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결계 정비 의식이 끝난 뒤로도 나는 왕실을 드나들 일이 몇 번 더 생겼는데, 매번 신성수 결계의 상태를 점검하고 기록을 남기는 것이 내 공식적인 임무였다. 문제는 그 임무를 수행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점이었는데, 담당 신관이 배정한 요일과 시간이 매번 조금씩 달랐고, 나조차도 전날 밤에야 다음 날 일정을 통보받는 식이었다. 그런데도 하준은 이상하게도 정확히 내가 있을 시간에 그 자리에 있었다. 나는 처음에는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 넓은 정원에서 마주친 게 우연이 아니면 뭐겠어.' 왕실 정원이 아무리 넓다 한들 산책하는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닐 테니 겹칠 수도 있는 거라고,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했다.
하지만 세 번째, 네 번째 마주침이 이어지면서 나는 그 우연이라는 단어가 점점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특히 내가 신성수 결계를 살피는 요일과 시간이 매번 조금씩 달랐는데도 하준은 어김없이 같은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스케치북을 펴놓고 있었다는 사실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그 나무 아래 자리는 정원에서도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이었고, 하준이 굳이 그 자리를 고수할 이유가 있다면 그건 풍경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를 보기 위해서일 거라는 의심이 들었다. 나는 그 의심을 애써 눌러 담으며, 그냥 그가 나무 그늘을 좋아하는 사람일 뿐이라고 몇 번이나 되뇌었다.
한번은 내가 일부러 예정된 시간보다 반나절 일찍 정원에 들어선 적이 있었다. 순전히 궁금함 때문이었는데, 정말로 우연히 마주치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확인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번엔 없겠지. 반나절이나 일찍 왔는데 설마.'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는데, 걷는 내내 손목을 매만지는 버릇이 다시 나온 걸 보면 나도 꽤 긴장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정원 나무 아래에는 이미 하준이 앉아 있었고, 나를 발견한 그의 표정에는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당황스러움이 스쳤다가 곧 익숙한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그 짧은 균열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마치 사진을 찍듯 그 순간을 머릿속에 새겨두었다.
"오늘은 왜 이렇게 빨리 왔어?" 하준이 그렇게 물었을 때, 나는 오히려 그 질문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원래 정해진 시간이 아니었으니 늦게 온 게 아니라 일찍 온 건데, 그 말투에는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들킨 사람의 조바심이 묻어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어, 오늘 일찍 왔네?" 정도로 넘어갈 일을 굳이 "왜"라는 단어까지 붙여서 물어야 했을까. 나는 그 질문 하나에서 이미 그가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그냥 궁금해서." 나는 짧게 답하며 그의 옆에 앉았는데, 이번에는 굳이 스케치북을 슬쩍 넘겨다보았다. 거기에는 신성수의 결계 문양이 몇 장에 걸쳐 반복해서 그려져 있었고, 그 문양 옆에 작은 숫자와 기호들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취미치고는 이상하게 사무적인 기록에 가까워 보여서 나는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문양 아래 적힌 숫자들은 날짜처럼 보이기도 했고, 어떤 건 시각을 표기한 것처럼도 보였다. 마치 실험 노트 같았다. "이거 뭐야? 그냥 그림 아니었어?" 하준은 순간 스케치북을 닫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는 걸 깨달았는지 손을 멈추고 짧게 답했다. "결계의 흐름을 기록하는 거야." 그 대답은 사실이었지만, 완전한 사실은 아니었다는 걸 나는 훨씬 뒤에야 알게 되었다.
나는 그 문양들 사이에 섞여 있는 작은 스케치 하나를 발견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내 손끝을 그린 그림이었다. 손끝에서 빛이 흘러나오는 모습을 여러 장에 걸쳐 각도별로 그려놓은 그 그림들은, 마치 무언가를 관찰하고 기록하려는 사람의 습작처럼 보였다. 어떤 장은 손끝의 빛이 선명했고, 어떤 장은 그 빛이 희미하게 끝이 갈라진 것처럼 표현되어 있었다. 그 차이가 무엇을 뜻하는지 나는 그 자리에서는 알 수 없었다. '내 손을 왜 이렇게까지 자세히 그렸지.' 나는 그 순간 얼굴이 붉어지려는 걸 억지로 참으며 애써 가벼운 말투로 물었다. "내 손 그린 거야? 이렇게 자세히?" 하준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돌렸는데, 그 침묵이 오히려 더 많은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스케치북을 다시 넘겨보고 싶었지만, 그가 슬쩍 팔로 가리는 바람에 더는 볼 수 없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우리의 만남이 단순한 우연이나 반가움의 연속이 아니라는 걸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다. 하준은 나를 만날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내 손끝을, 그리고 내가 힘을 다룰 때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는데, 그 시선은 애정이라기보다는 관찰에 가까웠고, 그 관찰에는 뭔가를 확인하려는 조심스러운 긴장이 배어 있었다. 처음에는 그 시선이 다정함인 줄 알았다. 나를 좋아해서 자꾸 쳐다보는 거라고,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착각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시선의 질감이 달랐다는 걸 알게 됐다. 애인을 보는 눈과 환자를 살피는 눈은 다르다는 걸, 나는 그때 처음 배웠다. '설마 나한테 문제가 있다는 걸 얘가 먼저 알고 있는 건가.' 그 생각이 스치자 나는 등줄기가 서늘해졌는데, 애써 그 생각을 떨쳐내려 해도 한번 자리 잡은 의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로부터 며칠 뒤, 나는 다시 정원을 찾았는데, 이번에는 하준과 함께 있던 다른 남자를 처음으로 소개받았다. 서준이라는 이름의 그 남자는 하준의 왕실 업무를 절반쯤 나눠 맡고 있다고 했는데, 체구는 하준보다 조금 왜소했지만 눈빛만은 훨씬 날카로웠다. 나를 보자마자 가볍게 목례를 하며 인사를 건넸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성녀님." 그 인사말이 유독 의미심장하게 들려서 나는 잠깐 그를 살펴보았는데, 서준은 하준과 나 사이를 오가는 시선이 유난히 빠르고 조심스러워서, 마치 자신이 뭔가 알아서는 안 되는 걸 알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손끝으로 옷깃을 만지작거리는 모습도, 말을 하다 말고 하준을 힐끗거리는 버릇도, 전부 뭔가를 숨기고 있는 사람의 신호처럼 읽혔다. '이 사람도 뭔가 알고 있구나.' 그 짐작이 확신으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는데, 서준이 자리를 뜨며 나직하게 흘린 한마디가 그 확신을 굳혀버렸다. "의식 때 손끝이 흐려지시는 거, 요즘 다들 조심스레 지켜보고 있으니 너무 걱정 마세요."
그 한마디를 듣는 순간 나는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흐려진다는 표현을, 그것도 요즘 다들 지켜보고 있다는 말을, 나는 여태 나 혼자만의 비밀이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이 나를 더 두렵게 만들었다. 다들이라는 말이 정확히 몇 명을 가리키는 건지, 그들이 언제부터 알고 있었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하준을 돌아보았는데, 그의 표정은 순간적으로 굳어졌다가 곧 평소의 무표정으로 되돌아갔지만, 그 짧은 틈 사이로 스친 것은 분명한 죄책감과 오래 참아온 무언가였다. 서준이 걸어가는 뒷모습을 붙잡고 싶었지만, 발이 땅에 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얘도 알고 있었어.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면서, 나한테는 한 번도 말하지 않았어.' 나는 그 순간 정원에 서서, 이제까지 반복되던 모든 우연한 만남들이 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뒤에 내가 감히 짐작조차 못 했던 어떤 무거운 진실이 숨어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실감했다. 하준의 스케치북 속 손끝 그림들이 다시 떠올랐다. 빛이 선명했던 장과 흐릿했던 장, 그 사이의 간격. 그게 단순한 습작이 아니라 어떤 기록의 흐름이었다면, 나는 그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 기다림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를 반드시 물어야 했다. 하지만 그날 나는 결국 아무것도 묻지 못한 채 정원을 나섰고, 등 뒤에서 느껴지는 하준의 시선만이 오래도록 따라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