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완벽해서, 버려졌다

2화

윤서아라는 이름을 실제로 마주한 건 그로부터 사흘 뒤, 영지경영학과 오리엔테이션 시간이었다. 영지경영학과는 원래 여학생이 거의 없는 과였다. 재정, 세무, 노동력 배분, 흉작 대비 시나리오 설계 같은 것들을 배우는 과인데, 대부분의 귀족가에서는 이런 실무를 아들에게만 가르쳤다. 여자가 이 학과에 들어오는 경우는 나처럼 가문 후계 서열이 애매한 경우, 혹은 아버지가 유별난 경우뿐이었다. '그것도 아니면 오늘 같은 경우겠지.' 나는 강당에 앉아서 그렇게 생각했다. 이번에 편입한 서아는 둘 다 아니었다. 그녀는 몰락 위기에 놓인 윤씨 남작가의 적녀였다. 소문에 따르면 그녀의 아버지는 이미 재정 관리 능력을 잃었고, 가문을 살릴 사람이 그녀 하나뿐이라고 했다. 소문이란 게 늘 부풀려지기 마련이지만, 이번엔 그마저도 부족했던 모양이다. 오리엔테이션 시작 전, 옆에 앉은 동기가 소곤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윤 남작가, 올해 안에 영지 절반을 팔아야 할지도 모른대.' '그 정도야?' '응. 그래서 딸을 여기 보낸 거지. 뭐라도 배워서 살려보라고.'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앞줄을 봤다. 아직 그녀는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오리엔테이션 강당에서 그녀를 처음 봤을 때, 나는 조금 놀랐다. 화려한 사교계 인맥도 없고, 특별히 눈에 띄는 장신구도 없었다. 옷차림은 단정했지만 유행이 지난 재단이었다. 체구는 작았고, 앉은 자세는 지나치게 곧았다. 마치 뭔가를 증명하려고 애쓰는 사람처럼. '저 자세, 오래 못 갈 텐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등을 저렇게 펴고 두 시간짜리 오리엔테이션을 버티는 건 보통 사람에겐 무리였다. 나도 처음 입학했을 때 그랬다가 셋째 시간쯤 목이 뻐근해서 고개를 못 돌렸던 기억이 있었다. 그녀의 옆자리에는, 놀랍지도 않게, 강태윤이 앉아 있었다. '저기 자리 있어?' 그가 서아에게 물었을 때, 그녀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저으며 자리를 내줬다. 그다음부터 두 사람은 낮은 목소리로 뭔가 이야기를 나눴다. 태윤이 그녀에게 학과 교재의 어느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어주는 모습이 보였다. 교재는 재정학 개론이었다. 나도 아는 부분이었다. 세율 계산 공식이 나오는 3장, 대부분의 신입생들이 처음 막히는 구간. '나도 저기서 막혔었지.' 그때 나를 도와준 건 누구였더라.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아마 혼자 풀었던 것 같다. 나는 그 광경을 세 자리 건너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이상할 게 없다.' 나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했다. 태윤은 원래 새로 온 사람을 잘 챙기는 성격이었다. 나한테도 처음 만났을 때 그랬으니까. 여덟 살 때, 정원에서 넘어져 울고 있던 나에게 손수건을 건넨 것도 그였다. 그러니 이건 그저 그의 원래 성격이 발현된 것일 뿐이었다. '그래, 그거면 됐다.' 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강단에서는 학과장이 뭔가 설명하고 있었다. 올해 실습 과제가 예년보다 어려워졌다는 이야기였던 것 같은데, 정확히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이상하게 그 순간부터 강의 내용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결론을 내렸는데도,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강당을 나서면서 나는 이상하게 발걸음이 느려졌다. 강당을 나서는 학생들의 무리 속에서 나는 일부러 걸음을 늦췄다. 왜인지는 몰랐다. 그저 뭔가를 조금 더 지켜보고 싶었던 것 같다. '하은.' 태윤이 나를 불렀다. 그는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서아는 이미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그 뒷모습을 잠깐 눈으로 좇았다. 작은 체구가 사람들 사이로 금세 섞여 들어갔다. '단장 못 됐다고 들었어.' 그가 말했다. 표정은 걱정스러웠지만, 목소리는 담담했다. '알아.' 나는 짧게 답했다. '속상해?' '아니.' '진짜?' '응.' 나는 걸음을 옮기며 대답했다. 사실 속상했다. 하지만 그에게 그걸 말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늘 이런 식으로 그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너 표정 보면 딱 속상한 얼굴인데.' '그럼 표정을 못 읽는 거고.' '음, 그, 그러니까...' 그는 잠시 말을 고르는 듯 머뭇거렸다. '나는 그냥, 네가 힘들면 말해줬으면 해서.' '힘들면 말할게.' '진짜지?' '응.' 나는 대답하면서도 이게 벌써 몇 번째 같은 대화인지 세어봤다. 세 번은 넘은 것 같았다. '그럼 다행이네.' 그가 안도하는 얼굴로 웃었다. '너는 항상 이런 거 신경 안 쓰잖아. 그게 대단한 거야.'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신경 안 쓰는 게' 아니라 '신경 써도 티를 안 내는 것'이었다. 그 둘은 완전히 다른 건데, 그는 늘 앞쪽으로 이해했다. '그럼 그거대로 대단한 거 아니야?' 그가 다시 웃으며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참, 서아 말이야.' 그가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 '재정학 3장 진도가 좀 느리더라고. 남작가 사정 때문에 예습을 제대로 못 한 것 같아서.' '그래서 도와줬어?' '응. 뭐, 별건 아니고.' 별건 아니라는 그의 말투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그게 더 마음에 걸렸다. 원래 그는 이런 걸 별거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나한테도 그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랬다. '가문 사정이 그렇게 어렵대?' 나는 별생각 없이 물었다. '응. 남작이 세금 계산을 잘못해서 몇 년째 손해를 보고 있다더라. 그거 정리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나 봐.' '너희 집이랑은 관계없는 가문 아니야?' '관계없지. 그냥 안타까워서.' 안타까워서, 라는 말도 그다웠다. 강태윤은 늘 그랬다. 누가 어려움에 처해 있으면 못 본 척을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게 그의 장점이었고, 동시에 지금 이 순간 내가 이유 없이 신경 쓰이는 부분이었다. 그날 이후로 서아는 학과 안에서 조금씩 존재감을 넓혀갔다. 실습 조 배정에서, 도서관 자료실에서, 심지어 학생 식당 줄에서도 그녀의 이름이 들렸다. 몰락한 남작가의 딸이 청명 아카데미 영지경영학과에서 살아남으려 한다는 이야기는, 생각보다 사람들의 관심을 쉽게 끌었다. 도서관에서 그녀를 몇 번 마주쳤다. 늘 혼자 책을 펼쳐놓고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필기체가 작고 촘촘했다. 종이를 아끼려는 것처럼 여백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한번은 그녀가 빌려 간 책이 내가 찾던 자료였다. 사서에게 물어보니 이미 대출 중이라고 했다. '다음 주에 반납 예정입니다.' 사서가 말했다. 나는 별말 없이 알겠다고 하고 돌아섰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책의 반납일이 자꾸 신경 쓰였다. 서아가 그 책을 얼마나 오래 붙잡고 있을지, 왜 그런 걸 궁금해하는지 나 스스로도 잘 몰랐다. 그리고 그 관심의 중심에는, 언제나 그녀 곁을 지키는 강태윤이 있었다. 실습 조 배정표가 붙은 날, 나는 게시판 앞에서 내 이름을 찾다가 우연히 그의 이름과 서아의 이름이 같은 조에 묶여 있는 걸 봤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이번 학기 들어 벌써 세 번째였다. '또 같은 조네.' 옆에서 누군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말을 못 들은 척하며 내 이름이 적힌 칸으로 시선을 옮겼다. 다른 조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왜 그 당연한 사실이 이렇게 무겁게 느껴지는지, 나는 스스로에게 설명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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