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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지환의 빛은 곧 사그라들었다. 순식간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하지만 나는 밤새 그 잔상을 지울 수 없었다. 이불을 덮고 누워도, 눈을 감으면 자꾸 그 빛이 떠올랐다. 은은한 금빛, 어딘가 낯설면서도 익숙한 파동. 지환은 원래 그런 반응을 보이는 물건이 아니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은. 몇 번이나 몸을 뒤척였는지 모른다. 결국 새벽 무렵에는 침대에서 일어나 마탑으로 향했다. 마탑의 서고는 언제나처럼 조용했다. 나는 지환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온갖 감지 마법을 걸어봤다. 열 반응, 마력 파동, 고대 문자 해독까지. 하지만 뭐 하나 제대로 잡히는 게 없었다. "대체 뭐야, 너." 혼잣말이 텅 빈 서고에 울렸다. 지환은 그저 조용히,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결국 나는 스스로를 다독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냥 일시적인 반응이었을 거야. 고대 유물이란 게 원래 그런 법이니까. 몇백 년을 잠들어 있다가 갑자기 깨어나면, 한 번쯤 이상한 짓을 하는 것도 당연하지. 뭐, 어쩌겠어. 원래 고대 유물이란 게 종종 예측 불가능한 짓을 하는 법이니까. 그렇게 스스로 결론을 내리고 나니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완전히 놓인 건 아니었다. 뒷목이 서늘한 그 느낌, 뭔가 놓치고 있다는 불안감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다음 날, 나는 눈 밑에 다크서클을 매달고 학원에 갔다. 거울을 보니 꼴이 말이 아니었다. 화장으로 가려도 티가 났다. 이 정도면 누가 봐도 밤새 뭘 했냐고 물어볼 만한 얼굴이었다. 수업 시간에도 정신이 반쪽쯤 나가 있었다. 교수님의 말이 귀에 들어오다가도 어느 순간 다시 지환의 빛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대체 뭐였을까. 그냥 넘어가도 되는 걸까. 그런데 그날, 나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진짜 위기를 맞았다. 수업이 끝나고, 다음 강의동으로 이동하던 중이었다. 3층 강의동으로 향하는 계단, 마침 쉬는 시간이라 학생들로 붐비는 시간대였다. 계단은 좁았고, 사람들은 밀물처럼 오르내리고 있었다. 나는 손잡이 쪽에 가까이 붙어 걸으려 했다. 원래도 사람 많은 곳을 별로 안 좋아해서, 최대한 붐비지 않는 길로 걷는 게 습관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뒤에서 누군가 나를 세게 밀쳤다. 정말 순식간이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강한 압력. 뭐지, 생각할 틈도 없이 몸이 앞으로 확 쏠렸다. 순간 몸이 균형을 잃었다. 손잡이를 잡으려 했지만 닿지 않았다. 손끝이 허공을 스쳤다. 아래로, 계단 아래로 몸이 기울어지는 게 느껴졌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죽는 건가. 아니,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순 없잖아. 나 아직 이 세계에서 한 것도 없는데.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끝나는 건 너무 억울하잖아. 그런데 그 순간, 누군가의 팔이 내 몸을 감싸안았다. 강한 힘이었다. 순식간에 몸이 붙잡히고, 방향이 바뀌었다. 쿵, 소리와 함께 나는 그 사람의 품에 안겨 계단 바닥에 함께 쓰러졌다. 아프긴 했지만, 최악의 결과는 면했다.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괜찮아?"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고개를 들어 그 사람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석양색 머리카락, 심해처럼 짙은 청색 눈동자. 완벽하게 조각된 듯한 얼굴. 가까이서 보니 더 비현실적이었다. 이런 얼굴이 실존한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윤이헌. 2왕자의 친우이자, 학년 최고의 인기남. '여성 홀리는 남자'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그 사람이었다. 이름은 익히 들어봤다. 강의동을 지나가면 여학생들이 몰래 뒤돌아보는 그 얼굴. 인기가 많다는 소문은 정말 과장이 아니었구나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 별명에 걸맞은 부드러움 같은 건 딱히 느껴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소문 속에서는 무뚝뚝하고 차갑다는 평이 더 많았는데. 그런 사람이 왜, 어떻게, 이 시점에 이 자리에 있었던 건지. "어, 어… 괜찮아요." 나는 얼떨결에 대답했다.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게 느껴졌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는데, 그게 놀라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판단이 안 됐다. 주변에서 학생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시선이 한 곳으로 모이는 게 느껴졌다. 아, 이거 창피한데. 나는 그 시선들 속에서, 저 멀리 계단 위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강나은의 표정을 봤다. 놀란 표정이었다. 예상치 못한 결과에 당황한 얼굴. 뭔가 계획이 어긋난 사람처럼, 미세하게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아, 역시 네가 밀었구나. 확신이 들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그걸 따질 여유는 없었다. 일단 이 상황을 벗어나야 했다. 사람들 앞에서 이런 자세로 계속 있는 것도 민망했고. 윤이헌은 나를 부축해서 보건실로 데려갔다. 걷는 동안 그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냥 조용히 내 옆을 지켰다. 그 침묵이 오히려 더 신경 쓰였다. 뭔가 말을 걸어야 할 것 같은데, 뭘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 그런 침묵. 보건실에 도착하자, 그는 나를 침대에 앉히고는 간호사를 불러왔다. 다행히 큰 부상은 없다는 진단이 나왔다. 발목이 살짝 삐었을 뿐. "다행이네." 윤이헌이 처음으로 짧게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에서 안도 같은 게 느껴졌는데, 착각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저, 감사합니다. 구해주셔서." 나는 형식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예의상 하는 인사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일단 감사부터 표하는 게 도리니까. 그런데 그의 다음 반응이 예상 밖이었다. "누가 밀었는지 알아?" 직설적인 질문이었다. 돌려 말하지 않고, 바로 본질을 찌르는 식. 나는 잠시 망설였다. "잘 모르겠어요."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지금 강나은을 지목했다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그녀의 뒷배는 나보다 훨씬 강했으니까. 이 학원에서 강나은 가문의 힘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괜히 건드려서 좋을 게 없었다. 윤이헌은 나를 잠시 응시했다. 뭔가를 판단하는 눈빛이었다. 그 시선이 얼굴을 지나 눈동자까지 파고드는 느낌이었다. "모르는 게 아니라, 말하고 싶지 않은 거겠지." 어, 이거 뭐지. 눈치가 너무 빠른데. 나는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말이 정확히 내 속을 찌른 탓이었다. 이런 식으로 바로 짚어낼 줄은 몰랐다. 그는 그런 나를 보며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됐어. 굳이 말 안 해도 돼."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바라봤다. 등을 보이고 서 있는 그 모습이, 소문 속의 무뚝뚝한 이미지와 어쩐지 겹쳐 보였다. "조심해. 다음번엔 이렇게 운이 좋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그 말이 왠지 따뜻하게 들렸다. 소문 속의 그 냉담한 이미지와는 다른, 어딘가 걱정이 섞인 목소리. 이상하다. 소문이랑 완전히 다른데. "저기, 이름이…" 물으려는데, 그는 이미 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쉬어. 나 갈게." 짧은 인사를 남기고 그는 사라졌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나는 텅 빈 보건실에 혼자 남아, 방금 있었던 일을 곱씹었다. 이상한 사람이었다. 소문과는 다르게, 어딘가 다정한. 냉담하다는 평판과 실제 행동 사이의 간극이 너무 커서, 오히려 그게 더 신경 쓰였다. 그런데 그 다정함 뒤에 뭐가 있는지, 나는 아직 알 수가 없었다. 마치 나처럼, 그 사람도 숨기고 있는 게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생각이 든 순간,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느낌이 스쳤다. 강나은의 그 당황한 표정과, 윤이헌의 그 정확한 질문이 자꾸 겹쳐서 떠올랐다. 이 학원,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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