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그날 밤, 나는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침대에 누운 채로 천장을 바라봤다.
낡은 형광등의 미세한 떨림이 눈에 들어왔다.
아리는 옆 침대에서 이미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숨소리가 일정하게 오르내리는 걸 듣고 있으니 오히려 정신이 더 또렷해졌다.
창밖으로 스며드는 달빛이 방 안을 푸르게 물들였다.
그 빛이 벽지 위를 스치듯 지나가며 낡은 얼룩을 더 짙게 만들었다.
낮에 느꼈던 두통의 잔상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관자놀이 안쪽에서 뭔가가 지끈거리는 감각이 남아 있었다.
(그냥 잠깐 어지러웠던 걸 거야.)
스스로를 다독이며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안쪽으로 붉은 잔상이 슬쩍 스쳐 지나갔다가 사라졌다.
하지만 잠은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몸을 이쪽저쪽으로 뒤척일 때마다 침대 프레임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한참을 뒤척이다 결국 얕은 잠에 빠져들었다.
꿈속에서 나는 낯선 복도를 걷고 있었다.
발밑에서 서늘한 감촉이 느껴졌다.
벽에는 검붉은 무늬가 새겨진 융단이 깔려 있었다.
그 무늬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 같았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소리가 이상하게 멀리서 울리는 듯 들렸다.
멀리서 타는 냄새가 스멀스멀 풍겨왔다.
처음엔 희미했던 그 냄새가 걸음을 옮길수록 점점 짙어졌다.
목 안쪽이 살짝 매캐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복도 끝, 커다란 문 하나가 열려 있었다.
문틀 주변으로 그림자가 유난히 짙게 깔려 있었다.
그 안으로 들어서자 방 전체가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주황빛과 붉은빛이 뒤엉켜 벽을 타고 올랐다.
불꽃이 벽지를 핥으며 검은 자국을 남겼다.
가구들이 검게 그을린 채 무너져 내렸다.
천장에서 뭔가가 툭,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불길 한가운데, 누군가 서 있었다.
키가 큰 남자였다.
검은 머리카락이 불빛을 받아 검붉게 번들거렸다.
그 사이로 드러난 두 눈이 파랗게 빛났다.
불길 속에서도 그 눈빛만은 이상할 정도로 선명했다.
표정은 무너질 듯 슬퍼 보였다.
입술이 무언가 말하려는 듯 움직였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그를 바라봤다.
발이 바닥에 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누구지... 처음 보는 사람인데, 왜 이렇게 낯설지 않지.)
그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불길이 그의 손끝에서 갈라지듯 옆으로 물러났다.
마치 불이 그의 손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입 모양이 조금 더 크게 움직였다.
"...대하지 말아줘."
목소리가 귓가에 스치듯 들렸다가 곧 흩어졌다.
그 잔향이 마치 물속에서 듣는 소리처럼 뭉개져 있었다.
그 순간 방 전체가 산산이 부서지는 듯한 소음이 울렸다.
쩌엉.
유리가 깨지는 것 같은, 동시에 뭔가가 무너지는 것 같은 소리였다.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관자놀이에서 맥박이 그대로 느껴질 정도였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잠옷이 등에 축축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창밖은 여전히 어두웠고, 아리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그 규칙적인 숨소리만이 방 안의 유일한 소리였다.
(꿈이었나...)
손으로 가슴을 짚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갈비뼈 안쪽이 뻐근하게 당겨왔다.
방금 본 장면이 너무 선명해서 꿈이라 부르기가 어색할 정도였다.
불타는 방, 파란 눈의 남자, 그리고 그 목소리.
눈을 감으면 그 장면이 그대로 눈꺼풀 안쪽에 그려질 것 같았다.
"적대하지 말아달라..."
작게 되뇌어 봤지만 무슨 뜻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나랑 무슨 관계가 있는 거지, 그 남자.)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댔다.
차가운 벽의 감촉이 등을 통해 그대로 전해졌다.
다시 눈을 감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대신 낮에 스쳤던 두통과 붉은 잔상이 다시 떠올랐다.
그 잔상 속 얼굴이 방금 본 남자의 얼굴과 겹쳐졌다.
(같은 사람이었어. 낮에 본 것도, 지금 꿈에서 본 것도.)
소름이 팔뚝을 타고 올라왔다.
나는 이불을 목까지 끌어당겼다.
이불의 감촉조차 평소와 다르게 서늘하게 느껴졌다.
방 안은 고요했다.
창밖에서 풀벌레 소리가 낮게 이어졌다.
평소라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던 그 소리가, 오늘은 어딘가 삐걱거리는 듯한 낯선 파문처럼 들렸다.
같은 소리인데도 귀에 닿는 감촉이 달라져 있었다.
(뭔가 잘못되고 있어.)
확신할 수 없는 불안이 가슴에 자리 잡았다.
그 불안은 딱히 형태가 없었지만, 무겁게 가슴 한복판에 내려앉아 있었다.
나는 그날 밤 끝내 다시 잠들지 못했다.
창밖이 조금씩 밝아지는 걸 지켜보며 새벽을 그대로 흘려보냈다.
다음 날 아침, 눈 밑이 뻑뻑한 채로 몸을 일으켰다.
세면대에서 찬물로 얼굴을 씻자 정신이 겨우 조금 돌아왔다.
거울 속 내 얼굴은 평소보다 조금 창백해 보였다.
아리가 옆에서 칫솔을 물고 나를 힐끗 쳐다봤다.
"하린아, 얼굴이 왜 그래?"
"...잠을 못 자서 그런가 봐."
짧게 대답하고는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꿈 이야기를 꺼낼 자신이 없었다.
식당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아침 특유의 된장국 냄새가 코끝에 스쳤다.
평소라면 반갑게 느껴졌을 그 냄새가 오늘은 유난히 낯설게 느껴졌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마다 어젯밤의 잔상이 발밑에 따라붙는 기분이었다.
원장실 문이 유난히 크게 열려 있었다.
평소라면 늘 닫혀 있던 문이었다.
안에서 송미란 원장이 서류를 뒤적이며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손끝으로 서류 모서리를 툭툭 두드리는 동작이 반복됐다.
표정이 평소와 달리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 날카로운 긴장이 배어 있었다.
정확히 무슨 말을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다만 "확인", "그쪽", "아직은" 같은 토막 난 단어들이 간간이 새어 나왔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 모습을 바라봤다.
계단 난간을 쥔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어젯밤 꿈속 목소리가 다시 머릿속을 스쳤다.
(적대하지 말아달라... 그리고 오늘, 원장님이 저렇게 굳어 있는 이유는 뭐지.)
아리가 뒤에서 내 옷자락을 슬쩍 잡아당겼다.
"하린아, 안 내려가?"
"...가야지."
대답은 했지만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원장실 안쪽, 송미란 원장의 시선이 잠깐 창밖을 향했다가 다시 서류로 돌아갔다.
그 짧은 시선의 방향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뭔가가 어긋나기 시작하는 소리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