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공작가의 대문이 눈에 들어오자, 나는 겨우 숨을 가다듬었다.
마차 바퀴가 자갈길을 밟는 소리가 점점 느려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이 짧은 거리가, 오늘만큼은 끝없이 길게 느껴졌다.
오늘 있었던 일들을 아버지에게 어떻게 전해야 할지, 이미 알고 있을지, 나는 짐작할 수 없었다.
이헌의 얼굴이, 그가 내뱉은 말들이, 아직도 귓가에 맴돌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
그 한마디가 궁의 복도를 넘어 여기까지 나를 쫓아온 것 같았다.
마차에서 내리자 집사가 다급한 얼굴로 다가왔다.
평소라면 인사를 먼저 건네던 사람이었다.
오늘은 그마저도 잊은 듯했다.
"아가씨, 공작님께서 서재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말투에서, 나는 이미 상황을 짐작했다.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소문은 궁을 넘어 벌써 공작가 담장 안까지 스며든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빠르네.'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긴, 왕태자의 혼약 파기 소식이 이 나라에서 조용히 묻힐 리 없었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서재로 향했다.
복도를 걷는 동안 하녀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다들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오히려 더 무겁게 느껴졌다.
문을 열자, 아버지 진태호 공작이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짙은 눈썹, 굳게 다문 입술. 표정만으로도 지금 그가 어떤 심정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책상 위에는 서류 몇 장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평소라면 절대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던 분이었다.
"들었다."
첫마디가 그것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왕태자가 혼약을 파기하려 한다고."
아버지의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다.
"……예."
나는 겨우 답했다.
"어떤 이유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을 다시 입 밖에 내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틀렸다.
목구멍이 좁아지는 느낌이었다.
아버지는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이 몇 초였는지, 몇 분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책상 위의 촛불이 흔들렸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리석은 일이다."
짧은 한마디였다.
나는 그 말이 나를 향한 것인지, 이헌을 향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나한테는 별로 다를 게 없네.'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 혼약은 폐하와 내가 직접 정한 정식 혼약이다. 단순히 감정 하나로 뒤집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마치 서류를 검토하는 눈빛 같았다.
딸이 아니라, 하나의 안건을 보는 눈.
"너는 그 파기를 받아들이지 마라."
순간, 귀를 의심했다.
"……예?"
"파기를 거부해라. 정식 절차를 밟지 않는 이상, 너는 여전히 왕태자의 혼약자다."
"아버지."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는 이미 마음을 정하셨습니다. 제가 거부한다 해도……"
"네 마음이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다."
아버지가 말을 잘랐다.
칼로 자르듯 단호한 말투였다.
"이 혼약이 파기되면, 진안 공작가의 위신도 함께 떨어진다. 왕실과의 연이 끊긴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느냐."
나는 아버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눈 안에서, 나는 어디에도 없었다.
오직 가문, 오직 정치적 이해관계만이 있었다.
딸의 마음 같은 것은 그 계산 안에 존재하지 않았다.
"가문의 명예가, 왕실과의 인연이, 앞으로 십 년, 이십 년의 권력 구도가 여기에 달려 있다."
아버지는 마치 나에게 설명하듯 말을 이었다.
"네가 지금 느끼는 감정 따위로 이 모든 것을 무너뜨릴 셈이냐."
"……제 마음은."
말을 하다 멈췄다.
내 마음이 어떤지, 나조차도 명확히 알지 못했다.
사랑이 없었던 혼약이었다. 그럼에도 그것이 사라진다는 사실이 왜 이렇게 아픈지, 나는 설명할 수 없었다.
어쩌면 아픈 건 혼약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위해 쌓아온 모든 것이 헛되어졌다는 사실이었을지도.
수년간 왕태자비가 되기 위해 배운 예법들, 억눌러온 감정들, 참아온 순간들.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의미해졌다는 사실이, 혼약 자체보다 더 아팠다.
"네 마음 같은 건 지금 중요하지 않다."
아버지가 다시 말했다.
"가문을 생각해라."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가문. 가문. 가문.'
그 말이 머릿속에서 메아리처럼 울렸다.
내가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나를 둘러싼 모든 결정에는 항상 그 단어가 붙어 있었다.
서재를 나서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복도를 걷는 동안, 벽에 걸린 등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불빛이 파르르 떨리며 그림자를 벽에 길게 늘어뜨렸다.
내 감정이 새어 나가고 있다는 걸, 나는 알았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또 시작이네.'
이런 순간마다 능력이 제멋대로 반응하는 게,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방으로 돌아와 문을 닫자, 그제야 무릎이 꺾였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 나는 오랫동안 그렇게 있었다.
방 안의 촛불 하나가 픽, 소리를 내며 꺼졌다.
지킬 명분도 없고, 놓을 자유도 없었다.
나는 그저 이헌의 결정과 아버지의 결정 사이에 끼어,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거지.'
그 질문이, 처음으로 선명하게 떠올랐다.
혼약자로서, 딸로서, 아니면 그저 이 가문의 도구로서.
어느 것도 완전한 답이 되지 못했다.
바닥의 차가운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그 감촉조차 지금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울 힘도 없네.'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냥 텅 빈 느낌뿐이었다.
밖에서 하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오라버니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오빠 진하준.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오늘 하루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그 목소리에서 직감했다.
'또 뭐가 남았을까.'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무릎에서 힘이 다 빠져나간 것 같았지만, 일어나야 했다.
오빠가 이 시간에 직접 나를 찾아온다는 건,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방문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그러나 오늘은 낯설게 느껴지는 걸음걸이였다.
문고리가 서서히 돌아가는 소리에, 나는 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