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5개국어 거짓말과 사막왕자

4화

추수제가 사흘 앞으로 다가오자 마을 전체가 들썩였다. 마당마다 곡식을 널어 말리는 냄새가 진동했고, 아이들은 등을 밝힐 종이 초롱을 만들며 골목을 뛰어다녔다. 집집마다 문설주에 붉은 천을 매달았고, 저녁이면 풍악을 연습하는 소리가 담을 넘어 들려왔다. 온 마을이 오랜만의 흥으로 달아오르고 있었으나, 소하는 그 소란 속에서도 마음이 무거웠다. 며칠째 선우결이 밤마다 낯선 언어로 잠꼬대를 하며 뒤척였다. 이불을 움켜쥔 손이 하얗게 질리도록 힘을 주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배어 나왔으며, 그때마다 형이라는 단어가 낮게 반복되었다. 소하는 그 곁에 앉아 등을 쓸어내리며 잠꼬대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곤 했는데, 어떤 밤은 새벽닭이 울 때까지도 선우결의 뒤척임이 멈추지 않아 결국 잠을 설치기도 했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도리는 없었으나, 소하는 그것이 이 아이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한 두려움이라는 것만은 어렴풋이 느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 먼 곳까지 흘러와서도 놓지 못하는 이름이라면. 물어볼 수도 없었다. 말이 통하지 않았으니까. 소하는 그저 선우결의 손을 마주 잡아주는 것으로 위로를 대신할 뿐이었고, 그럴 때마다 선우결은 눈을 뜨지 않은 채로도 손을 꽉 쥐어오곤 했다. 추수제 전날 밤, 소하는 낡은 반닫이 속에서 어머니가 남긴 유일한 유품인 붉은 저고리를 꺼냈다. 색이 바래고 소매 끝이 닳아 있었지만, 그것은 소하가 가진 옷 중 가장 고운 것이었다. 오랫동안 반닫이 밑바닥에 눌려 있던 옷감에서는 옅은 쑥 냄새와 함께 오래된 시간의 냄새가 함께 풍겨 나왔다. 거울 앞에 앉아 저고리를 걸치고 머리를 정성껏 빗어 올리던 소하는, 문득 자신의 모습이 며칠 전 우물에 비친 초라한 얼굴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손을 멈추었다. 빗살 사이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소하는 한동안 말없이 거울 속 자신을 응시했다. 이래봤자 그 애 옆에 서면 초라한 건 여전할 텐데. 그런 생각이 스치자 손끝이 저절로 무거워졌다. 선우결은 저 먼 사막국에서 온 도련님이라 했고, 그 몸에 걸친 것들이며 말투며 걸음걸이까지도 이곳 사람들과는 격이 다르다는 것을 소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아이 곁에 나란히 서기에 자신은 너무나 초라한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자꾸만 마음 한구석을 후벼 팠다. 하지만 소하는 이내 이를 악물고 다시 빗을 들었다. 이렇게 주저앉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선우결이 준 초승달 장신구를 손목에 걸고, 볼에 붉은 물감을 살짝 찍어 발랐다. 손끝으로 볼을 두드리며 색을 고르게 펴는 동안,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은 여전히 낯설었으나, 그 낯섦 속에서 소하는 처음으로 스스로를 향해 조금은 다르게 웃어 보였다. 이 정도면 됐어. 오늘 하루만큼은. 방문이 열리며 선우결이 들어섰다. 그는 소하의 모습을 보자마자 걸음을 멈추고 눈을 크게 떴는데, 그 표정에 담긴 감탄이 어찌나 솔직했는지 소하는 순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선우결은 다가와 소하의 손목에 걸린 장신구를 가만히 매만지더니, 알 수 없는 말을 낮게 속삭였다. 뜻은 몰랐지만 그 목소리의 온도만으로도 충분했다. 선우결의 손끝이 장신구를 지나 소하의 손등에 잠시 머물렀다가, 이내 조심스레 떨어졌다. 선우결의 옷차림 또한 평소와는 달랐다. 어디서 구했는지 알 수 없는 짙은 남색 겉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소맷단에 은실로 놓인 자수가 화톳불 빛을 받으면 은은하게 빛날 듯했다. 그 낯선 격식이 오히려 이 아이가 원래 있던 자리가 어디였는지를 새삼 일러주는 듯했고, 소하는 그 사실을 애써 마음 밖으로 밀어냈다. "가자." 소하가 손을 내밀며 방언으로 말하자, 선우결은 그 손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맞잡았다.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낮 동안 쌓인 근심을 잠시 잊게 해주었다. 마당을 나서기 전, 윤태호가 사립문 근처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딸의 차림새를 보고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을 했다. 손에는 곰방대를 쥐고 있었으나 불도 붙이지 못한 채 만지작거리고만 있었다. "오늘 늦지 말고 일찍 들어와라." 그 말투에는 딸을 향한 애정이라기보다는 그저 형식적인 당부가 담겨 있는 듯했다. "아버지는 오늘도 안 오시는 거죠." 소하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갈렸다. "늘 그렇듯이." 윤태호는 그 말에 뭐라 대꾸하지 못한 채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곰방대를 쥔 손이 미세하게 흔들렸으나, 그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몇 해 전부터 추수제 자리에 나타나지 않은 것이 벌써 관례처럼 되어버렸으니, 오늘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소하는 더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선우결의 손을 이끌며 마당을 벗어났다. 등 뒤로 아버지의 한숨 소리가 들렸으나, 소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뒤돌아본다 한들 달라질 것은 없었으니까. 마을 초입에 다다르자 이미 추수제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있었다. 곳곳에 걸린 초롱불이 노랗게 빛나며 어스름을 밀어내고 있었고, 풍악 소리가 멀리서 흥겹게 울려 퍼졌다. 아이들은 손에 든 종이 초롱을 흔들며 골목을 오가고, 노인들은 마당 한편에 자리를 깔고 앉아 벌써부터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평소라면 소하도 그 흥에 절로 발걸음이 가벼워졌을 텐데, 오늘은 어쩐지 그 소란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그 광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순간, 소하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시선들이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사람들의 눈길이 소하의 저고리와 선우결의 낯선 얼굴을 번갈아 훑으며, 그 안에는 은근한 비웃음과 경계심이 뒤섞여 있었다. 몇몇은 대놓고 소하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낮게 웃음을 흘리기도 했다. "저 애가 그 사막국 도련님이라며?" 누군가 낮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촌장 딸이 별걸 다 맡았네." "그러게 말이야. 아무리 촌장 딸이라도 저런 옷차림은…" 다른 목소리가 뒤를 이었고, 그 뒤로 킥킥거리는 웃음이 따라붙었다. 소하는 그 말에 등줄기가 뻣뻣해지는 것을 느끼며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으나, 걸음만은 흐트러뜨리지 않으려 애썼다. 이런 시선쯤은 익숙했다. 촌장의 딸이라는 이유로, 아버지가 마을 일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다는 소문 때문에, 소하는 어릴 적부터 늘 이런 눈초리를 받아왔으니까. 선우결이 그런 시선들을 눈치챘는지 소하의 손을 더욱 꽉 붙잡았고, 그 온기에 소하는 흔들리던 마음을 겨우 다잡을 수 있었다. 선우결은 말은 알아듣지 못했으나, 사람들의 표정과 어조만으로 무언가 좋지 않은 분위기임을 눈치챈 듯했다. 그의 시선이 잠시 사람들 무리를 훑고 지나갔는데, 그 눈빛에는 낯선 냉기가 어려 있었다. 풍악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마당 한복판에 세워진 커다란 화톳불이 눈앞에 나타났다. 붉은 불꽃이 밤하늘로 치솟아 오르며 주변을 온통 핏빛으로 물들이고 있었고, 그 열기가 멀리서도 얼굴을 데울 정도로 뜨거웠다. 사람들은 불 주위를 돌며 손을 맞잡고 춤을 추었고, 장구 소리와 웃음소리가 어우러져 마당 전체를 뒤흔들고 있었다. 그 불빛 속으로 두 사람이 함께 발을 들이는 순간,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두 사람에게로 쏠렸다. 춤을 추던 이들도 걸음을 멈추었고, 술잔을 기울이던 노인들도 고개를 돌렸다. 잠시 풍악 소리마저 잦아드는 듯한 착각이 들었으나, 그것은 아주 짧은 순간이었을 뿐, 이내 다시 흥겨운 소리가 마당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소하는 누군가의 시선이 유독 오래도록 자신들에게 머물러 있다는 것을 느꼈다. 화톳불 너머, 어둠이 짙게 깔린 마당 한쪽 끝에서 낯선 그림자가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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