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성녀의 유효기간

3화

그날 이후로 나와 하준은 정해진 절차에 따라 정기적으로 만나게 되었는데, 신전과 왕실 양측 모두가 그 만남을 '운명의 수호자 의식'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부르며 챙겨주었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 둘 사이의 만남은 갈수록 형식적으로 변해갔다. 처음 몇 년은 그래도 정원 나무 그늘에서 그림을 구경하거나 신전 뜰을 함께 산책하는 정도의 여유가 있었는데, 나는 그 시간을 손꼽아 기다리며 하준이 새로 그린 그림을 보는 게 유일한 낙이라고 생각했다. '오늘은 무슨 새를 그렸을까.' 어떤 날은 매 그림이었고, 어떤 날은 이름도 모르는 들꽃 그림이었는데, 하준은 그림 밑에 늘 작게 날짜만 적어두었지 별다른 설명은 붙이지 않았다. 내가 "이건 무슨 꽃이야?" 하고 물으면 하준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몰라." 하고 짧게 답했는데, 그 성실한 무성실함이 오히려 웃겨서 나는 자주 웃음을 참아야 했다. 하준은 여전히 말이 짧고 무뚝뚝했지만, 종이를 내밀 때만큼은 조금 다른 얼굴을 했다는 걸 나는 눈치채고 있었다. 눈썹이 아주 살짝 풀리고, 종이를 쥔 손끝이 평소보다 느리게 움직인다는 것을. '너는 그림 줄 때만 사람 같아 보여.' 나는 그 말을 입 밖에 낸 적은 없었는데, 괜히 말했다가 하준이 다음부터 그림을 안 줄까 봐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그 정도로 나는 그 작은 시간을 소중히 여겼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 신전에서의 내 생활도 조금씩 달라졌다. 여전히 신관들은 내게 존경 어린 거리감을 유지했지만, 나는 이제 그 거리감을 당연한 배경처럼 받아들일 만큼 자라 있었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힘을 다스리는 수련 역시 익숙한 일상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아침에는 정원 동쪽 회랑에서 호흡을 가라앉히며 빛을 손끝에 모으는 훈련을 했고, 저녁에는 그 빛을 다시 몸속으로 갈무리하는 훈련을 했는데, 두 과정 모두 지루할 만큼 단순한 반복이었지만 나는 그 반복 속에서 묘한 안정감을 느꼈다. 마치 매달 월급 받는 날짜가 정해진 회사원처럼, 나는 그 규칙 안에서 내 위치를 확인하곤 했다. '오늘도 무사히 흘러갔구나.' 다만 열두 살 무렵부터, 나는 이상한 걸 느끼기 시작했다.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빛의 양이 예전과 미묘하게 달라졌다는 느낌이었는데, 처음에는 그저 성장하면서 힘의 흐름이 안정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몸이 자라면 힘도 자리를 잡는 거겠지.' 대신관도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어른스러워지는 신호라며 흡족해했다. 대신관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손을 모으고 고개를 끄덕이는 버릇이 있었는데, 나는 그 몸짓을 볼 때마다 안심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더 불안해해야 하는 건지 헷갈렸다. 하지만 신성수에 힘을 공급하는 의식을 치를 때마다 나는 남들이 알아채지 못하는 아주 작은 이질감을 느꼈다. 의식은 매달 보름날 밤, 신전 지하의 제단에서 치러졌는데, 그 제단은 영원동토에 뻗어 있다는 신성수의 뿌리와 직접 연결된 통로라 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늘 서늘했고, 제단 앞에 서면 공기가 한 겹 더 무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 무게감마저 이제는 익숙한 것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 제단 위에 손을 얹고 눈을 감은 채 마음속 깊은 곳에서 빛을 끌어올리는 과정을 반복했는데, 처음 몇 년간은 그 빛이 마치 샘물처럼 끝없이 솟아났다면 어느 순간부터는 우물 바닥을 긁는 듯한 느낌이 섞이기 시작했다는 걸 나 말고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이게 원래 이런 느낌이었나.' 손끝을 타고 흘러나가는 빛의 결이 예전보다 성글어졌다는 걸, 아무리 설명하려 해도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늘 마시던 물맛이 아주 살짝 달라졌는데 그게 물이 상해서인지 그냥 내 입맛이 변해서인지 구분할 수 없는 것과 비슷했다. 나는 그 미묘한 차이를 대신관에게 굳이 말하지 않았는데, 딱히 숨기려던 건 아니었고 그저 말로 설명할 방법이 없었을 뿐이었다. 그 무렵 하준은 왕태자로서 정식으로 수업을 받기 시작했고, 우리의 만남은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이전에는 한 달에 몇 번씩 얼굴을 볼 수 있었지만, 이제는 계절이 바뀔 때쯤 겨우 한 번 마주치는 정도로 뜸해졌는데, 그마저도 짧은 인사와 형식적인 안부로 끝나는 일이 많았다. 한번은 신전 정문에서 마주쳤는데 하준은 시종 몇을 대동한 채였고, 나를 보자마자 걸음을 멈추긴 했지만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한 듯 그냥 고개만 살짝 숙였다. "잘 지내나." "네, 저하." 그게 전부였다. 예전 같았으면 최소한 요즘 무슨 그림을 그렸는지, 요즘 훈련은 어떤지 물어봤을 텐데, 이제는 그런 여유조차 서로에게 사치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나는 그 변화가 서운하다기보다는 당연한 흐름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는데, 왕태자에게는 배워야 할 것이 산더미 같다는 걸 대신관에게서 여러 번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야 여기서 우물이나 파는 신세지만, 저쪽은 나라를 짊어질 사람이니까.' 그렇게 나는 하준과의 거리감을 신분의 차이로 이해하며 넘겼는데, 그 이해가 얼마나 얕은 것이었는지는 훨씬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때는 그냥, 성녀와 왕태자 사이에 원래 그 정도의 거리가 있는 거라고, 나는 그렇게 믿는 게 마음 편했다. 열네 살이 되던 해 겨울, 나는 처음으로 의식 도중 손끝의 빛이 잠깐 끊기는 경험을 했다. 그 끊김은 순간이었고, 곧바로 다시 이어졌기 때문에 옆에서 지켜보던 신관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꼈다. '방금 뭐였지.' 손끝을 타고 흐르던 빛이 마치 촛불이 바람에 흔들리듯 한 번 깜빡였다가 다시 켜졌는데, 그 짧은 어둠이 내게는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나는 그 순간을 애써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는데, 며칠 뒤 같은 증상이 다시 나타났을 때는 더 이상 우연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나는 밤마다 이불 속에서 손끝을 들여다보며 그 빛이 다시 끊길까 봐 조용히 두려워했는데, 그 두려움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혼자 삼키는 게 어느새 새로운 일상이 되어버렸다. 손끝에서 아주 작은 빛의 알갱이를 만들어내는 연습을 몰래 해보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빛은 아무 문제 없이 잘 만들어졌기 때문에 나는 오히려 더 헷갈렸다. '평소엔 멀쩡한데, 왜 의식 때만 그럴까.' 나는 그 답을 찾지 못한 채 그저 밤이 지나가기를, 다음 보름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흘려보냈다. 그해 봄, 대신관이 지나가듯 흘린 말이 내 마음에 오래 남았다. 우리는 그날 신전 서고에서 옛 문헌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대신관이 낡은 책장을 넘기다가 별생각 없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성녀의 힘이 흐려지면 신성수도 함께 흐려진다는 옛 기록이 있습니다." 그 말은 단순한 옛이야기처럼 던져졌지만, 나는 그 문장을 듣는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고, 손에 쥐고 있던 책을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 대신관은 내 표정이 굳은 것도 모른 채 계속 책장을 넘기며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는데, 나는 그 뒤로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의식 때마다 내 손끝을 남몰래 유심히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흐려진다는 게, 설마 지금 이거 말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그 불안을 애써 눌러 담으며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균열이 조용히 자라나고 있었다. 나는 그 균열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으려 애썼는데, 신관들 앞에서는 평소처럼 담담한 얼굴을 하려 노력했고, 대신관 앞에서는 더더욱 티를 내지 않으려 조심했다. 그렇게 나는 혼자만의 비밀을 하나 더 짊어진 채로, 다가올 보름을, 그리고 다가올 만남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 균열은, 하준을 다시 만나는 순간 더 선명한 얼굴을 하고 나타날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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