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단죄식이 준 선물

3화

왕궁 대전은 숨소리마저 들릴 만큼 조용했다. 높은 천장에서 늘어진 샹들리에가 대전 전체를 차갑게 밝히고 있었고, 그 아래 대신관, 국왕, 대귀족들이 각자의 자리에 앉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대전 중앙, 아무것도 없는 대리석 바닥 위에 홀로 섰다. 발밑 대리석이 유난히 차가웠다. '이런 날은 카펫이라도 좀 깔아주지.' 등 뒤로 시선들이 바늘처럼 꽂혔다. 좌우로 늘어선 귀족들의 눈빛에는 동정도, 걱정도 없었다. 있는 건 오직 흥미뿐이었다. '다들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이네. 남 망하는 거 구경하는 게 그렇게 재밌나.' 국왕 이건욱이 옥좌에 앉아 나를 내려다봤다. 그는 신전의 고발장을 손에 쥐고 있었지만, 얼굴에는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오히려 지루하다는 보기 드문 표정이었다. 손가락으로 고발장 모서리를 툭툭 두드리는 모습이, 마치 이 사안이 자신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걸 온몸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저 표정, 신전 별로 안 믿는 눈치인데. 그럼 왜 이 자리를 만든 거야.' "청하 공작 영애 한서윤." 대신관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목소리는 대전 전체에 울릴 만큼 크고, 확신에 차 있었다. "여신의 사랑을 받는 채아영 영애를 상대로 저지른 죄, 인정하는가." "인정하지 않습니다." 나는 또렷하게 대답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배에 힘을 줬다. 대전 안이 작게 웅성거렸다. '당연히 인정 안 하지, 안 했으니까. 없는 죄를 인정하면 그게 바보지.' 그 순간, 옆문에서 이현이 걸어 나왔다. 흑발과 검은 눈, 이 세계 기준으로 흠잡을 데 없는 왕태자. 걸음걸이마저 각 잡힌 듯 정확했고, 대전 안 시선이 순식간에 그에게로 옮겨갔다. 그는 대전 중앙까지 걸어와 국왕 앞에 무릎을 꿇었다. 무릎이 대리석에 닿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폐하, 소신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장내가 다시 조용해졌다. 숨소리조차 죽인 침묵이 잠깐 이어졌고, 나는 이 정적이 무엇을 예고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드디어 오는구나.' 이현이 일어서서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죄책감 비슷한 것이 살짝 스쳤다. '미안해할 거면 그냥 처음부터 딴 애 좋아하지 말지. 이제 와서 그런 눈으로 보면 내가 뭐 감동받을 줄 알았나.' "저는 청하 공작 영애와의 혼약을, 이 자리에서 정식으로 파기하고자 합니다." 대전이 얼어붙었다. 귀족들의 숨죽인 놀람이 파도처럼 퍼져 나갔다. 누군가는 부채로 입을 가렸고, 누군가는 옆 사람과 눈빛을 교환했다. 나는 겉으로 최대한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입술을 살짝 떨고, 눈을 크게 뜨고, 손끝으로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연기치고는 나쁘지 않았다고 자평했다. '이 정도면 배우 해도 되겠는데.' 속으로는 완전히 다른 말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전하. 살려주셔서.' "이유를 말하라." 국왕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아까와 다르게 미묘한 흥미가 섞여 있었다. '저것 봐, 지루하던 얼굴이 갑자기 생기가 도네.' 이현이 잠깐 숨을 고르고 대답했다. "저는 채아영 영애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대전 뒤편에서 옅은 탄식이 흘렀다. 누군가는 감격한 듯 손을 모았고, 누군가는 나를 힐끔거렸다. 이현은 뒤돌아 채아영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가 조심스레 걸어 나와 그 손을 잡았다. 갈색 머리와 갈색 눈, 어색한 걸음걸이, 그리고 순간적으로 온몸을 감싸는 옅은 분홍빛. '저거 마법 발현할 때 나오는 빛이랬지.' 빛은 마치 그녀의 존재 자체를 축복하듯 은은하게 퍼졌다가 서서히 사라졌다. 귀족들 사이에서 감탄사가 새어 나왔다. "여신의 은총이다." 누군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광경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거짓이 없었다. 이현의 눈은 오직 채아영만을 향해 있었고, 채아영 역시 볼이 붉어진 채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저 정도면 진짜 사랑이지, 저건 못 이겨. 억지로 붙잡아봐야 나만 처량해지는 거고.' 이상하게 마음이 가벼워졌다. 혼약이 깨진다는 사실보다, 이 나라 왕비 자리에서 완전히 벗어난다는 사실이 더 크게 다가왔다. '왕비 안 해도 돼. 진짜 다행이다.' "그럴 리가." 뒤편에서 누군가 낮게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귀족 중 한 명이 나를 힐끔 보며 수군거렸다. "청하 공작 영애가 저 정도로 미움받았다니." 다른 귀족이 맞장구쳤다. "평소엔 그렇게 도도했는데 말이야." '억울하네, 진짜.'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도도했다는 게 왜 미움받을 이유가 되는 건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국왕이 손을 들어 좌중을 조용히 시켰다. 그 손짓 하나에 대전 전체가 다시 침묵으로 가라앉았다. "혼약 파기는 받아들이겠다." 그가 나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 시선에는 아까와 다르게 뭔가를 재는 듯한 기색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신전의 고발 건은 별개의 문제다." '그럴 줄 알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짧게 욕을 삼켰다. 이렇게 순탄하게 끝날 리가 없지, 여기까지 왔는데. 대신관이 다시 나섰다. 그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넘쳤다. 마치 이미 승부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듯한 태도였다. "청하 공작 영애가 이끄는 파벌이 채아영 영애를 조직적으로 괴롭혔다는 증언이 다수 확보되었습니다." 그가 손짓하자, 대전 문이 열리고 몇 명의 시녀와 학원생이 걸어 들어왔다. 낯익은 얼굴들이었다. 평소 내 파벌로 분류되던 귀족가 영애들. 그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숙인 채 걸음을 옮겼고, 대전 중앙에 이르러 하나둘 무릎을 꿇었다. 누구는 목소리가 떨렸고, 누구는 아예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그들이 채아영을 괴롭힌 정황을 진술하기 시작했다. 마법 재료 훼손, 뒷담화, 은근한 무시. 하나같이 구체적이었고, 하나같이 그럴듯했다. 대부분은 내가 알지도 못하는 일이었다. '저건 진짜 저 애들이 알아서 한 짓이잖아. 내가 시킨 것도 아닌데 왜 자꾸 내 이름이 나와.'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그걸 하나하나 반박할 여유는 없었다. 반박하려는 순간마다 대신관의 다음 말이 곧바로 이어졌고, 귀족들의 시선은 이미 나를 죄인으로 확정 지은 뒤였다. 대신관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 모든 배후에는 청하 공작 영애의 암묵적 허락이 있었다는 증언까지 나왔습니다." '허락? 무슨 허락. 지시받은 적도 없는데 허락은 어떻게 하는데. 이건 그냥 말장난이잖아.' 나는 항의하고 싶었지만, 대전 안 분위기는 이미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어 있었다. 귀족들의 시선이 차갑게 식어갔다. 방금 전까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나를 구경하던 눈들이, 이제는 확신에 찬 경멸로 바뀌어 있었다. '와, 진짜 빠르네.' 국왕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옥좌에서 일어나는 그 짧은 동작만으로도 대전 전체가 다시 얼어붙었다. "청하 공작 영애의 죄를 정식으로 다루겠다." 그 순간,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손끝이 저릿하게 떨렸고, 옷자락을 움켜쥔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혼약 파기는 반가운 소식이었지만, 지금 이 흐름은 그 이상을 요구하고 있었다. '설마 진짜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건 아니겠지.' 국왕이 판결을 내리기 위해 입을 열었다. "단, 이 사안에는 조건이 하나 붙는다." 대전 안이 다시 웅성거렸다.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국왕에게로 쏠렸고, 대신관조차 잠시 표정이 흔들렸다. 나는 국왕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숨을 멈췄다. 심장이 이상하게 크게 뛰었다. 좋은 조건일지, 나쁜 조건일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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