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선유라의 방문 앞에 서는 순간,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했다. 문고리를 잡은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는데, 이게 긴장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내 몸이 스스로 위험을 감지하고 도망치라는 신호를 보내는 건지 구분이 안 됐다. 어쨌든 문을 열어야 했다. 여기서 도망칠 곳도 없거니와, 도망친다 한들 이 성 안에서 내가 갈 곳이 어디 있겠나. 나는 결국 문을 밀고 들어갔다.
선유라의 방은 예상보다 훨씬 단정했다. 벽에는 오래된 그림 몇 점이 걸려 있었고, 창가에는 두꺼운 커튼이 반쯤 걸려 있어 낮에도 방 안이 어둑했다. 흡혈귀의 방이라면 뭔가 좀 더 그로테스크하거나 으스스한 걸 기대했는데, 오히려 고급 서재 같은 느낌이라 김이 빠졌다. 이 여자, 취향이 은근히 고상하잖아.
그 어둠 속에 선유라는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는데, 내가 들어서자 고개를 들어 나를 응시했다. 그 붉은 눈동자와 다시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는 걸 느꼈다. 이게 진짜 무섭다는 감정인지, 다른 뭔가인지 스스로도 헷갈릴 지경이었다. 심장이 이렇게 요란하게 뛰는데 정작 다리는 도망치라는 명령을 안 듣고 있으니, 이거 몸이 고장 난 거 아닌가 싶었다.
"이리 오게." 선유라가 손짓했다. 나는 최대한 담담한 얼굴을 유지하며 다가갔지만, 속으로는 온갖 생각이 뒤엉키고 있었다. 여기서 대놓고 겁먹은 얼굴을 보이면 오히려 더 위험할 거라는 계산이 있었다. 강자 앞에서는 태연함이 최고의 방어라는 걸, 이상하게도 나는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전생에 이런 상황을 겪어본 적도 없는데 어디서 이런 생존 본능이 튀어나오는 건지, 이럴 때는 나 자신이 좀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책상 앞까지 다가가자 선유라가 책을 덮고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가까이서 보니 그녀의 피부는 지나치게 하얬고, 그 하얌이 마치 병색이 아니라 완전한 창백함, 즉 인간의 것이 아닌 무언가의 표식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신기한 건, 그 창백함이 흉하지 않고 오히려 이상하게 시선을 끈다는 거였다. 이거 위험한 신호인데, 나는 애써 눈을 돌렸다.
"저, 죄송하지만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나는 목소리를 최대한 차분하게 가라앉히며 입을 열었다. 선유라가 흥미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뭐지?"
"혈액을 제공하는 일이... 얼마나 자주 있는 건지, 그리고 그로 인해 몸에 무리가 가지는 않을지 알고 싶습니다." 나는 최대한 공손한 어투를 유지하며 물었지만, 속으로는 이거 무슨 헌혈 사전 문진표 작성하는 기분이잖아, 라는 냉소가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최소한의 처우 개선이라도 받아내야겠다는 계산도 함께 있었다. 노동자에게는 노동조건을 물어볼 권리가 있는 법이니까. 물론 이게 노동인지 착취인지는 별개의 문제였지만.
선유라는 잠시 나를 뜯어보다가 옅게 웃었다. 그 웃음이 어째서인지 서늘하면서도 묘하게 매력적이었다. "제법이구나. 팔려온 지 하루도 안 된 애가 협상을 시도하다니." 그녀의 목소리에는 비웃음보다는 흥미가 더 짙게 배어 있었다.
"협상이 아니라 그냥 궁금해서요." 나는 최대한 뻔뻔하게 대답했다. 위기 상황일수록 오히려 태연해야 한다는 게, 어느새 내 생존 원칙이 되어 있었다. 사실 속으로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이런 걸 물어보는 게 뭐 대수냐는 듯한 표정을 유지하려고 안면 근육에 있는 힘을 다 쏟아붓고 있었다.
"횟수는 내가 정한다. 그리고 몸에 무리가 가지 않게 조절하는 것도 내 일이다." 선유라는 짧게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다가오는 걸음걸이는 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는데, 그게 오히려 더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마치 바닥을 밟는 것조차 그녀에게는 선택 사항일 뿐이라는 듯한 걸음걸이였다. "대신 제안 하나를 해주지. 잘 견디면, 네 처지는 조금씩 나아질 거다."
"그 말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나는 예의를 갖춰 되물었지만 속으로는 이거 완전 갑을관계 협박 아닌가, 라는 생각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이런 말은 어느 시대, 어느 세계에서나 똑같구나. 착취하는 쪽은 늘 '견디면 나아질 거다'라고 말하지, 언제 나아질지는 절대 구체적으로 말 안 해주고.
"믿고 안 믿고는 네 사정이고." 선유라가 낮게 웃으며 내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차가운 손끝이 피부에 닿는 순간, 나는 온몸이 굳어버리는 걸 느꼈다. 손끝이 이렇게 차가운데 왜 이렇게 등줄기가 뜨거워지는지, 이건 정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각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거다."
그녀의 손가락이 내 턱에서 목덜미로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 순간 나는 숨을 참았다. 겉으로는 최대한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온갖 욕설이 뒤섞인 비명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도망쳐야 하나, 아니면 그냥 얌전히 있어야 하나, 이 짧은 순간에도 오만가지 생각이 스쳤다.
결국 처우 개선에 대한 명확한 약속은 얻어내지 못한 채, 나는 그날 처음으로 그녀에게 피를 내어줘야 했다. 목에 닿는 서늘한 감각과 뒤이어 오는 이상한 통증, 그리고 그 통증 사이로 스며드는 알 수 없는 감각을 나는 지금도 정확히 설명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아프면서도 이상하게 몸에 힘이 빠지는, 설명하기 힘든 감각이었다. 마치 몸속의 무언가가 서서히 빠져나가는데, 그게 고통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안도에 가까운 이상한 느낌이었다. 이거 정말 위험한 감각인데, 라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조차 몽롱하게 흐려졌다.
"오늘은 이 정도로 하지." 선유라가 입가를 닦으며 나를 놓아줬을 때, 나는 다리가 후들거리는 걸 느끼며 겨우 균형을 잡았다. 담판은 실패했지만, 적어도 목숨은 부지했다는 사실에 안도해야 하는 건지 아닌지 헷갈리는 기분이었다. 방을 나서기 전, 나는 마지막으로 선유라의 얼굴을 한 번 더 쳐다봤다. 그녀는 이미 다시 책상 앞에 앉아 책을 펼치고 있었다. 나 같은 건 이미 잊어버린 듯한 태도였는데, 그게 오히려 더 신경 쓰였다.
방을 나선 뒤, 나는 복도에서 어지러움에 잠시 벽에 손을 짚었다. 눈앞이 흐려지고 다리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이대로 쓰러지면 여기서 그냥 발견되는 건가, 그런 생각이 스치는 와중에 누군가 다가와 나를 부축했다. "괜찮아?" 낮고 겁먹은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려보니 내 방을 함께 쓰는 룸메이트, 나도연이었다. 나이는 나보다 한두 살 많아 보였는데, 눈빛은 오히려 나보다 더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괜찮아. 그냥 좀 어지러워서." 나는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나도연은 별말 없이 내 어깨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며 걸음을 맞춰줬다. 그 손길이 의외로 익숙했는데, 아마 그녀도 나와 비슷한 일을 몇 번이나 겪어본 모양이었다. 그 생각을 하니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졌다.
나도연은 나를 부축하며 방까지 데려다줬고, 그 과정에서 그녀가 아직도 가족을 그리워하며 밤마다 몰래 울고 있다는 걸, 나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복도를 걷는 내내 그녀는 별말이 없었지만, 문득 작은 목소리로 "처음엔 다 그래. 나도 처음엔 사흘 내내 어지러웠어."라고 중얼거렸다. 그 말투에는 위로도 아니고 동정도 아닌, 그냥 같은 처지의 사람이 건네는 담담한 사실 전달 같은 느낌이 있었다. 이 성 안에서 나만 힘든 게 아니라는 사실이, 이상하게 조금은 위안이 됐다.
방에 돌아와 침대에 누운 뒤, 나는 오늘 벌어진 일들을 하나씩 되짚었다. 처우 개선 담판은 실패했고, 첫 혈액 제공은 끝났으며, 앞으로도 이 일이 계속될 거라는 사실만 확인한 하루였다. 냉정하게 따지면 오늘 하루는 완전한 손해였다. 얻어낸 건 없고 잃은 건 피뿐이었으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서늘하고 위압적인 붉은 눈동자를 떠올릴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이상하게 떨렸다. 이건 위험한 신호였다. 강자에게, 그것도 나를 산 주인에게 마음이 흔들리는 건 절대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나는 애써 그 감정을 무시하려 했지만, 눈을 감아도 그 붉은 눈동자가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창밖으로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나도연은 이미 곁에서 조용히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고, 나는 그 숨소리를 들으며 앞으로의 일들을 다시 계획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성에서 살아남으려면 뭐가 필요한지, 선유라의 신뢰를 얻는 게 나을지 아니면 최대한 거리를 두는 게 나을지,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전략을 세워봤지만 어느 것도 확실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 계획을 세우기도 전에, 창밖 저 멀리, 성벽 너머 어두운 숲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이쪽을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 문득 스쳤다. 실체는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한 시선의 무게가 있었다. 마치 어둠 그 자체가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는 듯한, 설명할 수 없는 오싹함이었다. 나는 그 느낌을 애써 무시하며 눈을 감았지만, 그날 밤 내내 그 시선의 정체가 무엇일지에 대한 불안이 잠결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 시선이 선유라와 관련된 것인지, 아니면 전혀 다른 무언가인지, 나는 끝내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