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아침 햇살이 창틀 틈새로 스며들었다.
먼지 낀 유리창 너머로 참새 우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삐걱거리는 이층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늘도 또 이 몸으로 하루를 시작하는구나.)
손바닥을 펼쳐보니 여전히 작고 여린 손가락이었다.
손톱 끝은 짧게 다듬어져 있었고, 손등에는 어제 낮에 넘어지며 긁힌 작은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이 낯선 몸에 익숙해지지 않았다.
이불을 걷어내자 차가운 공기가 팔을 스쳤다.
창밖에서는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하린아, 안 일어나면 원장님한테 또 혼나."
아래 침대에서 윤아리가 나를 올려다보며 속삭였다.
핑크빛 머리카락이 아침 햇살을 받아 유난히 밝게 빛났다.
와인레드빛 눈동자가 나를 재촉하듯 반짝였다.
머리카락 한 올이 아리의 이마에 붙어 있었지만, 아리는 그것도 모른 채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어제도 늦게 일어났잖아. 오늘은 좀 빨리 일어나자, 응?"
"일어났어, 일어났어."
나는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차가운 나무 바닥이 발바닥에 닿자 정신이 조금 들었다.
발끝으로 바닥의 냉기를 느끼며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리가 먼저 방을 나서며 뒤를 힐끔 돌아봤다.
"빨리 와, 세면대 자리 없어지기 전에."
나는 서둘러 아리의 뒤를 따랐다.
은빛보육원의 아침은 언제나 똑같은 순서로 흘러갔다.
세면대 앞에 줄을 서서 세수를 하고, 식당으로 내려가 죽을 받아먹었다.
세면대 앞에는 이미 몇몇 아이들이 줄을 서 있었고, 차가운 물이 얼굴에 닿을 때마다 작은 비명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졌다.
나는 물을 두 손 가득 담아 얼굴에 끼얹었다.
차가움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자 잠이 조금 더 달아났다.
식당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오래된 나무 냄새가 났다.
오늘의 죽은 어제보다 더 묽었다.
숟가락으로 바닥을 긁어도 건더기는 거의 없었다.
그릇에 담긴 죽은 멀건 회색빛을 띠고 있었고, 표면에는 몇 개의 쌀알만이 힘없이 떠 있었다.
"또 이런 걸 먹으라는 거야?"
정도윤이 인상을 찌푸리며 그릇을 밀어냈다.
열두 살, 이곳 아이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아이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나이답지 않은 피로가 묻어 있었다.
도윤은 팔짱을 낀 채 식당 창밖을 바라보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거면 그냥 물이나 마시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래도 먹어야 해. 안 먹으면 오후까지 배고파."
이나은이 조용히 도윤의 그릇을 자기 쪽으로 살짝 밀며 말했다.
나은은 도윤보다 두 살 어렸지만, 말투는 언제나 어른스러웠다.
박준은 아무 말 없이 죽을 순식간에 비웠다.
작은 몸에 비해 식탐이 늘 컸다.
준이 빈 그릇을 내려놓으며 도윤의 그릇을 슬쩍 쳐다봤다.
"그럼 그거 나 줘도 돼?"
도윤이 픽 웃으며 그릇을 밀어줬다.
"먹을 거면 다 먹어. 난 됐어."
나는 아리와 나란히 앉아 창밖을 바라봤다.
마당의 나뭇잎이 바람에 살랑거렸다.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랬다.
담벼락 위로 참새 두 마리가 앉았다가 곧 날아갔다.
멀리서 원장님의 발소리가 들리는 듣도 했지만, 곧 잦아들었다.
"하린아, 오늘 청소 당번 뭐야?"
아리가 죽 그릇을 비우며 물었다.
"뒷마당. 너는?"
"나는 창고. 아, 지겨워."
아리는 입술을 삐죽였지만 곧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은 뭔가 다른 느낌이야.)
아리는 내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채 숟가락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따 봐, 하린아."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가 끝난 뒤 각자 청소 당번대로 흩어졌다.
나는 마당으로 나가 낙엽을 쓸었다.
빗자루를 쥔 손끝에 나무 손잡이의 거친 결이 느껴졌다.
햇살이 뒷마당 담벼락을 타고 부드럽게 내려왔다.
낙엽 더미 위로 아침 이슬이 아직 남아 있어, 빗자루를 움직일 때마다 축축한 흙냄새가 올라왔다.
멀리서 다른 아이들이 창고 문을 여닫는 소리, 그리고 원장님이 누군가를 부르는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나는 그 소리들을 배경음처럼 흘려들으며 낙엽을 한쪽으로 쓸어 모았다.
한참 낙엽을 쓸다가 문득 손을 멈췄다.
머릿속에서 낯선 통증이 스쳤다.
딱.
관자놀이 부근에서 뭔가 갈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짧지만 선명한 두통이었다.
나는 빗자루를 놓고 이마를 짚었다.
(이게 뭐지? 갑자기 왜...)
손끝이 관자놀이에 닿는 순간,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세상이 잠시 기울어지는 듯한 감각이 뒤따랐다.
순간 눈앞에 붉은 잔상이 스쳤다.
불꽃이 일렁이는 어떤 방.
그리고 슬픈 눈을 한 누군가의 얼굴.
그 얼굴은 낯익은 듯하면서도 도무지 누구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불꽃의 열기마저 피부에 느껴지는 것 같은, 지나칠 정도로 선명한 잔상이었다.
하지만 그 잔상은 눈을 깜빡이는 순간 사라졌다.
다시 눈에 들어온 건 평범한 뒷마당 풍경이었다.
낙엽이 바람에 굴러다녔다.
벌레 우는 소리가 여전히 들렸다.
(방금... 뭐였을까.)
나는 다시 빗자루를 쥐었다.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아챘다.
애써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낙엽을 쓸어 담았다.
하지만 뒷목이 서늘한 느낌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빗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자 손바닥에 나무 결이 더 깊게 박히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몇 번이고 고개를 저으며 방금 본 것이 그저 착각이었기를 바랐다.
낙엽 더미는 어느새 작은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것을 자루에 담으며, 나는 자꾸만 관자놀이 쪽으로 손이 가는 걸 억눌렀다.
그날 오후, 나는 원장실 앞을 지나가다 걸음을 멈췄다.
안에서 낮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송미란 원장의 목소리였다.
평소와 다른, 은근히 들뜬 어조였다.
복도의 나무 바닥이 발밑에서 살짝 삐걱거렸다.
나는 그 소리마저 신경 쓰여 발끝에 힘을 뺐다.
"...내일이라고 했죠? 준비는 다 됐습니다."
그 말 뒤로 짧은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늦추고 문 앞에서 귀를 기울였다.
문틈으로 스며나오는 목소리는 낮았지만, 평소 아이들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결을 가지고 있었다.
어딘가 사무적이면서도, 묘하게 흥분이 섞인 목소리였다.
"예, 예. 걱정 마세요. 이쪽은 문제없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는 듯한 소리가 짧게 들렸다.
하지만 더 이상 들리는 말은 없었다.
(내일... 뭐가 있는 거지.)
괜한 불안감이 가슴 한켠에 자리 잡았다.
낮에 스쳤던 그 낯선 두통과 붉은 잔상이 다시 떠올랐다.
그리고 왠지, 그 두 가지가 서로 무관하지 않다는 예감이 들었다.
나는 문 앞에서 조금 더 서 있다가, 발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심장이 평소보다 빠르게 뛰고 있었다.
복도의 창문으로 들어오는 오후 햇살이 유난히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 빛이 닿는 자리와 그림자가 진 자리의 경계가, 오늘은 이상하게 선명해 보였다.
복도 끝에서 아리가 창고 청소를 마치고 나오는 게 보였다.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채 웃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 순수한 웃음을 보자 방금 느꼈던 불안이 잠시 옅어졌다.
"하린아, 여기서 뭐 해? 원장실 앞에서."
아리가 머리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다가왔다.
"아니야, 그냥 지나가던 길이었어."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 보였다.
아리는 별다른 의심 없이 내 옆에 나란히 섰다.
"오늘 창고 청소 완전 힘들었어. 거미줄이 얼마나 많던지."
아리가 팔을 내밀어 소매에 묻은 먼지를 보여주며 투덜거렸다.
나는 그 모습에 작게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사라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마음 깊은 곳에 조용히 가라앉아,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우리는 함께 복도를 걸어 나갔다.
창밖으로 넘어가는 오후 햇살이 마당의 나뭇잎 사이로 부서지듯 흩어지고 있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풍경이었지만, 나는 그 평화로움 뒤에 숨겨진 무언가가 조금씩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원장실 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고, 그 안에서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내일, 이곳에 무언가가 찾아온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