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이현이 나를 대전 뒤편 정원으로 이끌었다.
초여름이라기엔 아직 쌀쌀한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었고, 정원사가 다듬어놓은 장미 넝쿨 사이로 오후의 햇살이 비스듬히 떨어지고 있었다.
채아영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불안한 눈빛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저 표정 뭔데, 내가 무슨 히스테리 부릴까 봐 그러나.'
아무리 봐도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처럼 몸을 반쯤 돌리고 서 있었다.
"미안하다."
이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그럼 뭐가 될 줄 알았는데.'
나는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이현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자꾸 시선을 옆으로 피했다.
저 표정, 진짜 미안해서 그런 건지 그냥 곤란해서 그런 건지 잘 구분이 안 갔다.
"뭐가 미안한데요."
나는 최대한 무덤덤하게 물었다.
"혼약 파기요, 아니면 신전 고발이요?"
이현이 잠깐 말을 잃었다.
바람이 한 번 지나가며 정적을 채웠다.
"둘 다."
"혼약 파기는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내 말에 이현이 눈을 크게 떴다.
"저도 별로 원한 결혼 아니었으니까요."
'진심인데, 왜 저렇게 놀란 얼굴이야.'
남자 입장에서 파기당한 게 자존심 상할 일이지, 여자 입장에서 아쉬울 게 뭐가 있나.
나는 오히려 이현이 왜 놀라는지가 더 궁금했다.
"고발 건은……."
이현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는 잠시 손끝으로 자기 옷깃을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알아본 바로는, 신전과 몇몇 귀족 세력이 이번 기회에 청하 공작가의 힘을 빼려고 만든 그림이야."
'그럴 줄 알았지.'
나는 새삼 놀라지 않았다.
어차피 이 나라 정치판이라는 게 뻔한 그림 아니던가.
힘 있는 가문 하나 죽이려고 마녀 사냥 비슷한 걸 벌이는 건 어느 세계나 똑같은 짓거리였다.
"그런데 왜 지금 이 얘기를 저에게 해주시는 거예요."
"미안해서."
짧은 대답이었다.
나는 그를 잠깐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괜찮아요. 오히려 좋은 결과라고 생각해요."
"좋은 결과라니."
이현이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은강 변경백은……."
"못생겼다는 그 사람 말이죠."
내가 먼저 말을 끊었다.
"저는 외모 별로 안 봐요."
이현이 잠시 말이 없다가 조용히 웃었다.
"넌 여전히 이상한 애구나."
'이상한 게 아니라 현명한 거지, 이 사람아.'
얼굴로 뭘 먹고 사는 것도 아닌데, 왜 다들 이렇게 얼굴에 목숨을 거는지 모르겠다.
전생에도 그랬고 이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얼굴 뜯어먹고 살 것도 아닌데.
대화를 마치고 돌아서는 길에, 채아영이 조심스레 다가왔다.
"저, 서윤 영애님."
나는 그녀를 바라봤다.
갈색 머리, 갈색 눈, 어딘가 불안정한 눈빛.
마법력은 왕국 최고라지만, 예절이나 사교는 완전 초보였다.
드레스 자락을 쥐고 있는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제가 신전에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없는데, 사람들이 자꾸 저를 이용해서……."
"알아요."
내가 말을 끊자 그녀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당신이 한 게 아니라는 거, 저도 알아요."
채아영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런데 왜 저를 미워하지 않으세요?"
'미워할 이유가 없는데.'
나는 잠깐 생각을 정리하고 대답했다.
"당신은 이 판에서 그냥 이용당한 쪽이잖아요. 저도 그렇고요."
채아영이 고개를 숙였다.
"저는 예절도 잘 몰라서, 자꾸 실수하고, 사람들이 뒤에서 저를……."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뭐라고 부르는지 아세요? 촌뜨기 마법사, 라고."
'와, 진짜 유치하다.'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마법력으로 왕국을 지키는 사람한테 촌뜨기라니, 뒤에서 그런 말 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짜 촌뜨기 아닌가.
"그거 제가 좀 도와줄까요."
내 말에 채아영이 고개를 들었다.
"네?"
"어차피 저도 이제 왕국 정치랑은 좀 멀어질 처지고, 시간도 좀 남거든요."
나는 어깨를 살짝 으쓱했다.
'전생에 회사에서 배운 사회생활 스킬 여기서라도 써야지.'
상무님 앞에서 웃는 얼굴로 뒤통수 치는 법도 배웠는데, 이 정도 예법 코칭이야 껌이지.
"기본적인 예법이랑 화법, 조금만 다듬으면 사람들 시선도 많이 달라질 거예요."
채아영이 눈물을 글썽이며 나를 바라봤다.
"고맙습니다, 영애님."
'뭐야, 이렇게 순수하게 반응하니까 좀 미안하네.'
나는 살짝 어색하게 웃었다.
남 도와준다고 이렇게까지 눈물 보일 줄은 몰랐다.
이 세계 사람들은 다들 이렇게 감정이 헐거운 건가.
그날 저녁, 나는 방으로 돌아와 시녀를 다시 불러 은강 변경백에 대해 물었다.
시녀는 처음엔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다가, 내가 몇 번 더 캐묻자 그제야 낮은 목소리로 정보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은강 변경백은 왕국 북부 국경을 삼십 년 넘게 지키고 계신 분이세요. 병력 운용이나 영지 경영 능력이 뛰어나서 북부에서는 신망이 매우 높다고 합니다."
"영지민들 사이에서는 거의 신처럼 떠받들어진다는 얘기도 있고요."
"외모만 아니면 사위감으로 최고라는 얘기가 원래도 있었어요. 다만……."
"다만?"
"색이 너무 옅으셔서요. 사교계에서는 그것만으로 평가가 완전히 끝나버리니까요."
'참 편견 심한 세상이네, 여기.'
색 좀 옅다고 인생 평가가 끝난다니, 피부 하나로 신분이 결정되던 어느 시대나 다 이런 식이었다.
나는 시녀에게 좀 더 물었다.
"그럼 그분 성격은 어떤데요."
"소문으로는 말수가 적고 무뚝뚝하시다고 들었습니다. 다만 아랫사람들한테는 함부로 대하지 않으신다고……."
시녀가 말을 흐리며 조심스럽게 나를 살폈다.
"직접 뵌 사람이 많지 않아서, 확실한 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능력 있고, 성격도 나쁘지 않다는 소문에, 정치와 거리가 먼 변경 영지.
조건만 보면 이 세계에서 이보다 나은 신랑감은 없어 보였다.
'이거 진짜 상이잖아.'
전생에 소개팅 나갔던 그 수많은 인간들과 비교해보면, 서류상 스펙만 놓고 봤을 때 이쪽이 훨씬 낫다.
그런데 문득 궁금해졌다.
왜 이렇게 좋은 조건의 사람이, 지금까지 결혼을 안 하고 있었을까.
서른 넘도록 혼처가 없었다는 얘기를 얼핏 들은 것 같은데.
단순히 외모 때문이라고 하기엔 뭔가 이상했다.
색이 옅은 귀족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닐 텐데, 다들 어떻게든 짝을 찾아 결혼하고 살지 않던가.
혹시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닐까.
나는 이불을 끌어당기며 눈을 감았다.
답은 곧 알게 될 테니, 지금 머리 싸매고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아버지가 급한 얼굴로 내 방문을 두드렸다.
평소라면 절대 이 시간에 오지 않는 분이었다.
"서윤아, 큰일이 생겼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아버지의 얼굴은 며칠 밤을 못 잔 사람처럼 초췌했다.
"은강 변경백이……."
아버지가 잠시 말을 고르며 숨을 골랐다.
"이미 왕도로 오는 중이라는 전서가 왔다. 예정보다 훨씬 빠르게."
나는 순간 멍해졌다.
'벌써? 이렇게 빨리?'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최소 한 달은 걸릴 거라는 얘기를 들었던 것 같은데.
"원래 일정보다 얼마나 빠른 건데요."
"보름은 족히 당긴 셈이다."
아버지가 미간을 좁혔다.
"북부에서 왕도까지 그 거리를, 이렇게 서둘러 왔다는 건……."
아버지가 말을 삼켰다.
뒷말은 굳이 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만큼 이 결혼이 은강 변경백 쪽에서도 급했다는 뜻일 터였다.
창밖으로 아침 해가 비치고 있었다.
오늘부터 며칠 안에, 내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을 사람이 왕도에 도착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창밖을 바라봤다.
'어떤 사람일까.'
기대와 불안이 동시에 밀려왔다.
그리고 그 감정 밑바닥에는, 이상하게도 설렘 비슷한 게 자꾸 고개를 들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런 내 표정을 보고 뭔가 더 말하려다, 그냥 방문을 닫고 나갔다.
나는 한동안 창밖의 햇살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