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혼약 파기를 거부한다는 뜻을 궁에 전한 지 나흘이 지났다.
그 나흘 동안, 궁에서는 아무 소식이 없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나는 오히려 그 고요함이 무섭다는 걸 깨달았다.
대신 소문만이 무성하게 번져갔다.
진안 공작가의 장녀가 파기를 거부했다는 소문, 왕태자가 그것에 분노했다는 소문, 한소이가 상심했다는 소문.
소문은 살이 붙을수록 자극적으로 변했다.
어느 날은, 내가 이헌에게 매달렸다는 소문으로 변해 있었다.
다른 날은, 내가 가문의 힘을 이용해 억지로 혼약을 이어가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또 다른 날은, 내가 한소이를 질투해 저주를 걸었다는 이야기까지 떠돌았다.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지만,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일수록 더 빠르게 옮겼다.
사교 모임에 나가면, 사람들의 시선이 예전과 달랐다.
동정과 비웃음이 섞인 시선이었다.
부채로 입을 가리고 소곤거리는 소리, 내가 지나가면 뚝 끊기는 대화.
그 침묵이 오히려 더 크게 들렸다.
"진 소저, 힘내세요."
누군가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 말투에는 미묘한 냉소가 섞여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저렇게 당당하시네."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내 얼굴이 무너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시선을 견디며, 겉으로는 평온한 얼굴을 유지했다.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다.
하지만 안에서는 무언가가 계속 갈라지고 있었다.
찻잔을 쥔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나만 알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나를 불렀다.
어머니는 서은과 함께 다과를 즐기고 있었다.
응접실 창으로 오후의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오고 있었고, 그 빛 속에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섞여 있었다.
내가 들어서자, 그 웃음소리가 잠시 멈췄다.
"서윤아, 이리 앉아라."
나는 자리에 앉았다.
찻잔에서 올라오는 김이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어머니는 나를 보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하지만 그 걱정은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이 일이 서은의 혼처에도 영향을 줄까 걱정이구나."
그 말에, 나는 잠시 숨이 막혔다.
"……무슨 말씀이세요?"
"네 혼약이 시끄럽게 파기되면, 서은의 혼처를 구할 때도 안 좋은 소문이 따라붙을까 봐 그런다."
어머니의 얼굴에는 진심으로 걱정이 담겨 있었다.
그 진심이, 오히려 더 아프게 다가왔다.
"요즘 다들 그 이야기만 하더구나. 서은에게 좋은 자리가 들어올 때마다, 상대 쪽에서 언니 이야기를 먼저 묻는다고 하니……"
어머니의 말이 이어질수록, 나는 점점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다만, 그 걱정의 방향이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나를 더 아프게 했다.
서은이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말했다.
"어머니, 그건 언니 잘못이 아니잖아요."
"누가 잘못이라 했느냐. 그냥 걱정된다는 게지."
어머니의 대답은 짧고 단호했다.
서은은 나를 위해 변명해주려 했지만, 그 말조차도 나를 더 작아지게 만들었다.
내가 원한 건 변명이 아니었다.
그냥, 단 한 번이라도, 내 이름이 먼저 걱정거리로 불리지 않는 것.
그것뿐이었는데.
나는 이 집에서, 늘 누군가의 걱정거리였다.
오빠의 성취를 넘어서지 못하는 걱정거리, 서은의 미래에 그림자를 드리울까 걱정되는 존재.
나 자신을 위한 존재로서, 나는 얼마나 존재했던가.
찻잔의 표면에 비친 내 얼굴이 유난히 낯설게 느껴졌다.
그 밤, 나는 방 안에 홀로 앉아 그 질문을 계속 되풀이했다.
'나는 뭘까. 이 집에서, 나는 대체 뭘까.'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을, 몇 번이고 다시 던졌다.
촛불이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창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오빠였다.
"서윤아, 잠깐 이야기해도 될까."
나는 문을 열었다.
오빠의 얼굴이 평소보다 굳어 있었다.
평소라면 늘 여유로운 웃음을 걸치고 있던 얼굴인데, 지금은 그 여유가 온데간데없었다.
그 표정만으로도, 나는 좋은 소식이 아니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궁에서 연락이 왔다."
그 말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뭐라고."
"왕비 전하께서 다시 너를 부르신다고 한다. 내일 아침, 궁으로 들라 하셨다."
숨이 가빠졌다.
지난번의 그 서늘한 처소와, 그 안에서 들었던 말들이 떠올랐다.
'자격이 없다.'
그 말이 다시 귓가에 울렸다.
바닥이 얼음처럼 차갑게 느껴지던 그 방, 왕비의 눈길이 나를 위아래로 훑던 순간까지, 전부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왜 다시 부르시는 걸까."
내 목소리가 흔들렸다.
오빠는 조심스럽게 답했다.
"모르겠다. 다만……"
그가 잠시 말을 끄는 동안, 나는 숨을 죄었다.
그 짧은 침묵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이번엔 한소이 양도 함께 부르셨다고 들었다."
그 순간, 방 안의 촛불이 크게 흔들리며 순간적으로 불꽃이 커졌다.
나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그 자리에 굳어 서 있었다.
오빠도 그 불꽃을 보지 못한 듯했다.
한소이와 나를, 왕비가 같은 자리에 부른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설마, 그 자리에서……'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애써 지웠다.
다만 확실한 건, 그 자리가 지금까지 겪은 어떤 순간보다도 더 나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을 것이라는 예감뿐이었다.
오빠가 방을 나선 뒤에도, 나는 오랫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내일 아침이면, 다시 그 서늘한 처소로 들어서야 한다.
그리고 그 안에는, 이헌의 어머니와, 이헌이 사랑한다는 여자가 함께 앉아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 무슨 얼굴을 하고 있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