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그날 밤, 소하는 선우결에게 자신의 방 한쪽을 내어주고 이불을 정리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았다. 낮에 들었던 강지안의 말이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기 때문이었다.
저 아이가 왜 이런 산골까지 왔는지, 나중에라도 궁금해지면 함부로 캐묻지 마라.
그 말속에 숨은 사연이 무엇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으나, 적어도 이 아이가 평범한 처지는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소하는 이불 끝을 여러 번 접었다 펴며 시간을 끌었는데, 손끝이 자꾸만 헛돌 정도로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방 안에는 낡은 목재 냄새와 마른 풀 향이 배어 있었고, 벽 틈으로 스며드는 밤바람이 촛불을 흔들어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선우결은 낯선 방 안을 신기한 듯 두리번거렸다. 천장의 서까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무언가 묻는 듯한 눈빛을 보내기도 했지만, 소하가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걸 깨닫고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소하가 저녁으로 내온 감자수제비를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릇에서 올라오는 하얀 김을 신기한 듯 코끝으로 좇더니, 조심스레 숟가락을 들어 국물을 떠 먹었다.
그는 곧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 표정이 어찌나 순진하고 아기 같았는지 소하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숟가락질이 서투른 듯 감자 조각을 몇 번이나 놓치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모습이, 마치 처음 걸음을 떼는 짐승 새끼 같았다.
식사가 끝날 즈음 선우결은 자신의 몫을 반쯤 남긴 채 소하 쪽으로 그릇을 밀었다. 소하가 손을 저으며 사양했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고 몇 번이고 그릇을 밀어붙였다. 그 눈빛에는 어떤 고집 같은 것이 서려 있어서, 소하는 그가 말을 하지 못해도 뜻을 굽히지 않는 성정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됐다니까." 소하가 나직이 중얼거렸지만 알아들을 리 없는 말이었다.
결국 소하는 마지못해 남은 수제비를 받아먹었는데, 그 사소한 다툼 속에서 이상하게도 마음이 조금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낮 동안 켕겼던 마음이, 이 낯선 아이의 서투른 배려 앞에서 조금씩 허물어지는 듯했다.
이튿날 아침, 소하는 우물가로 물을 길러 나섰다. 새벽 공기는 차가웠고, 산자락에 걸린 안개가 마당까지 내려와 발끝을 적셨다. 두레박을 내려 물을 퍼 올리며 무심코 수면을 내려다본 순간, 그녀는 그 안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걸음을 멈추었다. 헝클어진 머리와 낡은 저고리, 볕에 그을린 얼굴빛이 오래된 아마 천처럼 칙칙해 보였다.
그 옆으로 뒤따라온 선우결이 우물 난간에 걸터앉아 있었는데, 그가 입은 옷깃에는 은실로 짠 자수가 섬세하게 놓여 있어 아침 햇살에 은은한 금빛으로 반짝였다. 옷자락이 바람에 살짝 흔들릴 때마다 은실이 물비늘처럼 명멸했고, 그 광경이 소하의 눈에는 낯설고도 아득하게 느껴졌다.
너와 나는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이구나.
그 생각이 들자 소하는 두레박 끝을 붙잡은 손에 힘이 스르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손끝에서부터 서늘한 기운이 올라와 팔뚝을 타고 번지는 듯했다. 선우결이 소하의 표정을 살피다가, 그 침묵이 못마땅했는지 곧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은으로 세공된 작은 장신구였는데, 초승달 모양의 펜던트에 낯선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문양의 선은 얇았지만 깊게 파여 있어, 손으로 만지면 그 결이 오롯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는 손짓으로 그것을 소하의 손목에 걸어주려 했다.
"이런 걸 왜……" 소하가 손을 빼려 했지만 선우결은 완강하게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의 손은 작았으나 힘이 제법 셌고, 눈빛에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기색이 뚜렷했다. 소하는 몇 번이나 손목을 비틀며 거부했지만, 결국 그것을 채워주는 손길을 막아내지 못했다.
그의 손끝이 소하의 맨살에 닿는 순간, 소하는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낯선 온기를 느끼며 잠시 숨을 멈추었다. 그 온기는 이상하게도 불쾌하지 않았고, 오히려 무언가 조심스럽게 건네지는 마음 같아서 소하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이 사람은 나한테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의문이 들었지만 답을 구할 방법이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여전히 두꺼운 벽이 가로놓여 있었고, 소하는 그 벽 너머의 마음을 짐작만 할 뿐이었다. 손목에 걸린 장신구를 내려다보며 소하는 문득 자신이 이 화려한 물건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촌장의 딸이라 해도 실권 하나 없는 처지, 방언밖에 모르는 무지렁이, 이런 왕실의 장신구를 받을 자격이 있을까.
두레박을 다시 내리며 소하는 몇 번이나 손목의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 차가운 은의 감촉이 손끝에 닿을 때마다, 자신과는 무관한 세상의 물건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되풀이되었다. 선우결은 그런 소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물동이를 대신 들어보겠다며 두 손을 뻗었다가 무게에 놀라 낑낑대는 시늉을 했다. 그 어설픈 몸짓에 소하는 결국 다시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날 오후, 소하는 몰래 서당 훈장을 찾아가 공용어 몇 마디를 배워보려 했다. 훈장 앞에 앉아 서투르게 입을 벌렸지만, 낯선 발음에 혀가 자꾸 꼬였다. "이건, 이렇게……" 훈장이 몇 번이나 입 모양을 보여주었지만, 소하의 발음은 몇 번이고 어긋났고 급기야 혀를 씹어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다.
훈장은 혀를 차며 "이건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그 말이 틀리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소하는 실망감을 애써 감추며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 손목의 펜던트가 옷자락에 스칠 때마다 차가운 소리를 냈는데, 그 소리가 마치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들렸다.
밤이 깊어지자 선우결이 잠결에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낯선 언어로, 그러나 그 목소리에는 분명한 두려움이 배어 있었다. 소하는 그 옆에서 잠을 이루지 못한 채 그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조심스레 닦아주었다. 이불을 걷어차는 다리며, 미간을 잔뜩 찌푸린 얼굴이며, 마치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 순간 선우결이 갑자기 눈을 번쩍 뜨더니 소하의 손을 붙잡고 무언가를 다급하게 말했다. 손아귀에 힘이 얼마나 세게 들어갔는지, 소하는 손목이 아릴 지경이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그 말속에서 소하는 단 한 단어만을 겨우 알아챘다.
형.
선우결의 눈동자에 서린 두려움이 어둠 속에서도 또렷하게 보였고, 소하는 그 순간 이 아이가 짊어진 사정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 촛불도 꺼진 방 안에서,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오래도록 엇갈렸다. 소하는 붙잡힌 손을 빼지 못한 채, 그저 그 작은 손이 떨림을 멈출 때까지 가만히 기다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