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저녁이 되자 하늘이 어스름한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나는 창가에 앉아 무릎을 끌어안았다.
창틀에 턱을 괴자 차가운 나무의 감촉이 뺨에 닿았다.
뺨의 통증은 이제 거의 가라앉았지만, 마음속 통증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내일이면 아리가 사라진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목 안쪽이 뻐근하게 조여왔다.
창밖으로 보이는 마당 나무가 바람에 흔들렸다.
잎사귀 하나가 떨어져 마당 흙바닥 위를 구르다 멈췄다.
평소라면 그 흔들림이 평온하게 느껴졌을 텐데, 오늘은 유난히 불안하게 다가왔다.
나뭇가지 사이로 새 한 마리가 날카롭게 울며 날아올랐다.
그 소리가 이상하게 귀에 오래 남았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낮에 손바닥에서 느꼈던 그 희미한 푸른빛이 다시 떠올랐다.
나는 무릎에서 손을 풀어 손바닥을 펼쳐 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평범한 손금과 굳은살, 그뿐이었다.
하지만 분명 뭔가 있었다.
그 순간의 감각은 지금도 손끝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어머니가 가르쳐주셨던 초급 마법과는 전혀 다른 감각이었다.
초급 마법을 쓸 때는 배 속 깊은 곳에서 뭔가를 끌어올리는 느낌이었는데, 그때 손바닥에서 일어난 건 오히려 밖에서 안으로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그런 걸 가르쳐주신 적 없는데.)
어머니의 얼굴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따스한 미소와, 늘 걱정스러운 눈빛.
그리고 마지막으로 봤던, 겁에 질린 얼굴.
그 얼굴이 떠오르자 손끝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다시 생각하려 하자 관자놀이가 뜨끔거렸다.
(안 돼, 지금은 그 생각 하지 말자.)
나는 애써 고개를 저으며 그 기억을 밀어냈다.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지그시 눌렀다.
통증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대신 다시 파란 눈의 청년을 떠올렸다.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 얼굴이 이상하게 위로가 됐다.
기억 속에서 그의 눈동자는 마치 물속에 잠긴 하늘 같았다.
(그 사람은 나를 알고 있는 것 같았어. 나도 어딘가에서 그를 알고 있었던 것 같고.)
말이 되지 않는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얼굴을 떠올리는 순간만큼은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인데, 어째서 그 얼굴만 떠올리면 숨이 조금 트이는 걸까.
(누군가 나를 구해준다면... 그런 존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혼자라는 사실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방 안의 공기는 조용했고, 벽 너머로 다른 아이들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 고요함이 오히려 나를 더 작게 만들었다.
그때 문이 조용히 열렸다.
삐걱, 하는 낮은 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아리였다.
손에 작은 접시를 들고 있었다.
문틈으로 스며드는 어둑한 복도 빛이 아리의 옆얼굴을 반쪽만 비추고 있었다.
"이거, 몰래 남겨온 거야."
목소리를 낮춘 채였다.
접시 위에는 조그마한 빵 조각이 놓여 있었다.
가장자리가 조금 부서진, 누군가 몰래 떼어낸 흔적이 보이는 빵이었다.
나는 힘없이 웃으며 접시를 받았다.
손끝에 닿는 접시의 온기가 낮았다.
"고마워."
아리는 내 옆에 앉아 무릎을 끌어안았다.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창밖에서 풀벌레 우는 소리가 낮게 이어지고 있었다.
"...괜찮아? 뺨."
아리의 시선이 잠깐 내 뺨 위에 머물렀다가 다시 창밖으로 향했다.
"괜찮아. 별거 아냐."
거짓말이었지만 아리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창밖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내일 일 말이야."
나는 숨을 죽였다.
빵 조각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 사실... 이런 일 처음이 아니야."
"뭐?"
"인수 거래 말이야. 여기 보육원, 종종 있는 일이야."
나는 놀란 눈으로 아리를 바라봤다.
(그런 일이 반복되고 있었다니.)
가슴 한가운데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몇 달 전에도 한 명 갔어. 그 뒤로 소식 들은 적 없고."
아리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하지만 그 담담함 뒤로 짙은 두려움이 배어 있었다.
말끝이 아주 살짝 떨렸다.
"원장님이 손님한테 돈을 받고 아이를 넘기는 거야. 우리 같은 애들은... 그냥 물건이나 다름없어."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 세계가 이렇게 잔인한 곳이었구나.)
빵 조각의 온기가 손안에서 서서히 식어가는 게 느껴졌다.
"내가 대신 갈게."
말이 튀어나온 건 순식간이었다.
내 입에서 나온 말인데도 낯설게 느껴졌다.
아리가 놀란 눈으로 나를 돌아봤다.
"뭐라고?"
"내가 대신 손님을 만날게. 너 대신."
내 목소리가 스스로도 놀랄 만큼 단단하게 나왔다.
아리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느릿하지만 분명한 몸짓이었다.
"안 돼. 그런다고 해결되는 거 아니야."
"왜?"
"손님이 원하는 건 나야. 네가 간다고 해도 다른 애가 대신 끌려갈 뿐이야."
그 말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맞는 말이야... 이건 나 하나 희생해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야.)
목구멍 안쪽이 다시 뻐근하게 조여왔다.
아리가 내 손을 살짝 잡았다.
작은 손이었지만 그 온기가 묘하게 단단했다.
손가락 사이로 파고드는 온기가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 내가 알아서 할게."
"알아서 한다고... 뭘?"
아리는 대답 대신 옅게 웃었다.
그 웃음은 평소의 웃음과는 조금 달랐다.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지만 눈은 어딘가 먼 곳을 보고 있는 듯했다.
그 웃음 속에 담긴 무언가가 심상치 않았다.
(뭘 하려는 거지, 아리.)
"그냥... 나도 생각해둔 게 있어."
더 이상 캐물어도 아리는 입을 열지 않았다.
몇 번을 더 물었지만 아리는 그저 창밖으로 시선을 돌릴 뿐이었다.
둘 사이에 다시 정적이 흘렀다.
창밖으로 별빛이 하나둘 돋아나고 있었다.
멀리서 개 우는 소리가 짧게 들리다 끊겼다.
빵 조각은 어느새 반쪼가리만 남아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나눠 먹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씹히는 감촉마저 오늘따라 유난히 딱딱하게 느껴졌다.
그날 밤, 아리는 오래 머물지 않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조용했다.
나는 그 조용한 소리가 오히려 더 크게 가슴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그 밤, 나는 쉽게 잠들지 못한 채 아리의 옆얼굴을 오래 바라봤다.
아니, 정확히는 아리가 앉아 있던 빈자리를 바라봤다.
작고 여린 얼굴 속에 숨겨진 각오가 무엇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까.)
불안이 온몸을 조여왔다.
이불을 끌어당겨도 한기는 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그 불안 아래, 나 역시 알아서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결심이 조용히 자라나고 있었다.
손바닥이 다시 희미하게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착각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나는 그 감각을 놓치지 않으려 손을 힘껏 그러쥐었다.
창밖의 별빛은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고, 그 아래 어디선가 아리가 무엇을 준비하고 있을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하나는 분명했다.
내일 아침이 오면, 이 보육원에서 무언가가 되돌릴 수 없이 바뀌어 있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