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단죄식이 준 선물

2화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버지가 서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집사가 다급한 얼굴로 다가와 "공작님께서 아가씨를 기다리고 계십니다"라고 했을 때, 이미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알았다. '평소엔 저녁 식사 때 보자 하시는 분이 왜 대문 앞까지 사람을 보내셨을까.' 나는 겉옷도 벗지 못한 채 서재로 향했다. 한태호, 청하 공작이자 내 아버지. 옅은 갈색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이 세계 기준으로는 '조금 못생긴' 남자였다. 색이 옅을수록 못하다는 미의 기준 때문인데, 나는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진짜 어이가 없었다. '저렇게 다정한 눈빛을 가진 사람이 왜 못생겼다는 소리를 듣는지.' 어머니 서지혜는 흑발에 밤색 눈동자를 가진, 이 세계 최고의 '예술적인 미녀'로 불렸다. 두 사람은 나이 차이도 좀 있고 미모 차이도 크다고 사람들이 뒤에서 수군거렸지만, 어머니는 신경도 안 썼다. 오히려 파티에서 누가 그런 소리를 흘리면 웃으면서 "제 눈이 이상한가 봐요,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사람만 눈에 들어와서" 하고 받아쳤다는 일화까지 있었다. '그 강단은 진짜 존경한다.' 서재 문을 열자 아버지가 창가에 서 있었다. 등을 보이고 있었는데도 어깨가 딱딱하게 굳은 게 눈에 보였다. "신전에서 고발이 들어왔다더구나." 아버지가 돌아서며 서류를 내밀었다. 종이를 받아드는 손끝이 서늘했다. 종이에는 조목조목 죄목이 나열돼 있었다. 채아영 남작가 영애에게 마법 재료를 빼돌리라 지시했다는 것, 학원 내에서 그녀를 따돌리도록 배후에서 지시했다는 것, 심지어 그녀의 마법 도구를 몰래 훼손했다는 것까지. 날짜와 시간, 심지어 내가 만난 적도 없는 학원 관계자의 이름까지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다. 나는 종이를 훑으며 헛웃음이 나왔다. '이걸 언제 다 했다는 거야, 내가. 나 그때 시험 기간이라 방에서 밤새 문제집 풀던 날인데.' 날짜를 하나하나 대조해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저는 이런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내가 말하자 아버지의 눈빛이 흔들렸다. "안다. 네가 그럴 아이가 아니라는 걸 안다." '알면서 왜 저렇게 얼굴이 안 좋으세요.' 아버지의 눈 밑이 며칠은 못 잔 사람처럼 거뭇했다. 평소 흐트러짐 없던 옷차림도 오늘은 넥타이가 살짝 비뚤어져 있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마음이 이상하게 무거워졌다. 아버지는 서류를 다시 접으며 낮게 말했다. "문제는 신전의 고발이 아니라, 이걸 밀어붙이는 세력이다." "세력이라니, 어떤……." "신전, 왕태자궁, 그리고 몇몇 귀족 가문들이 손을 잡았다." 청하 공작가는 오랫동안 왕국 내 파벌 정치의 한 축을 담당해 왔다. 그리고 최근 몇 년간 그 세력 균형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는 건 나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채아영이라는 존재는 그냥 시골 남작가 영애가 아니라, 여신의 축복을 받은 상징적 인물이었다. 국왕도, 신전도, 심지어 왕태자까지 그녀 편이라면. '이건 그냥 정치 싸움이잖아. 나는 그 사이에 끼인 도구고.' 아버지의 얼굴을 보니, 이 상황을 이미 며칠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왜 진작 말씀 안 하셨어요, 라고 물어봐야 하나. 아니, 물어봐도 답 안 나올 것 같은데.' "단죄식이 열릴 거다." 아버지가 말했다. "일주일 뒤, 왕궁 대전에서." 나는 이미 소환장을 통해 알고 있었지만, 아버지 입으로 다시 들으니 실감이 확 났다. '진짜 단죄식이네. 이거 완전 그 클리셰다.' 악역 영애, 신전의 고발, 왕태자의 침묵. 어디서 본 것 같은 그림인데 그게 지금 내 인생이라는 게 문제였다. "이현은 뭐라 했나요?" 내가 묻자 아버지가 잠깐 말을 멈췄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대답을 고르는 듯했다. "전하께서는…… 아직 별다른 말씀이 없으시다." '별말 없다는 게 제일 불안한 신호지.' 누군가 나를 위해 나서줬다면 이미 소문이 다르게 났을 거다. 아무 말도 없다는 건, 이미 저울이 기울었다는 뜻이었다. 서재를 나오면서 다리에 힘이 잘 안 들어갔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손잡이를 꽉 붙잡았다. '침착해. 아직 아무것도 안 정해졌어.'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했지만, 별로 믿음이 가진 않았다. 그날 밤, 어머니가 내 방에 찾아왔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조심스러웠다. 서지혜는 침대 옆에 앉아 내 손을 잡았다. 손이 차가웠다. "많이 놀랐지." "괜찮아요, 어머니." "괜찮을 리가." 어머니가 낮게 웃었다. "네 아버지도 겉으론 괜찮은 척하지만 사실 안 자고 계셔. 아까 서재 앞을 지나는데 불이 켜져 있더라." '그럴 줄 알았다. 저 표정으로 잠이 오겠나.' 넥타이가 비뚤어진 것도 그래서였구나, 라고 뒤늦게 이해가 됐다. 어머니가 나를 안아주며 말했다. "무슨 결과가 나와도 우리는 네 편이다." 목소리가 낮고 단단했다. 나는 그 말에 마음이 좀 놓였다. 등을 쓰다듬는 손길이 어릴 때와 똑같았다. 동시에, 아주 세속적인 계산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나저나 공작가 재산은 몰수 안 되겠지.'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서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이 상황에 재산 걱정이라니, 나 진짜 답 없다.' 어머니가 방을 나가고 나서도 한참을 뒤척였다. 천장의 무늬를 세다가 잠이 들었는지도 몰랐다. 다음 날, 학원에서는 이미 소문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 있었다. 청하 공작 영애가 여신의 아이를 괴롭혔다더라, 곧 왕태자와의 혼약이 파기된다더라, 신전이 직접 나섰다더라. 소문의 진위는 뒤섞여 있었지만, 방향은 하나로 일치했다. 나는 이미 이 이야기 속 악역으로 확정된 상태였다. 강의실에 들어서자 대화 소리가 뚝 끊기는 게 느껴졌다. 평소 인사를 나누던 애들도 슬쩍 시선을 피했다. '이렇게 빨리 손절당하는 것도 재주다.' 복도에서 채아영과 마주쳤다. 그녀는 나를 보고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이 순수한 두려움인지, 연기인지 순간 헷갈렸다. "저, 저는……." 뭔가 말하려다 말고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지나갔다. '뭐야, 저 반응. 나한테 진짜 뭔가 당했다고 믿는 건가.' 찜찜한 기분이 목덜미를 타고 올라왔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 화가 나기보다는 허탈했다. '네가 뭘 당했는지 나도 좀 알고 싶다.' 그날 오후, 왕궁에서 서한이 도착했다. 이현의 인장이 찍힌 편지였다. 시녀가 봉투를 건네줄 때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나는 봉투를 뜯으며 마른침을 삼켰다. "단죄식 날, 공식적으로 혼약 파기를 선언할 것이다." 짧은 한 줄이었다. 장식도 인사말도 없이, 딱 그 문장뿐이었다. 나는 그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글씨체는 여전히 단정했다. '예상은 했지만 진짜 이렇게 대놓고 오네.' 한편으로는 속이 후련했고, 한편으로는 이상하게 서늘했다. 혼약 파기와 신전 고발이 같은 날 같은 자리에서 처리된다는 뜻이었다. '이거, 파혼이 아니라 파멸 세트로 오는 거잖아.' 편지를 든 손이 조금씩 저려왔다. 창밖으로 해가 지고 있었다. 붉은 빛이 방 안까지 길게 들어왔다. 일주일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이제 딱 하루가 남았다. 나는 편지를 서랍에 넣고 침대에 누웠다. 서랍을 닫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내일이면 다 밝혀지겠지.' 하지만 정확히 무엇이 밝혀질지는, 나조차도 짐작할 수 없었다. 눈을 감아도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내일 대전에 서 있을 내 모습이 자꾸 눈앞에 그려졌다. 그 자리에서 나를 바라볼 이현의 눈빛이 어떤 모양일지, 그것만이 자꾸 궁금해졌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