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물통을 부엌에 내려놓고 나서야 나는 조금 숨을 돌릴 수 있었는데, 어제 회상을 하다 말고 잠들어서 그런지 오늘도 자꾸 두촌 시절의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이어지려 했다. 그래, 계속해보자. 어차피 설거지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잠깐의 여유가 있었으니까.
두촌에서 내가 처음으로 이 세계의 진짜 무서움을 접한 건, 아버지가 저녁상에서 흘리듯 던진 한마디 때문이었다. "들었냐, 성주가 또 아이 하나를 사갔다더라." 아버지의 목소리엔 특별한 감정이 없었는데, 그게 더 이상했다. 마치 날씨 얘기를 하듯 무덤덤한 말투로 아이를 사갔다는 소식을 전하는 게, 이 마을에서는 그리 놀랄 일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 성주가 그렇게 무서운 사람이여?" 나는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처럼 물었지만 속으로는 그 대답이 어떤 방향으로 나올지 이미 반쯤 예상하고 있었다. 이 세계에 온 지 몇 년이 지나며 주워들은 말들을 조합해보면, 성주라는 존재는 단순한 영주가 아니었다.
"사람이 아니여, 그것아." 옆집 할머니가 끼어들며 손사래를 쳤다. "흡혈귀랴. 밤마다 사람 피를 빨아 먹는다는디, 그 성에 팔려간 아그들은 다시 안 돌아온단다." 할머니의 목소리엔 진짜 두려움이 배어 있었고, 나는 그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흡혈귀. 이 세계에도 그런 게 존재한다는 걸 그제야 실감했다. 판타지 소설에서나 보던 존재가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라니, 이거 좀 너무 진지하게 무서운 설정 아닌가.
그 뒤로 나는 마을 어른들이 모이는 자리마다 슬쩍 끼어 앉아 성주에 대한 소문을 주워듣기 시작했다. 정보는 곧 생존이었다. 어차피 이 세계에서 살아가야 한다면, 가장 위험한 존재에 대해서는 최대한 많이 알아둬야 한다는 게 서른두 살 서은채의 직업병 같은 습관이었다.
소문을 정리하자면 이랬다. 성주 선유라는 백 년도 넘게 이 땅을 다스려온 흡혈귀였고, 겉모습은 젊은 여인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실제 나이는 가늠할 수 없었다. 성 안에는 항상 몇몇 사람이 시녀나 하인으로 팔려 들어갔는데, 그중 일부는 선유라의 피의 양식이 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물론 확인된 사실은 아니었지만, 마을에서는 그게 거의 정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문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인신매매 중개인으로 마을을 드나드는 곽만석이었다.
곽만석은 덩치가 크고 목소리가 걸걸한 중년의 남자였는데, 사람을 사고파는 일을 업으로 삼으면서도 이상하게 자기 상품, 즉 사람들에게는 기본적인 대우를 해주는 편이었다. 굶기지 않고, 매질도 최소한으로만 했으며, 이동 중에는 담요라도 하나씩 던져줬다. 나는 처음 그를 봤을 때 이 인간이 그나마 양심이 있는 편이구나, 라는 생각을 했는데 곧 그게 얼마나 낮은 기준의 안도감인지 자각하고 스스로 씁쓸해졌다.
"성에 팔려가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나는 곽만석에게 한 번 물어본 적이 있었다. 마을에 들어와 다른 아이를 사가는 걸 지켜보던 날이었다. 곽만석은 나를 힐끗 보고는 피식 웃었다.
"운이 좋으면 시녀로 살고, 운이 나쁘면 그 성주님 밥이 되는 거지." 그의 대답은 짧고 담백했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근데 그 성주님이 어디 밥을 함부로 잡아먹는 성격도 아녀. 까다로우신 분이라 사람 고르는 것도 시간이 걸린다드라."
"까다롭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나는 진짜 궁금해서 물었다. 곽만석은 어깨를 으쓱했다.
"몰라, 나도. 그냥 그 성에서 나온 사람들 말로는 그렇다드라고. 아무나 안 문다고." 그의 말투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게 그대로 드러났는데, 나는 그 무심함이 오히려 더 신빙성 있게 느껴졌다. 이 사람은 상품에 대한 소문에 진짜 관심이 없었고, 그저 사실을 사실대로 전달하는 중이었으니까.
그때까지 나는 그 정보를 그냥 흥미로운 괴담 정도로만 받아들였다. 설마 내가 그 성에 팔려갈 일이 있을까, 라는 안일한 생각도 있었다. 나는 그때 이미 결심한 게 있었으니까. 조용히, 눈에 띄지 않게, 가족들과 마을 안에서만 조심스럽게 살아가겠다는 계획. 전생 지식을 함부로 쓰지 않고, 그저 조금씩 도움이 될 만한 것들만 은근슬쩍 흘리면서.
하지만 계획이라는 건, 언제나 계획대로 되지 않는 법이었다. 특히 나 같은 성격에는.
그해 겨울, 마을에 유행병이 돌았다. 아이들 몇이 열병으로 죽어나갔고, 우리 집도 그 여파를 피할 수 없었다. 남동생이 먼저 열이 오르기 시작했고, 나는 그 조그만 몸이 펄펄 끓는 걸 보면서 서른두 살의 기억 속 위생 지식들을 총동원하기 시작했다. 물을 끓여 먹이고, 상처가 있는 아이들의 환부를 소금물로 씻어내고, 열이 심한 아이들에게는 찬 수건을 대주는 식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별거 아닌 상식이었는데, 이 세계 사람들에게는 그 상식이 통용되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어린것이 어디서 이런 걸 배운 거여?" 어머니가 놀란 얼굴로 물었을 때, 나는 그냥 어른들이 하는 말을 주워들었다고 얼버무렸다. 그리고 실제로 남동생의 열이 조금씩 내려가는 걸 보면서, 나는 처음으로 이 세계에서 뭔가를 해냈다는 뿌듯함을 느꼈다. 그 뿌듯함이 얼마나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될지, 그때는 짐작도 못 했다.
마을 사람들은 내가 열병에 걸린 아이들을 살렸다는 소문을 듣고 처음엔 고마워했다. 하지만 그 고마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며칠 뒤, 이웃집 아이가 내가 만들어준 소금물로 씻은 뒤에도 결국 죽었다는 소식이 퍼졌고, 사람들의 시선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원인과 결과를 냉정하게 따지지 않는 게 이 세계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라는 걸, 나는 그때 처음으로 뼈저리게 배웠다.
"저 아이가 뭔가를 알고 있는 게 이상하지 않어?" 누군가 그런 말을 흘리기 시작했을 때, 나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이건 좋은 조짐이 아니었다. 좋은 조짐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 흐름을 멈출 방법을 찾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