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그 뒤로 며칠 동안, 나는 겉으로는 평소와 다름없이 지냈다.
수업에 빠지지 않았고, 과제는 늘 기한보다 이틀 먼저 냈다. 실습 조 회의에서는 여전히 가장 정확한 지적을 했다. 토양 배수율 데이터를 다시 계산해서 제출했을 때, 담당 교수는 "역시 하은이군" 하고 짧게 웃었다. 나는 그 말에 웃어 보였다. 아무도 내가 흔들리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밤이 되면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인정할 필요는 없다.' 나는 침대에 누워 그렇게 되풀이했다. 태윤이 서아에게 갖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나는 정확한 이름을 붙이지 않기로 했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게 사실이 되어버릴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다음 순간엔 곧바로 스스로 그 논리를 비웃었다. '이름을 안 붙인다고 해서 사실이 안 되는 건 아니잖아.' 나는 실무적인 사람이었다. 실습 계획서를 짤 때도, 흉작 대비 시나리오를 만들 때도, 나는 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대응책을 짰다. 그런데 이 문제에서는, 나 스스로도 놀랄 만큼 그 원칙을 지키지 못하고 있었다.
천장을 보면서 나는 몇 번이나 같은 질문을 되풀이했다. '그래서 뭐가 문제인데.' 문제는 없었다.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그런데 왜 자꾸 명치가 답답한지, 그 이유만은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
어느 날 저녁, 기숙사 복도에서 리에나와 마주쳤다.
복도는 저녁 점호를 앞두고 유난히 조용했다. 창밖으로 노을이 다 져서, 형광등 불빛만 복도 바닥에 길게 늘어져 있었다.
'하은, 요즘 좀 피곤해 보여.' 그녀가 물었다.
'그냥 과제가 많아서.'
'진짜 그거뿐이야?'
'응.'
'어제도 강의실에서 넋 놓고 있던데.'
'그냥 계산이 안 풀려서 그랬어.'
리에나는 나를 잠시 빤히 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태윤 선배랑 무슨 일 있어?'
'없어.'
'요즘 둘이 예전 같지 않은데.'
'그런 거 아니야.' 나는 세 번째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스스로도 이 대답이 얼마나 공허하게 들리는지 알고 있었다.
'그럼 서아랑은.' 리에나가 덧붙였다. 나는 대답 대신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그 짧은 침묵이 어떤 대답보다 더 많은 걸 말해준 것 같았다.
리에나는 더 파고들지 않고 조용히 화제를 돌렸다. '아, 내일 실습 조 편성표 나온대. 너 또 1조일걸.' 그게 오히려 고마웠다.
방에 돌아와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실습 보고서를 펼쳤다. 흉작 등급 분류표를 다시 손보는 중이었다. A등급은 강수량 편차 10퍼센트 이내, B등급은 20퍼센트 이내, 그 이상은 C등급으로 분류하고, 병해충 발생률이 5퍼센트를 넘으면 등급을 한 단계 낮춘다는 원칙이었다. 손에 익은 작업인데도 손이 자꾸 멈췄다. 머릿속에 자꾸 그 강의실 장면이 끼어들었다.
'그가 왜 그런 표정을 지었을까.' '그게 정말 보호욕뿐일까.' '만약 그게 아니라면, 나는 뭘 해야 하지.'
질문은 끝없이 이어졌지만 답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펜을 내려놓고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종이 위의 숫자들이 잠깐 흐릿하게 보였다.
나는 결국 보고서를 덮고 창밖을 봤다. 기숙사 창문 너머로 실습동 불빛이 하나둘 꺼지고 있었다. 그 불빛 중 하나가 서아의 방이라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 쓰게 됐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약한 사람에게 마음이 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는 스스로를 다시 설득하려 했다. '그렇다면 나는 뭘 해야 하는가.'
그 순간 떠오른 답이 너무 뻔해서, 나는 잠시 헛웃음이 나왔다.
강해지는 것.
하지만 나는 이미 강했다. 완벽했다. 시험에서도, 실습 평가에서도, 조 회의에서도 나는 늘 최상위였다. 그런데도 그 완벽함이 지금 이 상황에서는 아무 힘도 되지 못했다. 숫자로도, 등급으로도 환산되지 않는 문제였다.
그렇다면 방향이 틀린 거였다. 강해지는 게 아니라, 다른 접근이 필요했다.
나는 다시 책상에 앉아 이번엔 실습 보고서가 아니라 다른 종이를 꺼냈다. 펜을 쥔 손끝이 잠깐 떨렸다. 거기에 이름 하나를 적었다.
윤서아.
그 밑에 작은 메모를 덧붙였다. '재정 기초 자료 정리, 도와줄 것.'
스스로도 이해가 안 가는 결정이었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나는 그 쪽지를 접어 책상 서랍 안에 넣었다. 내일 아침, 이걸 정말 서아에게 건넬 수 있을까. 아니면 태윤이 먼저 이 쪽지를 보게 될까.
둘 중 어느 쪽이든, 나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곳으로 한 발 들여놓은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