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완벽한 낙제 영애

2화

왕비의 처소로 향하는 길은 짧았다. 하지만 그 짧은 길을 걷는 동안, 나는 수없이 마음을 다잡으려 애썼다. 방금 이헌에게서 들은 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돌았다. 혼약을 파기하겠다는 말. 그리고 그 자리를 대신할 사람의 이름, 한소이. '정신 차려.' '지금 무너진 얼굴로 왕비 앞에 서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어.' 나는 걸음을 옮기며 숨을 골랐다.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심장이 무겁게 뛰었다. 복도의 창밖으로 스치는 궁의 정원이 낯설게 느껴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익숙했던 풍경인데, 오늘은 모든 것이 낯설었다. 문 앞에 서자 시녀가 나를 알아보고 고개를 숙였다. "왕비마마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는 옷매무새를 다시 한번 매만졌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괜찮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문이 열렸다. 왕비는 창가에 서 있었다. 등을 돌린 채였다. 은백색 머리카락이 오후의 햇살을 받아 옅게 빛나고 있었다. "들어오라." 낮고 단정한 목소리였다. 나는 예를 갖추고 안으로 들어섰다. 바닥에 깔린 문양 있는 카펫이 발끝에 부드럽게 밟혔다. 방 안에는 향이 은은하게 감돌았다. 늘 그랬듯, 왕비의 처소에서는 서늘한 꽃향기가 났다. 왕비가 몸을 돌렸다. 은백색 머리, 서늘한 눈매. 곧게 선 자세, 흠잡을 데 없는 자태. 언제 봐도 압도되는 사람이었다. "이헌에게서 이야기를 들었느냐." 돌려 말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예, 방금 전에." 나는 겨우 답했다. 목소리가 갈라지지 않도록 애써야 했다. 왕비는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마치 물건을 검수하듯 훑어 내려갔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그 시선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살갗이 서늘해졌다. "내 처음부터 이 혼약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말이 시작이었다. 나는 그 순간, 이미 이 대화가 어디로 흘러갈지 알 것 같았다. "진 소저, 그대는 학문에는 뛰어나다고 들었다. 하지만 왕태자비의 자리는 학문만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럴듯한 반박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반박할 자격조차 없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사교의 장에서 그대는 언제나 겉돌았지." 왕비의 목소리는 감정이 섞이지 않은 채 계속되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을 몰랐고, 웃는 법조차 서툴렀다." 한 마디씩, 그녀는 내가 쌓아온 것들을 무너뜨렸다. 나는 문득 어느 연회의 밤을 떠올렸다. 사람들 사이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서 있던 밤. 그때도 이런 시선을 받았던 것 같았다. "태자비의 자리는 백성의 어머니가 되는 자리다. 사람의 마음을 읽고, 따뜻함으로 감싸는 자리다. 그대에게 그런 것이 있었느냐?" 숨이 가빠졌다. 나는 그동안 밤을 새워 경전을 읽었고, 예법을 익혔고, 역사를 외웠다. 그것이 자격이라 믿었다. 새벽까지 촛불을 켜놓고 옛 왕조의 흥망을 외우던 기억이, 예법서를 손에서 놓지 못했던 기억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그 모든 노력이, 지금 이 한 문장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그럼 그 수많은 밤들은 다 무엇을 위한 거였지.' "……저는." 말을 잇지 못했다. 목이 메어 그 뒤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왕비가 미소를 지었다. 차가운 미소였다. 입가는 웃고 있었지만, 눈은 조금도 웃지 않았다. "한소이라는 아이는 다르다. 그 아이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법을 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는 그것을 느꼈지." 그 이름이 나올 때, 손끝에 열이 올랐다. 이상한 열기였다. 몸 안쪽에서부터 차오르는 듯한. '또 그 이름이야.' '어디를 가도 그 이름을 피할 수 없구나.' 창가에 놓인 화병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나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알아차릴 여유가 없었다. 머릿속은 온통 한소이라는 이름과, 자격이 없다는 말로 가득 차 있었다. "그대는 자격이 없다." 왕비의 마지막 말이 방 안에 울렸다. 짧고 명확했다. 그 순간, 화병이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쩍- 작은 균열이 표면을 타고 번져나갔다. 유약이 발린 도자기 표면에 실금이 거미줄처럼 퍼졌다. 왕비가 눈살을 찌푸리며 화병을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인가." 나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설마, 지금 이건.' "모, 모르겠습니다." 목소리가 떨리는 걸 감추려 애썼다. 다행히 왕비는 더 캐묻지 않았다. 대신 화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나를 향해 손짓했다. "물러가라. 오늘 들은 말을 잊지 말고." 그 말에는 다정함도, 온기도 없었다. 나는 예를 갖추고 처소를 빠져나왔다. 문이 등 뒤에서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복도를 걷는 동안 다리가 후들거렸다. 벽을 짚지 않고서는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을 것 같았다. '자격이 없다.' 그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나는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그럼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 그 모든 밤을 새운 거지.' '경전을 읽고, 예법을 외우고, 그 모든 시간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었던 거지.' 답은 나오지 않았다. 궁을 빠져나오는 길, 시녀들이 나를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들의 시선에는 이미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듯한 기색이 섞여 있었다. '이미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걸까.' 혼약 파기라는 말은, 궁 안에서 하루도 지나지 않아 온 사방으로 퍼질 것이었다. 나는 그 시선들을 피해 걸음을 서둘렀다.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마차에 오르자, 겨우 참았던 숨이 터져 나왔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을 감추려 두 손을 맞잡았다. 마차 바퀴가 돌바닥을 지나며 덜컹거렸다. 그 진동조차 지금은 견디기 힘들 만큼 크게 느껴졌다. 창밖으로 궁의 붉은 지붕이 멀어져 갔다. '집으로 돌아가면.' 집으로 돌아가면, 아버지가 이 소식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결코 이 상황을 그냥 넘기지 않을 사람이었다. 나는 마차 창문에 이마를 기댔다. 차가운 유리의 감촉이 잠시 열기를 가라앉혀 주었지만, 오래가지는 않았다. 집에 도착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나는 아무런 답도 준비하지 못한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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