을 적어 보였다. 숫자를 채워 넣고 화살표로 순서를 표시했다. 서아는 그걸 뚫어지게 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거… 저번에 저 발표할 때 지적하신 거랑 비슷한 방식인가요?' '맞아요. 그때 틀렸다고 한 부분 고치면 이렇게 돼요.' 그녀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아마 그날 강의실에서의 일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강의실 전체가 조용해졌던, 그 순간을. '그때는 죄송했어요.' 그녀가 먼저 말했다. 목소리가 작아졌다. '제가 준비가 부족해서… 다들 보는 앞에서 그렇게 지적하신 게, 사실은 맞는 말씀이었는데도 좀…' '죄송할 일 아니에요.' 나는 짧게 답했다. 서아가 눈을 들어 나를 봤다. '지적한 건 맞으니까 그런 거고, 지금 도와주는 것도 맞으니까 그런 거예요. 둘 다 그냥 사실을 말한 거예요.' 서아가 잠시 나를 바라봤다. 뭔가 예상 밖의 반응을 마주한 얼굴이었다. 아마 이런 식의 화법을 처음 겪는 모양이었다. 사과도 위로도 아닌, 그냥 사실만 나열하는 방식. '왜 도와주시는 거예요?' 그녀가 물었다. 목소리에 경계심이 살짝 섞여 있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나는 태윤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고, 그녀는 그 관계 사이에 갑자기 끼어든 입장이었으니까. 서아 입장에서는 내가 우호적으로 나올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나는 잠깐 고민했다. '당신이 태윤의 관심을 끌고 있어서 신경이 쓰인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건 사실이지만,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종류의 사실은 아니었다. '가문을 살리려는 사람이 자료 정리 하나 때문에 시간 낭비하는 게 아까워서요.' 나는 그렇게 말했다. 반은 진짜였고, 반은 만들어낸 이유였다. 그럴듯하게 들리길 바랐다. 서아가 조금 놀란 눈으로 나를 봤다. '그걸 어떻게 아세요?' '소문 다 났어요, 이 학과에서.' 정확히는 이 학교 전체에. 백작가가 흉작으로 흔들리고 있고, 그 집 딸이 아카데미에서 뭔가라도 배워 가려고 한다는 이야기는 이미 사교계 소식지에도 몇 줄 실렸을 정도였다.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이에요. 저희 가문, 지금 많이 힘들어요. 제가 여기서 뭐라도 배워서 돌아가지 않으면…' 말을 끝맺지 못했다. 손끝이 노트 모서리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나는 굳이 뒷말을 캐묻지 않았다. 캐물어서 좋을 게 없는 이야기였다. '일단 이 산정표부터 정리해요.' 나는 화제를 돌렸다. '이거 못 하면 다음 실습 조 배정에서 또 낮은 점수 받을 거예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노트를 붙잡았다. 펜을 고쳐 쥐는 손에 아까보다 힘이 덜 들어가 있었다. 그날 우리는 두 시간 동안 자료실에 남아 산정표를 다시 짰다. 서아는 이해가 빠른 편이었다. 몇 번 설명해주면 스스로 적용할 줄 알았고, 틀린 부분을 짚어주면 곧바로 고쳤다. 세 번째 예제쯤에서는 오히려 내가 놓친 조건을 먼저 짚어내기도 했다. '이 경우엔 예외 조항 적용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나는 잠깐 그녀가 짚은 부분을 다시 봤다. '…맞아요. 잘 봤네요.' 서아가 살짝 웃었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강의실에서 봤던 굳은 얼굴과는 다른, 자연스러운 웃음이었다. '가르치는 거 잘하시네요.' '그런 소리 자주 들어요.' 해가 저물고 자료실 조명이 하나씩 켜질 때쯤, 산정표는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 서아는 노트를 정리하며 몇 번이나 고맙다는 말을 반복했다. 헤어질 무렵,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또 도와주실 수 있어요?' 나는 짧게 답했다. '시간 되면요.' 서아의 얼굴에 안심하는 기색이 번졌다. 그녀는 자료를 챙겨 자리를 떴다. 나는 잠시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 밤바람이 차가웠다. 나는 걸으면서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게 정말 위기에 대비한 신뢰의 실마리일까, 아니면 그냥 마음이 약해진 걸까.' 산정표를 짜준 건 순수하게 실용적인 이유였다고 스스로를 설득해봤지만, 서아의 웃는 얼굴이 자꾸 떠오르는 걸 보면 완전히 계산적인 행동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했다. '뭐, 어느 쪽이든 상관없나.' 답을 찾지 못한 채 방문을 열었을 때, 책상 위에 낯선 편지 하나가 놓여 있었다. 반듯하게 각이 잡힌 봉투, 그 위에 선명하게 찍힌 인장. 선씨 백작가의 문양이었다. '이 시간에 이게 왜 여기 있지?' 기숙사 관리인이 두고 갔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급하게 보낼 만한 용건이 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최근에 집안에서 별다른 소식을 들은 적이 없었으니까. 나는 봉투를 들어 뒤집었다. 봉인은 아직 뜯기지 않은 상태였다. 급하게 봉해서 보낸 듯, 밀랍이 조금 삐뚤게 눌려 있었다. 봉투를 열자마자, 나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첫 줄에 적힌 문장이, 지금까지의 모든 고민을 순식간에 뒤로 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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