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열다섯 살이 되던 해 초여름, 나는 오랜만에 왕실 정원을 방문할 일이 생겼다. 신성수의 결계를 새로 정비하는 의식에 성녀가 참관해야 한다는 이유였는데, 그 소식을 대신관에게 전해 듣는 순간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드디어 궁 밖 나들이다.' 물론 그 쾌재의 절반은 하준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에서 온 것이었지만, 나머지 절반은 순수하게 신전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해방감에서 온 것이었다. 성녀라는 직함이 붙은 뒤로는 신전 담벼락 안에서 하는 일이 대부분이었으니까.
마차를 타고 가는 내내 나는 몇 번이나 옷깃을 매만지고 머리카락을 정돈했는데, 맞은편에 앉은 대신관이 그 모습을 힐끔거릴 때마다 나는 손을 무릎 위에 얌전히 내려놓는 척했다. '설레는 거 티 내면 또 무슨 예언으로 둔갑할지 몰라.' 신전 사람들은 성녀의 감정 하나하나에 신탁을 갖다 붙이는 버릇이 있어서, 얼굴이 조금이라도 붉어지면 '성녀님의 마음에 신성한 기운이 요동친다'는 식으로 해석해버렸다. 나는 그 버릇이 지긋지긋했지만 이번만큼은 순순히 얌전한 얼굴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마차에서 내려 정원으로 들어서자 향긋한 풀냄새와 함께 낯익은 정원수들이 눈에 들어왔다. 예전에 하준과 함께 뛰어놀던 그 나무들이었다. 시간이 지났다고 나무의 모양이 바뀌지는 않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걷다가 저 멀리 나무 아래 낯익은 실루엣을 발견하고 나는 걸음을 멈췄다. 그 사람이 하준이라는 걸 알아차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준은 그새 훌쩍 자라 있었다. 예전의 소년다운 각진 얼굴선은 어느새 조각가가 몇 달을 매달려 다듬었을 법한 단정한 윤곽으로 바뀌어 있었고, 금빛 머리카락은 여전했지만 이제는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대리석 조각의 잔물결처럼 흔들렸으며, 그 유명한 자주색 눈동자는 여전히 낯선 보석처럼 짙었지만 예전보다 훨씬 더 깊고 차가운 빛을 담고 있었다. '왕태자라는 게 이런 식으로도 사람을 바꿔놓는구나.' 나는 그 변화 앞에서 순간 말을 잃었는데, 하준은 무릎 위에 스케치북을 펴놓은 채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고, 그 자세만큼은 예전 그 나무 그늘 아래에서와 똑같았다. 손목을 살짝 기울여 연필을 쥔 각도, 고개를 조금 숙인 자세, 그 모든 게 몇 년 전 여름과 겹쳐 보여서 나는 잠시 시간이 거꾸로 흐른 듯한 착각에 빠졌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야." 그러자 하준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는데, 그 짙은 눈동자가 나를 훑는 순간 나는 이상하게도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손끝을 매만졌다. "그래." 짧은 대답이었지만 예전과 달리 그 안에 담긴 온도가 미묘하게 달라져 있다는 걸 느꼈는데, 반가움보다는 조심스러움이 먼저 앞서 있는 듯한 말투였다. 예전의 하준이었다면 벌떡 일어나 내 손목을 잡고 어디론가 끌고 갔을 텐데, 지금은 그저 자리에 앉은 채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 변화가 어색해서 애써 화제를 돌렸다. "뭐 그리고 있었어?"
하준은 잠시 망설이다 스케치북을 슬쩍 내 쪽으로 기울여 보였는데, 거기에는 정원의 나무와 신성수의 결계 문양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었고, 그 옆 구석에 아주 작게 사람의 옆모습이 스케치되어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옆모습은 다름 아닌 나였다. 눈매도, 콧대의 곡선도, 심지어 내가 습관처럼 귀 뒤로 넘기는 머리카락 한 줌까지도 정확하게 담겨 있어서, 나는 순간 이걸 언제부터 그리고 있었던 건지 궁금해졌다.
얼굴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지만,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이거 나야?" 하준은 대답 대신 스케치북을 슬쩍 덮으며 시선을 돌렸는데, 그 모습이 예전 나무 그늘 아래서 '보지 마'라고 하던 소년의 모습과 겹쳐 보여서 나는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몇 년이 지나도 저 반응은 똑같네.' 나는 그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었는데, 하준은 그 웃음소리에 귀 끝이 살짝 붉어지는 걸 숨기려는 듯 스케치북을 옆구리에 바짝 끼워 넣었다.
우리는 잠시 나무 그늘 아래 나란히 앉았고, 나는 그 옆에서 예전처럼 편안함을 느꼈는데, 다만 예전과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예전에는 어깨가 스치거나 손이 닿아도 아무렇지 않게 넘겼던 사이였는데, 지금 하준은 나와의 거리를 정확히 한 뼘쯤 유지하며 앉아 있었고, 그 거리는 아무리 좁혀보려 해도 좁혀지지 않는 묘한 완강함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슬쩍 몸을 기울여 거리를 줄이면, 하준은 자연스럽게 그만큼 몸을 물렸다. 마치 자석의 같은 극처럼, 아무리 밀어붙여도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는 그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조금은 서운하기도 했다.
"요즘 많이 바쁘다고 들었어." 내가 그렇게 말을 꺼내자 하준은 스케치북에 시선을 고정한 채 짧게 답했다. "왕실 업무가 늘었으니까." 그 대답이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 말투에서 뭔가 더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는데,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짚어낼 수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그림 그릴 시간은 있네." 나는 괜히 그렇게 말을 붙였다. 하준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짬을 내는 거야."라고 답했는데, 그 말에 나는 왜인지 그 짬이 나를 위한 것이었나 싶은 기대를 품었다가 곧 스스로 그 기대를 지워버렸다. '설레발치지 말자.'
예전에는 손을 잡고 정원을 뛰어다니던 사이였는데, 지금은 손끝만 스쳐도 그가 슬쩍 손을 거두는 걸 나는 이미 두 번이나 목격한 참이었다. 한 번은 내가 스케치북 모서리를 잡으려다 손등이 닿았을 때였고, 또 한 번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무심코 손을 뻗었을 때였다. 둘 다 하준은 아무 말 없이, 그러나 분명하게 손을 물렸다. '설마 내가 뭘 잘못했나.' 나는 그 거리감의 이유를 왕실 업무나 신분의 무게 정도로 짐작하고 넘기려 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게 전부는 아닐 것 같다는 의심이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멀리서 신관들이 제단을 정비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대신관이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넘어왔다. "성녀님,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나는 그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계 정비 의식이 시작될 시간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나는 옷자락을 털며 제단 쪽으로 걸음을 옮겼는데, 그 순간 하준이 뒤에서 나를 불렀다. "조심해." 짧은 그 말에 나는 돌아보며 웃었다. "의식 몇 번을 치렀는데, 뭘 조심해." 신성수의 결계 정비는 매년 있는 일이었고, 나는 그동안 단 한 번도 다친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하준의 목소리에는 유난히 진지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하준의 표정은 웃고 있지 않았고, 그 눈빛에는 내가 읽어내지 못하는 무거운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나는 그 눈빛을 뒤로하고 제단으로 향했는데, 결계 의식을 치르는 내내 등 뒤에서 느껴지는 하준의 시선이 유난히 오래, 그리고 유난히 집요하게 나를 따라오고 있다는 걸 느꼈다. 신성수의 뿌리에서 뻗어 나온 결계의 문양이 손끝을 따라 빛나고, 대신관이 낮게 읊는 기도문이 정원 전체로 울려 퍼지는 그 순간에도, 나는 등허리에 꽂히는 그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렇게 볼 필요까지는 없는데.' 나는 그 시선이 그저 오랜만의 반가움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지만, 의식이 끝나고 손끝에서 빛이 잦아드는 순간, 하준의 눈동자에 스친 표정이 반가움이 아니라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사람의 것이었다는 걸, 나는 그날 밤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상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마치 내가 살아 있는지, 무사한지를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만 안심이 되는 사람의 표정처럼, 그 눈빛은 오래도록 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