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그날 저녁, 서은은 평소보다 일찍 집에 돌아왔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부터 이상했다.
평소라면 구두를 벗으며 한숨 섞인 인사를 건넸을 텐데, 오늘은 아무 말도 없었다.
발소리가 딱딱했다.
또각, 또각.
구두 굽이 바닥을 찍는 소리에 리듬이 없었다.
'화났다.'
몸이 먼저 알아챘다.
손에는 학교에서 온 편지 봉투가 들려 있었다.
흰 봉투 귀퉁이가 서은의 손가락에 눌려 구겨져 있는 게 보였다.
그 구김의 정도가, 봉투를 쥔 손의 힘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이거 뭐야."
목소리는 낮았지만 끝이 날카롭게 서 있었다.
봉투 안에는 담임의 소견서가 들어 있었다.
종이를 꺼내는 서은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또래 관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상담이 필요해 보입니다.'
그 문장 하나가 이렇게까지 무거울 일인가, 싶었다.
하지만 이 몸의 보호자에게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서은은 그 문장을 읽고 나서 나를 노려보았다.
눈빛에 실망과 걱정이 반쯤씩 섞여 있었다.
정확히는, 걱정을 실망으로 덮으려는 눈빛이었다.
"방으로 들어가."
그 목소리에 예전과 다른 무게가 섞여 있었다.
평소의 잔소리나 타박과는 결이 달랐다.
이건 명령이었다.
나는 순순히 방으로 향했다.
반항해봐야 좋을 게 없다는 걸, 이 몸의 기억이 알고 있었다.
서은이 뒤따라 들어와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평소보다 크게 울렸다.
"침대에 엎드려."
그 말에 몸이 순간 굳었다.
'설마.'
머릿속에서 온갖 가능성이 스쳤다.
마계의 형벌 방식들, 계약 파기의 대가, 배신자의 최후.
하지만 이 몸의 기억이 먼저 반응했다.
두려움보다 익숙함이 앞섰다.
이런 상황이 처음이 아니라는 걸, 몸이 알고 있었다.
관절이 저절로 접히고, 무릎이 이불에 닿는 순서까지 정해져 있었다.
나는 천천히 침대에 엎드렸다.
이불에서 세탁한 지 얼마 안 된 섬유유연제 냄새가 났다.
그 냄새가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평화로워서 오히려 이상했다.
서은이 손을 들어 올리는 소리가 들렸다.
옷깃이 스치는 아주 작은 소음.
그 소음 하나로 다음에 벌어질 일을 예측할 수 있었다.
짜악―
손바닥이 엉덩이를 때리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뜨거운 통증이 순식간에 퍼졌다.
살갗 위에 손 모양이 남는 게 눈에 보이지 않아도 느껴졌다.
"아프잖아요."
"그럼 이상한 소리 하지 말든가."
이상한 소리라니, 대체 뭘 말하는 건지 짐작조차 안 됐다.
짜악―
다시 손이 떨어졌다.
통증과 함께 이상한 감각이 뒤섞여 올라왔다.
부끄러움, 억울함, 그리고 알 수 없는 뜨거움.
'이게 뭐지.'
마계에서는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수천 년을 살면서 고통과 굴욕은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뜨거움은, 목록에 없던 항목이었다.
서은의 손이 닿을 때마다 온몸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단순한 체벌이라고 하기엔, 그 접촉이 너무 선명하게 각인되고 있었다.
손바닥의 크기, 손끝의 각도, 힘이 실리는 순서까지도.
짜악―
"언니, 그만."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조금만 더."
서은의 목소리에도 뭔가 흔들림이 있었다.
확신할 순 없었지만, 그 손끝이 처음보다 조심스러워지고 있었다.
세 번째와 첫 번째의 힘이 눈에 띄게 달랐다.
'봐주는 건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체벌이 끝나고 서은은 내 등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그 손길이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른 온도였다.
뜨거운 손바닥이 아니라, 미지근하고 느린 손바닥이었다.
"미안해. 아프게 하려는 건 아니었어."
나는 얼굴을 베개에 묻은 채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속으로 생각했다.
'왜 이렇게 심장이 뛰지.'
분명 아팠고, 억울했다.
그 감정은 명확했다.
그런데 그 감정 밑에서 다른 무언가가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름 붙이기 애매한 감정.
금지된 감정이라는 걸, 나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마계의 규율에도 없고, 인간계의 상식에도 없는 감정.
'이건 나중에 따로 분석해야겠다.'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서은이 내 이마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는 순간, 손끝이 뭔가에 걸렸다.
작고 단단한 돌기.
손끝이 스치듯 지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그 자리를 눌렀다.
서은의 눈이 순간 커졌다.
동공이 흔들리는 게 코앞에서 보일 정도였다.
"이거 뭐야."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들켰다.'
찰나의 순간에 온갖 대응책이 머릿속을 스쳤다.
기절한 척한다, 창밖으로 뛰어내린다, 마력을 써서 기억을 지운다.
전부 지금 상황에는 어울리지 않는 선택지였다.
나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앞머리를 내렸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방금 만졌잖아, 뿔 같은 게."
서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두려움인지, 혼란인지 구분할 수 없는 떨림이었다.
나는 최대한 태연하게 웃어 보였다.
표정 근육 하나하나를 계산해서 움직이는 기분이었다.
"머리에 뭐가 있긴 한데, 그냥 뾰족한 뼈 같은 거예요. 어릴 때부터 있었어요."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이럴 때 보면 이 몸의 화술은 나쁘지 않았다.
서은은 한동안 나를 응시하다 결국 시선을 거뒀다.
그 눈빛이 완전히 풀리지는 않았다.
의심의 잔재가 눈동자 안쪽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알겠어. 씻고 자."
방을 나가는 서은의 뒷모습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어깨가 풀렸다.
그러나 안심할 수 없었다.
서은의 눈빛 속에 남아 있던 그 이상한 확신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그건 단순한 궁금증의 눈빛이 아니었다.
뭔가를 알아챈 사람의, 확인만 남은 눈빛이었다.
'설마 예전에도 본 적이 있는 건가.'
그 생각이 들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만약 서은이 이 뿔의 정체를 알고 있다면, 지금까지의 태연한 연기는 전부 무의미해진다.
나는 이불을 끌어당기며 앞머리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거울도 없이, 손끝의 감각만으로.
작고 단단한 돌기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그 돌기가, 오늘 밤 이후로 조금씩 자라나고 있다는 걸, 나는 아직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