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종주님, 3년이면 충분합니다

4화

별채에 갇힌 지 사흘째 되던 밤이었다. 달빛도 제대로 들지 않는 마당 구석, 잡초가 무릎 높이까지 자란 그 자리에 낡은 나무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나는 처음엔 그냥 쓰레기인가 싶어서 지나쳤는데, 발끝에 뭔가 걸리는 느낌이 들어서 다시 돌아봤다. 먼지가 손바닥 두께로 앉아 있었다. 뚜껑 모서리는 삭아서 부스러지기 직전이었고, 상자 옆면에는 누군가 발로 찬 흔적처럼 움푹 들어간 자국이 있었다. 감찰당 사람들이 별채를 뒤집어놓았을 때 나온 물건인 모양이었다. 값나가는 것도 아니고, 수상한 것도 아니니까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아 이 구석에 그대로 방치돼 있었던 거겠지. 나는 쪼그려 앉아서 뚜껑을 열었다. 경첩이 삐이익, 낡은 쇳소리를 냈다. 안에는 색이 다 빠진 옷가지 몇 벌과, 그 밑에 깔린 작은 목함 하나가 들어 있었다. 옷가지에서는 곰팡이와 오래된 나무 냄새가 뒤섞여 올라왔다. 코끝이 저릿했다. 목함을 꺼내 뚜껑을 열자, 손바느질로 만든 헝겊 인형과 빛바랜 서찰 한 장이 나왔다. [그건 유모님의 유품입니다.] 목소리가 조용히 말했다. "유모?" 나는 손끝으로 헝겊 인형의 실밥을 만지며 되물었다. [도윤 님이 다섯 살 때까지 키워주셨던 분입니다. 그해 겨울, 유행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이상하게도 그 말을 듣자 가슴 안쪽이 저릿했다. 이건 내 감정이 아니었다. 도윤의 것이었다. 그런데도 마치 내 것처럼 명치 아래에서부터 뭔가가 뻐근하게 올라왔다. 도윤의 기억 속 파편들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따뜻한 손, 자장가 같은 흥얼거림, 마른 나뭇가지처럼 갈라진 목소리로 부르던 노래 한 소절,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침을 심하게 하던 모습. 이불 위에 앉아서 콜록콜록 기침을 하다가, 그래도 어린 도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손. 가슴이 답답해졌다. 나는 헝겊 인형을 조심스레 들어봤다. 코가 삐뚤어진 강아지 모양이었다. 눈은 검은 실로 대충 십자로 꿰맨 것이었는데, 그 대충 한 느낌이 오히려 정성스러워 보였다. "···이런 걸 여태 갖고 있었네." 나는 인형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서찰을 펼쳤다. 종이가 누렇게 변색돼서 글씨가 조금 지워져 있었지만, 읽는 건 어렵지 않았다. 『도윤아, 이 유모가 곧 못 볼 것 같구나. 네 어머니 소의 아가씨는 참으로 강인한 분이셨다. 종주님의 뜻을 거스르고도 너를 지켜내신 분이시니, 너도 그 피를 이어받았을 거다. 언젠가 힘든 날이 오면, 어미가 남긴 자주색 패를 믿어라.』 손끝이 떨렸다. 몇 번을 다시 읽었는지 모르겠다. "이 사람도 옥패를 알고 있었어?" [유모님은 강소의 님이 가장 신뢰하던 분이었습니다. 소의 님의 격출 당시 함께하셨던 유일한 사람이지요.] "격출이라니, 그게 뭔데?" [강소의 님은 종주님의 유일한 친딸이자, 가문 사상 최연소로 화무입도에 도달할 것으로 기대받던 천재였습니다.] ···잠깐, 화무입도? 뭔가 아까 들었던 것 같은 단어인데, 그게 정확히 어느 단계였는지 헷갈렸다. "그게 뭔데." [무경에는 아홉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가 심궁 형성, 그다음이 외장경, 내장경, 순환경, 융화경, 조화경, 그리고 여덕경, 천응경을 지나 마지막 아홉 번째가 화무입도입니다.] 나는 손가락을 접어가며 숫자를 세다가 중간에 헷갈렸다. 여덕경까지가 일곱이었나, 여섯이었나. 이거 시험 보면 무조건 틀릴 것 같은 순서였다. "그러니까 내가 방금 두 번째 단계라는 거지?" [정확히는, 심궁 형성과 동시에 외장경까지 단숨에 도달하신 겁니다. 보통 사람은 심궁 형성 이후 최소 몇 년을 수련해야 외장경에 이릅니다.] 그건 좀 신기했다. 무슨 게임으로 치면 튜토리얼 스킵한 느낌인데, 그렇다고 딱히 좋아할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지금 궁금한 건 그게 아니었으니까. "그럼 어머니는 왜 격출됐는데?" 목소리가 이번에는 조금 오래 머뭇거렸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손바닥에 땀이 배는 게 느껴졌다. [강소의 님께서는 화무입도를 목전에 두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그 시기에, 혼외로 도윤 님을 임신하셨습니다.] ······아. 뭔가 짐작은 하고 있었는데, 직접 들으니 또 다른 무게로 다가왔다. [종주님은 후계자로 키우던 딸이 명문 혼약을 거절하고 아이를 가진 것에 분노하셨습니다. 소의 님은 화무입도 문턱에서 수련을 포기하고 가문에서 쫓겨나셨습니다. 그리고 도윤 님을 낳으신 뒤 2년 전, 지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나는 헝겊 인형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도윤을 낳고, 도윤을 키우다가, 도윤이 열세 살이 되던 해에 죽은 어머니. 그 사람은 화무입도라는, 무경의 최고 단계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가문의 후계자였고, 최연소 천재였고, 종주의 유일한 친딸이었다. 그 모든 걸 다 버리고 이 아이 하나를 지켰다는 거였다. [소의 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심궁을 도윤 님께 물려주려 하셨습니다. 그것이 이 자옥생연결법입니다. 원래 인간의 심궁은 유전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소의 님은 화무입도 직전의 심궁을 압축해 패에 각인하는, 전례 없는 방법을 택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자기 심궁을 이 옥패에 담아서 나한테 준 거라고?" [정확합니다. 다만—] 목소리가 잠시 멈췄다. 그 멈춤이 이상하게 불길했다. 원래 이 목소리는 뭘 설명할 때 거의 뜸을 들이지 않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뭔가 심장이 쿵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뭔데."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지만,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다. [압축된 심궁은 완전하지 않고, 봉인된 형태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 봉인이 풀리려면, 도윤 님 스스로 화무입도의 경지에 도달해야 합니다. 그것이 못 되면, 봉인이 자연 붕괴하며 심궁 자체가 파괴됩니다.] "파괴되면 어떻게 되는데." [심궁이 파괴되는 순간, 도윤 님의 혼백도 함께 흩어집니다. 즉, 영혼 소멸입니다.] ······· 나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못 했다. 영혼 소멸. 말이 너무 담백하게 나와서, 처음엔 그게 무슨 뜻인지 곧바로 이해가 안 됐다. 근데 몇 번 곱씹으니까 그 뜻이 명치를 정확하게 강타했다. 그냥 죽는 게 아니라, 아예 없어지는 거라는 소리였다. 재생도, 부활도, 회귀도 없이. 이 세계에서든, 원래 내가 있던 세계에서든, 그냥 지워지는 거. "언제까지." [강소의 님이 각인 당시 계산하신 봉인 유지 기한은, 도윤 님이 18세가 되는 해까지입니다.] 지금 내가 열다섯이니까— "3년." [정확히 3년입니다.] 짜장면이 먹고 싶다. 죽음의 시한부 판정을 받은 순간에 왜 그 생각이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그 생각이 났다. 지구에서 마지막으로 먹었던 게 편의점 삼각김밥이었나, 아니면 야근할 때 시킨 짜장면이었나. 단무지를 몇 개 시켰는지도 기억이 안 났다. 이런 상황에 그런 생각이 나는 나 자신이 좀 어이가 없었지만, 뭐 사람 심리라는 게 그런 거 아닌가. 원래 크게 무서운 일이 닥치면 뇌가 딴 데로 도망치는 법이니까. [도윤 님?] "아, 잠깐만. 정리 좀 하고." 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한 번 문질렀다. 무경 9단계 중 이제 겨우 2단계, 남은 시간 3년, 실패하면 소멸. 게다가 나는 지금 이 좁아터진 별채에 갇혀 있고, 감찰당은 나를 의심하고 있고, 가문 사람들은 전부 나를 죽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정리라고 해봤자, 정리가 될 리가 없는 조건들뿐이었다. "이거, 조건이 좀 너무한데요." [규정은 아닙니다. 소의 님도 어쩔 수 없이 택한 최선이었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 어머니라는 사람이, 자식을 살리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결국 시한폭탄을 몸에 심어주는 거였다니. 그것도 나름의 최선이었다는 게 더 아프게 들렸다. 나는 서찰을 다시 곱게 접어 목함에 넣었다. 손끝이 종이 모서리를 따라 움직이는 게, 마치 그 안에 담긴 뭔가를 흩트리지 않으려는 것처럼 조심스러웠다. "좋아. 그럼 3년 안에 일곱 단계를 뛰어넘으면 되는 거네." [말은 쉽게 하시지만, 실제로는—] "쉽다고 안 했어. 근데 방법은 있는 거지?" 목소리가 처음으로 조금 뜸을 들였다. 그 짧은 침묵 사이에 나는 헝겊 인형을 목함 옆에 살짝 세워놨다. 코가 삐뚤어진 강아지가 나를 물끄러미 보는 것 같아서, 괜히 한 번 쓰다듬었다. [방법은 있습니다. 다만 정통적인 수련법과는 많이 다를 겁니다.] "상관없어. 어차피 나는 처음부터 정통이 아니었으니까." 이 몸도 원래 내 것이 아니고, 이 세계도 원래 내가 살던 곳이 아니고, 이 옥패도 원래 규정에 맞는 물건이 아니었다. 애초에 정통을 따를 처지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방법이 좀 이상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나는 이 판에서 처음부터 룰을 어기고 시작한 존재였으니까. 창밖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자갈을 밟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가까워졌다. 감찰당 사람인가 싶었는데, 발소리가 문 앞에서 멈추더니 낡은 문을 두드렸다. 쿵쿵. 두 번, 정확하게. "강도윤 공자, 종주님께서 부르십니다." 목함을 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듭니다.] 나도 그랬다. 문밖의 발소리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겠다는 듯 다시 한 걸음 다가왔고, 나는 아직 다 삭이지 못한 목함을 상자 안에 서둘러 밀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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