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마계귀환 금단연가

3화

밤이 되어 방 안에 홀로 남자 마계의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눈을 감으면 그 붉은 하늘이 그대로 눈앞에 펼쳐졌다. 핏빛으로 물든 구름, 그 아래 부서진 성벽의 잔해. 바람에서는 늘 쇠와 재의 냄새가 났다. 불타는 성벽, 갈라진 대지, 그리고 나를 둘러싼 검은 창들. 수백 개의 창끝이 달빛도 없는 하늘 아래서 번뜩였던 그 순간을,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날, 나를 찌른 건 적이 아니었다.' 분명 뒤에서 날아온 창이었다. 앞쪽에는 오직 적들뿐이었으니, 등을 노릴 수 있는 자는 단 하나뿐이었다. 같은 편이라 믿었던 이의 손에서 나온 것이었다. 얼굴은 기억나지 않았다. 수십 번을 되짚어 봐도 그 형체는 안개처럼 흩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 배신의 감각만은 살가죽에 새겨진 것처럼 선명했다. 등을 뚫고 들어오던 그 차가운 충격, 뒤이어 온몸을 타고 오르던 뜨거운 통증. 그리고 무엇보다 선명한 건, 그 순간 느꼈던 황당함이었다. 내가, 마왕이, 등 뒤를 내어준 것부터가 실수였다는 자각. '이유가 무엇이 됐든.' 배신자를 용서할 생각은 없었다. 그자가 누구든, 어떤 사정이 있었든, 등을 노린 순간부터 이미 답은 정해진 것이었다. 배신자에게는 오로지 죽음뿐. 그런데 지금 이 현실에서는, 그 원한을 풀 방법조차 알 수 없었다. 이곳은 마계가 아니었고, 나는 마왕이 아니었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랬다. 나는 다시 이 몸의 주인, 이하은의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마치 남의 집에 들어가 서랍을 뒤지는 기분이었다. 조각조각 흩어진 기억들 속에서 발견한 건 외로움이었다. 친구도 없고, 이해받지도 못하고, 부모조차 무관심한 삶. 학교에서는 이상한 애로 낙인찍혀 있었고, 집에서는 방치에 가까운 취급을 받았다. 식탁에 앉아도 대화가 없었고, 성적표를 내밀어도 반응이 없었다. 오직 서은만이 이 아이의 곁을 지켰다. 엄격하게, 때로는 가혹하게, 그러나 떠나지 않고. 숙제를 봐주고, 지각할 때마다 깨워주고, 밥을 챙겨 먹였는지 확인하는 것도 서은이었다. '그래서 이 아이는 언니를 그렇게 따르는구나.' 기억 속 이하은의 감정은 언니를 향할 때마다 온도가 달라졌다. 다른 모든 관계에서는 냉랭하고 방어적이었는데, 서은 앞에서만큼은 무장이 풀렸다. 나는 그 감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버림받지 않았다는 확신, 그것 하나로 버텨온 삶이었을 것이다. 동시에 경계심도 들었다. 이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정체를 숨기는 것이 우선이었다. 마계의 힘을 다루던 존재라는 걸 누군가 알게 되면, 이 몸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병원에 끌려가거나, 실험 대상이 되거나, 최악의 경우엔 사라지거나. '약한 척을 해야 한다.' 무력한 고등학생, 중2병에 걸린 문제아. 그 껍데기를 유지하는 게 지금은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껍데기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아무도 알아서는 안 되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그 결심을 몇 번이고 되새겼다. 숨긴다, 숨긴다, 숨긴다. 그렇게 되뇌다 잠이 들었다. ... 다음 날 아침, 식탁에는 서은이 먼저 앉아 있었다. 토스트를 씹으며 참고서를 보는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교복을 단정히 갖춰 입고, 머리는 하나로 묶어 넘긴 채, 손에는 형광펜을 쥐고 있었다. 전형적인 우등생의 아침이었다. "머리 잘랐어?"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손으로 앞머리를 만졌다. 심장이 순간적으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아니요." "이상하게 이마가 훤해 보이네." 순간 심장이 덜컥했다. '뿔이 조금씩 자라고 있는 건가.' 어제보다 확실히 커진 느낌이었다. 손끝으로 이마를 더듬어보니, 손톱보다 조금 커진 돌기가 느껴졌다. 머리카락 속에 숨어 있었지만, 조금만 가까이서 보면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감정이 격해질 때마다 조금씩 자라나는 것 같았다. 간밤에 마계의 기억을 떠올리며 분노와 슬픔을 곱씹었으니, 그 여파가 이것이었던 걸까. '앞머리를 더 내려야겠다.' 일단은 그렇게 대처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최대한 무표정을 유지하며 자리에 앉았다. 식탁 위에 놓인 토스트를 씹으면서도, 시선은 계속 서은의 눈치를 살폈다. 서은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시계를 보며 일어섰다. "학교 늦겠다. 나 먼저 나간다." 가방을 어깨에 메고, 신발장 쪽으로 걸어가는 그 뒷모습이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서은이 현관으로 나가려는 순간, 나는 조용히 물었다. "언니, 나 예전에도 이렇게 이상했어요?" 말이 입 밖으로 나오고 나서야, 스스로도 왜 그런 질문을 던졌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알아야 했다. 이 몸의 껍데기가 이전에는 어디까지 벗겨져 있었는지. 서은은 잠시 멈춰 서서 나를 돌아보았다. 그 눈빛에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놀람과 걱정, 그리고 그 아래 깔린 무언가 다른 것.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하기 시작했어." "어떤 소리요?" "마계에서 왔다느니, 뿔이 자란다느니." 서은의 목소리에 씁쓸함이 섞여 있었다. 그 말투에는 단순한 비웃음이 아니라, 오랜 시간 쌓인 피로 같은 것이 배어 있었다. "엄마 아빠는 그냥 관심병이라고 넘겼는데, 나는..." 말을 하다 서은은 멈췄다. 시선이 잠시 허공을 향했다가, 다시 나를 향해 돌아왔다. "나는 뭔데요?" 내 질문에 서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됐어. 학교 늦었어." 서은은 서둘러 신발을 신고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언니는 뭔가 알고 있는 걸까.'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하나는 분명했다. 서은의 그 눈빛 속에는 단순한 짜증이나 걱정만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그것은 마치, 오래 전부터 무언가를 지켜본 사람의 눈빛이었다. 내가 이하은이 아니라는 것을, 어쩌면 이미 눈치채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언제부터였을까. 중학교 2학년 때부터라면, 이 아이는 그때 이미 무언가 다른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설마, 내가 오기 전부터 이 몸에 다른 무언가가 있었던 건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나는 식탁 위에 놓인 빈 그릇을 내려다보며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었다. 풀리지 않는 의문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그날 저녁, 나는 처음으로 그 감정의 정체를 알게 될 것이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