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비안개 저편의 그대

3화

그날 밤, 나는 꿈을 꾸었다. 비가 내리는 숲속이었다. 나무들 사이로 안개가 자욱했고, 발밑은 젖은 흙으로 미끄러웠다. 나뭇잎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렸다. 차가웠다. 꿈인데도 이렇게 생생할 수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잠깐 스쳤지만 곧 사라졌다. 나는 그 숲을 걷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로. 발밑에서는 낙엽이 밟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숲은 조용했다. 새 울음소리도, 바람 소리도 없었다. 오직 빗소리와 내 발소리뿐이었다. '이상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숲이 나를 어딘가로 이끄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치 정해진 길이 있는 것처럼, 내 발은 스스로 방향을 알고 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그때였다. 앞쪽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공주님, 여기까지 오시면 안 되는데요." 나는 걸음을 멈췄다. 그 목소리를 모를 리 없었다.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쿵, 하고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돌아보니 그가 서 있었다. 강도현. 검은 머리, 검을 든 오른손, 어릴 때부터 보아온 그 익숙한 자세 그대로였다. 옷도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같았다. 마치 시간이 그 순간에 멈춰버린 것처럼. "강도현?" 내 목소리가 떨렸다. 믿을 수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믿고 싶지 않으면서도 믿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그는 웃으며 다가왔다. 평소와 다름없는 걸음걸이였다. "오랜만이에요." 오랜만이라니. 겨우 며칠 지났을 뿐인데. 나는 그렇게 말하려다 멈췄다. 이곳에서는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시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 숲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당신, 여기서 얼마나 있었어?" "모르겠어요. 헤아려본 적이 없어서." 그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마치 오늘 날씨를 묻는 질문에 대답하듯이. "당신, 죽은 거야?" 질문이 너무 직접적이었지만, 나는 다른 방식으로 물을 수가 없었다. 이 말을 꺼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밤을 견뎌왔는지, 그는 알지 못할 것이다. 그는 잠시 말이 없다가, 짧게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모른다는 대답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죽었다는 대답보다, 살았다는 대답보다, 모른다는 대답이 가장 잔인했다. "여기가 어디야." "저도 잘 몰라요. 그냥, 비가 오면 여기 있게 돼요." 그의 말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가벼운 듯 성실한, 하지만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듯한 특유의 어조였다. 나는 그 말투가 그대로라는 것에 이상하게 안심이 되면서도, 동시에 그 익숙함이 더 서글퍼졌다. "비가 오면, 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야." "저도 잘 설명은 못 하겠어요. 그냥 그렇게 느껴져요.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눈을 뜨면 여기예요." "그럼 비가 안 올 때는?" "그때는……" 그는 말을 잇지 않았다. 대신 조금 슬픈 얼굴로 웃었다. 그 웃음이 대답을 대신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이 숲 자체가 나를 붙잡고 있는 것 같았다. 발목에 무언가 감긴 것처럼 무거웠다. "강도현." "네." "돌아와." 내 목소리는 애원에 가까웠다. 나답지 않은 목소리였다. 평소 같으면 절대 내지 않았을 목소리였다. 그가 나를 보며 슬프게 웃었다. "그게 제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서요." "그럼 누구 마음대로 되는 건데." "글쎄요. 저도 그게 알고 싶어요." 그 순간 비가 거세지기 시작했고, 안개가 그를 삼키기 시작했다. 그의 실루엣이 흐릿해졌다. 나는 그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손끝에 닿는 것은 차가운 빗물뿐이었다. "강도현!" "공주님." 그의 목소리가 안개 너머에서 들렸다. 점점 멀어지는 목소리였다. "다음에 비가 오면, 또 올게요." "기다리지 말아요."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소리를 지르며 눈을 떴다. 방 안은 어두웠고, 창밖으로는 실제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나는 온몸에 식은땀이 흘러 있는 것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이불이 땀에 젖어 살갗에 달라붙어 있었다. '꿈이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저 슬픔이 만들어낸 환상이었을 것이다. 마음이 그를 그리워한 만큼, 뇌가 그를 재현해낸 것뿐이었다. 그렇게 정리하는 것이 가장 이성적인 결론이었다. 그렇게 정리하려 했지만, 손끝에는 여전히 그 숲의 젖은 흙냄새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코끝에 남은 흙과 비의 냄새가 실재하는 것처럼 선명했다. '이게 정말 그냥 꿈일까.'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갔다. 맨발에 닿는 바닥이 차가웠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유리창에 부딪히는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나는 창틀에 손을 얹었다. 꿈속에서 본 그 비와 지금 창밖의 비가, 같은 비처럼 느껴졌다. 같은 리듬, 같은 무게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스스로의 생각을 비웃었다. 꿈과 현실을 연결시키려 하는 것 자체가 슬픔에 잠식된 사람의 증거일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다 보면 결국 미치는 거다. 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려 했다. 하지만 그 비웃음 뒤로도, 이상한 확신이 자꾸만 고개를 들었다. 그가 살아 있다는 확신이 아니라, 그가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는 확신이었다. 죽은 자는 꿈에서도 그렇게 눈을 마주치며 웃지 않는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나는 그 밤 이후로 매번 비가 오는 날마다 잠들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낮에도 하늘을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구름이 낮게 깔리면 괜히 마음이 들썩였고, 볕이 좋은 날에는 이상하게 실망감이 들었다. 그리고 매번, 그를 만날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다음 사흘간은 비가 오지 않았다. 하늘은 지독하게 맑았고, 나는 그 맑음이 야속했다. 그리고 그 사흘 동안, 나는 궁 안에서 한지원과의 혼례 준비가 조용히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녀 하나가 내 방으로 예복 치수를 재러 왔을 때, 나는 그제야 그 사실을 실감했다. 비단 자락을 몸에 대며 시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공주님, 팔을 좀 벌려주시겠어요? 소매 길이를 다시 재야 해서요." 나는 팔을 벌리면서도 눈은 창밖을 향해 있었다. 하늘은 여전히 맑았다. '혼례라니.' 내 삶이 이렇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꿈속의 강도현이 알고 있을까. 알 리가 없었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존재였고, 나는 이곳에서 혼례복 치수를 재고 있었다. 그 어긋남이 유난히 아프게 다가왔다. '다음에 비가 오면.' 그가 남긴 그 말이 자꾸 귓가에 맴돌았다. 다음에 비가 오면,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직 정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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